35년 4 - 1926-1930 학생 대중아 궐기하자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4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제 강점 35년의 역사는 부단한, 그리고 치열한 항일투쟁의 역사다. 비록 독립을 가져온 결정적 동인이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임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설명은 무지 혹은 의도적 왜곡이다. 자학이다. 우리 선조들은 한 세대가 훌쩍 넘는 3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줄기차게 싸웠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일제 35년은 자랑스런 투쟁의 역사

 

이 책의 작가 박시백은 시사만화가로 1964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면서 총학생회 신문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1996년 한겨레신문 만평담당자 모집에 응모해 당선되었다. 이어 박재동 화백의 뒤를 이어 2001년 4월까지 한겨레신문에서 '박시백의 그림세상'을 연재했으며, 그 외에도 〈말〉, 〈출판저널〉, 〈뉴스피플〉 등의 매체에 만평을 연재한 바 있다.

그의 연재만화는 네컷 만화나 한컷짜리 만평이 아닌, 지면이 넓은 편인 페이지 만화이다. 왜냐하면 한 이슈의 이해를 돕기 위해 희화화하거나 패러디를 하는 보통의 다른 만평들과 달리, 그는 사건의 전후관계 및 배경과 진행, 그리고 논평 등의 과정을 통해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려는 시사만화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신문사를 그만둔 후에는 집에 칩거하며 하루 종일 '조선왕조실록' 국역CD를 공부했고, 2003년에 콘티부터 그림과 채색까지 모두 혼자서 작업한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출간했다. 이는 총 20권으로 기획된 대하역사만화로, 조선의 정치사를 철저히 '실록'을 바탕으로 했다. 35년은 총 6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910년 8월 29일 국권피탈에서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의 일제식민지 35년의 역사 중 1926년 부터 1930년 까지 일어난 학생과 대중의 운동사를 다루고 있다.

 

 

 

 

1926년~ 6.10 만세운동

1927년~ 신간회 창립

1928년~ 근우회 출범

1929년~ 광주 학생항일운동

1930년~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 파업

 

 

먼저 1920년대 후반의 세계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자.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전쟁의 참화로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특히, 패전한 독일의 상황이 가장 처참했다.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 때문에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으며, 공포스런 인플레이션 탓에 우유 한 병을 사려면 마르크 지폐를 한 가방 들고 가게를 방문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후 미국의 중재로 배상금이 대폭 삭감되고, 차관을 제공받아 숨통이 트였지만, 독일 국민들의 마음 속에 불만이 가득했다. 이 불만이 결국엔 나치즘의 히틀러를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에선 무솔리니가 등장해 강력한 국가주의를 부르짖으며, 이탈리아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잘나가는 공산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 이론을 포기하고 국가파시스트당을 조직해 1921년 총선에서 37명의 당선자를 배출했으며, 1922년 추종자들인 검은셔츠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으로부터 내각 구성권을 부여받는다. 이후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전쟁 특수로 호황을 누렸던 미국은 친기업정책으로 독점기업들의 성장을 가속화시키면서 공장들은 쉴새없이 상품들을 제조, 출하했다. 1920년대 말, 미국의 총생산은 전 세계의 50%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주식시장의 규모도 날로 성장하면서 5년 전에 비해 시총 규모가 3배로 커졌다. 노동자들도 주식으로 돈을 버는 그런 형국이었다. 거리엔 자동차가 넘쳐났고, 50층 이상의 고층 빌딩들이 경쟁적으로 올라갔다. 여가 시간엔 프로야구를 즐기며 홈런왕 베이브 루스에 열광했다.

 

한편,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후계자인 레닌이 소련을 세웠지만 내전과 반혁명으로 국가의 생산력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완수하기엔 자본주의의 유럽국들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했다. 병석에 든 레닌의 뒤를 이어 스탈린이 전면에 나서 삼두체제를 거쳐 완전하게 독재의 힘을 거머쥐었다. 민주주의는 위축되고 급격한 좌경화로 로선이 변경된다. 중국은 장제스가 북벌에 성공하여 중국을 재통일했지만 마오쩌둥이 혁명군을 구축한다. 대륙으로의 진출을 꿈꾸는 일본은 군부와 우익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면서 만주를 거쳐 중국 본토를 유린할 계획을 도모한다.

 

미국 번영과 함께 연일 상승세를 유지했던 뉴욕 월스트리트의 주식시장이 갑자기 팔자 주문이 쇄도하면서 대폭락 사태가 발생했다. 1929년 10월 24일, 대공황의 전주곡이 울렸던 것이다. 공장마다 재고가 쌓이고, 주가가 폭락하자 도산하는 기업들이 줄을 이었다. 이에 실업자가 덩달아 발생하고 공업 생산량이 급속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세계 경제를 이끌던 미국발 경제공황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것이 바로 경제대공황이다.

 

 

조선공산당의 등장, 신간회 결성, 그리고 광주학생운동

 

1925년 화요파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지만 일제의 탄압에 직면하고, 만주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이라는 양대 과제를 안고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나간다. 만주 지역 독립운동세력은 국공합작의 영향을 받아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민족유일당 건설 운동이 일어나는데, 만주에서의 유일당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자고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법.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협동전선을 모색하는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진다. 신간회는 총독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원산총파업, 광주학생운동 등을 지원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또 자매단체인 근우회근우회가 기독교 중심의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 여성들에 의해 1927년 5월 조직된다. 한편, 3·1혁명 이후 항일운동의 핵심이 된 학생들은 동맹휴학, 독서회 같은 비밀결사 조직을 통해 일제에 맞서고, 1929년 광주에서는 대규모 항일 민족운동인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다.

 

 

신간회 발기인 

 

광주에서의 학생운동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됐다. 광주와 송정리 간을 운행하는 열차로 통학하는 광주고보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인 광주중학교 학생들 사이엔 늘 가벼운 신체 접촉이 있었다. 그래서 양교에선 교직원이 상시 배치되어 사고 방지에 힘을 기울였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역을 출발해 나주역에 정차한 열차에서 승객들이 개찰구를 빠져나가는데, 광주중학교 3명의 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목격자인 여학생의 사촌동생이 이를 따지자 순간 싸움이 벌어졌고 출동한 일본인 순사는 한국 학생의 뺨을 때렸던 것이다. 억울했던 학국 학생은 다음날 일본인 학생들이 타고 있는 열차간으로 찾아가 또다시 싸움을 벌였다.

 

11월 3일, 일요일임에도 메이지 천황의 탄생일 가념식을 위해 학교에 등교토록 지시가 떨어졌다. 11시경, 기념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양교 학생들이 충돌했다. 순사와 교사들의 제지로 잠시 산회했던 학생들이 무장을 하고 교문을 나섰다. 이때 광주농업학교생 300명, 광주여고보생, 광주사범학교생 등도 이에 합류했다. 이후 광주 학생들의 시위는 전국적 이슈로 부각되었다.

 

"학생 대중아 궐기하자!"

"조선 민중아 궐기하자!"

 

 

노동운동의 성장

 

192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엔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전국적 대표 조직으로는 조선노동총동맹이 있었다. 이는 사실상 조선공산당의 장악 하에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의 권익 문제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순수 일본 자본으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목포제유공장의 파업, 영국인이 경영하는 원산의 문평제유공장의 파업, 원산노동연합회의 총파업, 부산 조선방직 노동자 파업 등으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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