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수업 - 품격 있는 삶을 위한 예술 강의
문광훈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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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창밖을 내다보는 한 여인의 모습이 있고, 아름다움의 끔찍함을 그린 카라바조의 그림이 있으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는 추사의 말년 자화상이 있다. 지옥의 강을 건너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있듯이, 삶과 자연을 돌아보게 하는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도 잇다. 쓰기란 무엇이고, 도시와 거리와 건축은 어떤 관계인지, 젊다거나 늙어간다는 것 혹은 사랑이나 슬픔이란 무엇인가? 교양이란 무엇이고, 인문학의 방향은 어떠한가에 대한 탐색이, 마치 못다 이룬 꿈 혹은 그리움의 편린처럼, 곳곳에 박혀 있다. - '서문' 중에서

미학美學 강의 46강

이 책의 저자 문광훈은 충북대 독문학과 교수이다. 고려대 독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독문학)를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인문학과 김우창> 등 김우창론 5권이 있고, 독문학 쪽으로 <페르세우스의 방패>(페터 바이스론)와 <가면들의 병기창>(발터 벤야민론)이 있다. 한국문학 쪽으로 <시의 희생자 김수영>과 <한국현대소설과 근대적 자아의식>이 있고, 미학 쪽으로 <숨은 조화>,  <렘브란트의 웃음>, <심미주의 선언>이 있다. 김우창 선생과의 대담집 <세 개의 동그라미: 마음-지각-이데아>가 2008년에 나왔다. 번역서로 <한낮의 어둠>(아서 케슬러), <소송/새로운 소송>(바이스),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리온 포이흐트방거)이 있다.

이 책은 기출간되었다가 절판된 도서 <영혼의 조율>(2011년)을 새롭게 다듬고 수정하여 편집한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왜 미학을 공부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다섯 가지의 답으로 응수한다. 즉 첫째, 문門 혹은 교차로와의 만남, 둘째, 감각의 쇄신, 셋째, '넘어가는' 능력, 넷째, 더 넓고 깊은 지평으로, 다섯 째, 향유 등이라고 말한다.

 

 

일상을 초월하다

우리는 예술 속에서 혼자가 아니다. 이 작품들의 시인, 화가, 음악가 등과 영적靈的으로 어울린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작품들의 문문과 창창을 통해 더욱 넓은 세계로 나아감으로써 이 세계에서 풍요로움을 느낀다. 마치 세상에서 처음 눈을 뜬 아이처럼 그 풍경을 바라보며 경탄한다. 작가 알베르토 카뮈는 이렇게 경탄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라고 글을 썼다.

자기 삶을 향유하다

예술의 경험은 우리의 세계가 그리 좁은 게 아님을 깨닫게한다. 즉 더 넓고 깊게 확대될 수 있음을 느낌으로써 우리들은 스스로 변할 수 있어야 한다. 넓고 깊은 삶의 지평을 떠올리게 하지 못한다면, 예술은 무용지물일지도 모른다. 이 지평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심미적 경험이 삶의 변형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

 

 

아름다움과 끔찍함은 짝이다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할까? 모티브나 양식의 변화, 구성 방식 등 여러 사항이 있지만,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 가장 간단한 것은 그냥 천천히 하나하나 세심하게 음미하는 일이다.
그림에서 사람과 사물은 어떻게 배치됐고, 빛은 어디에서 나와 어디를 비추며, 인물의 표정이나 팔다리 그리고 몸의 자세는 어떤가 등에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즉 화가의 기술적 숙련성은 말할 것도 없고 관심이나 성격 그리고 문제의식까지 배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것에 배어 있는 작가의 흔적-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다. 작가는 어떻게 이 세상을 표현했고, 어떻게 자기 삶을 살았을까? 이처럼 예술도 결국은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을 감상해보도록 하자. 카라바조(1571~1610년)의 그림이다.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인데, 카라바조는 그가 태어난 이탈리아 북부의 마을 이름이다. 그의 그림은 강렬하다는 특징을 지녔기에 서양 예술사에선 그를 '빛과 그늘의 혁명가', '회화의 이단아'라고 평가한다. 그의 삶은 늘 불안한 나날이었으며, 평생을 싸우고 잡히고 죽이고 도망쳤다. 결국엔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 아이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왜 그럴까? 아이의 앞에는 꽃이 감긴 화병이 있고, 화병 옆엔 열매가 놓여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도마뱀 한 마리가 보이는데, 아이의 손가락을 깨물고 있다. 아마도 꽃을 감상하려다가 일순간에 보호색으로 위장한 도마뱀에 물리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초점은 꽃과 도마뱀인데, 이는 아름다움과 끔찍함의 대비로 볼 수 있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년)는 '아름다움이란 끔찍함의 시작일 뿐'이라고 했지만, 미美는 혼자 오지 않는다. 아름다움 곁에는 끔찍함이 있고, 그 전후前後엔 추함과 경련과 전율이 있다.

 

우리는 미와 경악이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 둘은 깊게 얽혀 있다.비중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늘 뒤섞여 찾아온다. 아름다움과 끔찍함은 빛과 어둠처럼 짝이다. 이 교차적 운명에서 우리는 헛되이 미를 갈구하곤 한다. 그러나 삶은 아름다움과 끔찍함이 어울리는 몇 번의 순간 사이에서 시작하고 끝나고 만다.

 

 

 

 

산과 집과 강과 나무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는가? 일이 잘 안풀려 머리가 아플 때, 인간관계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할 때, 또는 진행하던 일이 끝나 잠시 쉴 때, 음악을 감상하듯이 그림책을 펼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풍경화도 좋고 자화상도 좋고, 동양화도 좋고 서양화도 좋다. 특히, 동양화가 더욱 좋다.

책은 홍대연(1746~1826년)의 지두화指頭畵를 싣고 있다. 이 그림은 손끝에 먹을 묻혀 그린 그림이다. 붓이 아닌 손가락 끝으로 그렸기 때문에 거칠지만 자연스러운 멋이 풍긴다. 멀리 산이 잇도, 강물이 흐르고 그 옆에 정자 하나가 단출하게 서 있다. 버드나무 한 그루는 초봄인 듯 아직 앙상하다.

겨울엔 죽은 듯이 서 있던 버드나무가 봄이 되면 초록 옷으로 갈아입는다. 조금의 시차가 있을지는 몰라도 봄이 오면 영락 없이 녹색으로 바뀐다. 우리 인간의 생애가 어찌 버드나무의 삶에 견줄 수 있겠는가? 또한 강물이나 산도 막혔던 물줄기가 열리고 초목으로 화장을 한다. 이들의 삶은 매우 길지만 우리들의 삶은 일시적이다.  ​

 

인물산수도

거품-확장-열풍-무분별은 자기한계를 의식하지 않은 데서 생겨난다. 한계는 삶의 테두리를 돌아봄으로써 자각된다. 예술이 상기시키는 바로 이 근원적 질서다. 이 질서 앞에서 진상은 허상으로 바뀌고, 쓸모없는 것은 쓸모있는 것으로 변모한다. 주위를 돌아볼 때 마음은 두려워지면서 평안해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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