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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실험 -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실험한 어느 괴짜 과학자의 이야기
딜런 에번스 지음, 나현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4월
평점 :
글로벌 공급망이 끊어졌다. 사람들은 사재기를 하기 시작했고, 하루 만에 슈퍼마켓 매대가 텅텅 비었다. 약탈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오자 모든 주요 도시에 병력이 배치되었다. 임박한 재앙의 조짐을 눈치 챈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곧 닥칠 어려운 시기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시고 지역에 자급자족 공동체를 세워 곧 쇄도하게 될 난민의 첫 물결을 피하려 했다. 이런 공동체 중에 '유토피아 실험'이라 불리는 공동체가 있었다. 오늘날 이곳에 사는 우리는 그저 '유토피아'라 부른다. - '비명' 중에서
단순한 실험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 딜런 에번스는 1966년 영국 브리스톨 태생으로, 사우샘프턴 대학에서 스페인어와 언어학을 공부한 뒤 2000년 런던 경제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지낸 뒤 바스 대학에서 로봇 공학을, 웨스트 잉글랜드 대학에서 인공지능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한때 자크 라캉 스타일의 정신 분석가로 현장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라캉주의의 논리적, 과학적 유효성에 의문을 품은 뒤 라캉주의가 환자들을 돕기보다는 더 해친다는 결론에 이르러 결국 라캉주의와 결별했다.
2006년 문명 붕괴 이후의 지속 가능한 삶을 실험하겠다며 '유토피아 실험'을 계획한 뒤 웨스트 잉글랜드 대학 부교수직을 사임했다.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에서 실제로 감행한 이 실험은 그에게 심각한 정신질환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2008년 대학으로 돌아와 아일랜드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코크에서 다시 행동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철학, 과학, 심리학, 문학을 넘나드는 글을 여러 매체에 기고한 그를 가디언지는 "실험복을 입은 알랭 드 보통"이라고 소개했다. 저서로 <유토피아 실험>, <감정>, <위험 지능>, <위약>, <라캉 정신분석 입문 사전>, <진화심리학 입문>(공저) 등이 있다.
이 책은 저자가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가정하고 자원자들을 모집해 현대 기술 없이도 수천 년을 살았던 마야인들처럼 18개월 동안 실제로 자급자족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보려 했지만, 결국에는 자기 파멸이라는 파국으로 끝나버리고 만 '유토피아 실험'의 시작부터 종말, 그리고 그 이후를 다룬 흥미진진한 논픽션이다. 내용은 실화를 근거로,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이다.
이상향의 축소판을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품은 저자는 살던 집도 팔고, 대학교의 교수직도 사임한 후 스코틀랜드 북부 하일랜드의 허허벌판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풀리는 듯했다. 살면서 지어본 농사라고는 기껏 호기심에 길러본 대마초가 유일하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리기에 적합하고 꼭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이 '유토피아 실험'에 지원했다.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조금씩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천막집 유르트를 함께 지어 올리고, 나무 데크를 만들고,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아 장작을 패고, 밭을 갈고, 물을 긷고, 요리를 했다. 비록 사슴 사냥에 실패한 뒤 기르던 돼지를 잡아 바비큐 파티를 할지언정 문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서도 그럭저럭 먹고살 만하다고 느꼈다.
"자원자들이 결국 내 신경을 갉아먹는 존재가 되리라고는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실험 초반의 평온함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것이었다. 피크 오일(석유 종말)이 임박했으며 문명이 '진짜로' 붕괴될 것이라고 확신한 한 자원자는 예상한 문명 붕괴의 7단계를 이야기할 때마다 즐거워했다. 공동체의 규칙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위대한 영靈'의 명령에만 따른다는 괴상한 믿음을 지닌 또 다른 자원자는 무신론자인 저자와 모든 사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실험은 처음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갔다.
대중의 광기狂氣와 '유토피아 실험'
스코틀랜드의 저널리스트 찰스 매케이는 자신의 저서 <대중의 미망과 광기>(1841년)에서 "인간은 무리로 있으면 광기에 빠졌다가 오직 한 명씩 천천히 제정신으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16세기 중반 터키에서 네델란드로 건너 온 튤립은 구근식물이다. 꽃이 너무도 아름다워 상류층에서 이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너도나도 이를 과시용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양파처럼 생긴 구근 1개의 가격이 당시 주택 한 채를 구입할 수 있는 가격으로까지 폭등했다. 이를 '튤립 버블'이라 부른다.
우리 인간들을 하나씩 놓고 보면 매우 지적인 생명체이다. 그러나 여럿이 모여 사회가 만들어지면 일종의 집단적 어리석음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찰스 매케이의 저서에 나타나는 투기 거품,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등 일반 대중들이 미망迷妄에 빠진 역사적 사건들이 이를 입증한다. 지금 시대는 그때보다 오히려 대중의 광기가 더욱 심한 것 같다. 현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저자의 눈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역시 미쳐가는 것처럼 보였다. 분별 있는 개인들이 기후 변화의 위험을 경고하며 저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서의 세계가 위험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정상적인 공동체, 집단 사고나 미망에 물들지 않은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유토피아 실험은 이런 사회의 축도縮圖를 만들려는 시도였다.
지구 종말론자들은 현대 문명이 붕괴되기를 고대한다. 비록 수십억의 목숨이 희생될지라도 거품 경제의 풍선은 언젠가 결국 터지게 되어 있는 것처럼 이 세계를 바로잡을 날이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최후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더 인간적인 사회, 산업화로 인한 무수한 폐해에 물들지 않은 사회를 재건설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즉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대환난 이후 천년왕국의 평화와 번영이 이어지듯 붕괴 이후의 세상은 산업혁명 이전의 행복한 삶의 방식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측한다.
지구 종말 이후의 삶
이제 저자의 마음 속엔 유토피아 실험이 단순한 모의실험, 그러니까 붕괴 이후의 삶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는 방식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 실험은 진짜로 닥칠 일을 대비하는 실험이었다. 지구가 붕괴되리라는 생각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종말은 그저 가능성이 있는 일이 아니라 가까운 시일 안에 확실히 일어날 일처럼 여겨졌다. 어느 날 저녁 저자는 여동생 샬럿에게 전화를 걸어 그 계획을 설명했는데, 수화기 반대편에선 침묵이 흘렀다.
"실험을 하나 시작할 거야"
"그래그래. 무슨 실험인데?"
"지구 종말 이후의 삶을 실험하는 거야"
왜 유토피아 실험은 빨리 실패할까?
아마 그 이유는 시계를 0년으로 다시 맞추겠다는, 제로에서부터 다시 쌓겠다는 생각 자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이상주의자들이 바꾸고 싶어 하는 기성 제도는 대개 결함투성이지만, 한편으로 여러 세대와 무수한 세월의 연구 개발을 거쳐 축적된 지혜를 구체화하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제도의 특징보다 그 오류를 먼저 찾는다. 제도가 가진 결함의 일부는 모든 종류의 사회 조직에 내재한 결함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공통된 관심사를 갖고 있기에 집단을 형성하나,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은 항상 일부이며 갈등은 교집합을 이루지 못한 부분에서 생겨나기 마련이다.
유토피아 실험이 빨리 실패하는 원인은 이런 실험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의 유형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주의자가 현실적이기까지 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상주의자는 터무니없이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어서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면 금세 환멸을 느낀다. 또 완벽한 사회가 어때야 하는지에 관해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싸움은 훨씬 더 격렬해진다. 이들이 사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또한 사회 부적응자를 끌어들이는데, 이 부적응자들이 사회에 통합되지 못하는 것은 이들이 비난하는 사회의 탓이 아니라 불평불만 많은 스스로의 성격 탓일 가능성이 있다.
결국 실험을 중단하다
저자가 더 이상 실험을 신뢰하지 않게 되면서 공교롭게도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헌신적이 된 듯했다. 그 어느 때보다 전 지구적 붕괴의 징후가 임박했다는 확신에 빠져 있었다. 모두 힘을 합쳐 이렇게 열심히 땅을 경작하고 유르트를 지었는데 왜 이 모든 것이 18개월 후에 중단되어야 한단 말인가? 무기한 머물면 어때서? 그들이 생각하기에 어쨌든 문명은 얼마 안 있어 정말로 붕괴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붕괴가 일어났을 때 살아남길 원한다면 이곳만큼 훌륭한 장소는 없었다.
자원자들 모두를 저자의 망상 속에 끌어들이는 데 막 성공해놓고 스스로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음을 깨달은 셈이었다. 그리고 망상은 수수께끼처럼 사라졌다. 어떤 모호한 힘이 저자를 떠밀어 문명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믿게 했고, 이제 그 힘은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수수께끼같이 떠났다. 그 결과로 저자는 휘청거리며 무너졌다.
결국 세상은 종말로 향한다
과학 기술은 진보해왔고 과학의 힘은 점점 증가해왔다. 이로 인해 우리들은 조상들보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로 인간 삶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는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이 세상의 종말로 다가가는 한 걸음이다. 길게 보면 인간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 인간이 수명 연장법을 발견한다 해도 우주는 결국 끝없이 팽창하다가 차갑게 얼어붙을 것이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
오늘날 수많은 대안 공동체나 생태주의 마을에 자발적 의지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와 철학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한다.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협력보다 경쟁을 통해 성장하라고 권하며, 개인을 단지 소비자에 머물게 하는 현대 사회에 과감히 반기를 든 사람들에게 이 책은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아가 저자는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와 상상력 없는 현실주의' 사이에서 매 순간 방황하는 이들에게 용기 있는 실천의 한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