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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묻고, 톨스토이가 답하다 - 내 인생에 빛이 되어준 톨스토이의 말
이희인 지음 / 홍익 / 2019년 2월
평점 :
그는 예술가였지만 예술을 미워했다. 귀족이었지만 귀족을 미워했다. 90권이나 책을 썼지만 말을 믿지 않았다. 결혼을 했지만 결혼 제도를 부정했다. 언제나 육체의 욕구에 시달리면서 금욕을 주장했다.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였지만 지성을 증오했다. 이런 모순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는 이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올바른 삶의 방법을 모색했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 해답 찾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절제해야 한다.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 이것이 그가 찾은 해답의 핵심이다. - '14쪽' 에서
인간의 삶에 대해 톨스토이가 답하다
이 책의 저자 이희인은 광고 카피라이터로 20여 년 넘게 살아 왔으며, 여행자라는 또 다른 이름 을 얻게 되었다. 문학과 음악, 사진, 여행, 광고 등 문화 영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 줄곧 마음을 끈다. 군대 취침등 아래서 읽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에 감전돼 러시아 문학으로 관심이 번졌고 운명적으로 톨스토이와 만나게 되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지난 겨울, 톨스토이 묘지 앞에 서는 데 성공했다. 저서로 <여행자의 독서> 시리즈, <여행의 문장들>을 포함한 아홉 권의 책을 냈으며, 대학에서 광고와 사진 등 을 강의하고 현재 대학원에서 시각예술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다.
한 작가가 평생 쓰고 발표한 작품들이라 할지라도 인간 세상의 특정 국면에 머물기 마련인데, 톨스토이는 자신의 90여 권 책들 속에 인간의 삶에 관한 거의 모든 문제들을 다루었다. 즉 사랑, 결혼, 성, 죽음, 도덕, 법, 종교, 의식주, 도시, 문명 등 그가 취급하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었다. 이처럼 톨스토이 안에는 삶의 모든 것이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를 철학자이자 사상가로도 부른다. 톨스토이에 없는 삶이라면 어쩌면 우리들 삶에도 없는 것이리라.
대체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저작에 속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1910년)의 일부만을 취해 이를 톨스토이의 사상 전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피하려고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 속에 담긴 생각들을 들추어내고 있다. <안나 카레리나>(1877년), <부활>(1899년),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년), <크로이체르 소나타>(1890년) 등에 언급된 톨스토이의 말과 사상을 다루었다.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를 펼치면 맨 먼저 대표적인 구절을 만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다 서로 비슷한 것이고, 불행한 가정은 어느 경우나 그 불행의 상태가 다른 법이다" 이는 바람 잘 날 없는 이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첫 머리를 떼는 말이다. 즉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가 바람을 피우다 아내에게 들켜서 집안이 발칵 뒤집어진 첫 장면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결혼생할이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마도 인간의 물욕物慾을 감안한다면 무한대가 아닐까 싶다. 돈, 자녀, 교육, 종교, 인척, 건강, 성적 매력, 취미 등등 다양한 요소들에 얽힌 문제들에 대해 부부가 합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중엔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이들과도 마땅히 잘 맞아야 할 것이다. 이들 중 한 가지 요소가 어긋나더라도 사실상 그 결혼을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다. 행복이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일상에서 흔히 '행복'이란 용어를 너무나도 쉽게 사용하는 듯하다. 도대체 맛도 없도(아니 너무나도 다채로운 맛이겠지만), 냄새도 나지 않고, 색깔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행복을 과연 누가 정의를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소위 '잠결에 뜬구름 잡는 격'이 아닌가 말이다. 행복과 불행이란 말은 서로 반대어이지만 사실은 비교어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부탄이라는 히말라야 산 아래의 작은 나라 국왕이 자신들은 행복지수가 높다고 강조하는 말은 단순히 자기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그 나라 국민들도 문명화가 가속될수록 소유 욕구가 더 늘어나면서 부족한 것에 대한 불만이 더욱 생겨서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럴진대 대한민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주구장창 한국인의 행복도가 OECD국가들 중에서 최저수준이라고 떠들어댄다. 왜 그럴까? 해결책도 없으면서 단지 상대편을 깍아내리려는 꼼수일 뿐인 것이다.
사랑에 성공하려면
오빠의 바람기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된 일을 중재하려고 안나 카레니나는 오빠 오브론스키의 집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얼굴이 잘 생긴 귀족청년(브론스키)을 모스크바 기차역에서 만난다. 그녀는 정부 고위 관료의 부인이자 아들까지 둔 유부녀이지만 우아한 자태와 미모 때문에 사교계에서 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그래서일까? 귀족 청년도 이 유부녀에게 푹 빠져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없이 줄기차게 들이댄다. 결국엔 유부녀라는 신분은 잊고 안나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하지만 남편은 사회적 지위를 의식해서 이혼에 응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몰래 만나는 두 남녀의 불륜은 시간이 갈수록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니 불편하기도 하고 금방 확 타 올랐던 사랑의 불길은 식어갈 수밖에 없었다. 서로 권태기를 느끼던 중, 유부녀인 안나는 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를테먄 돌이길 길이 막혀버린 셈이다. 결국 그녀는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가 위대한 이유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는 절대적으로 악하거나 절대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두 각자의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한다. 모든 인물들의 생각, 행동, 결단에는 나름의 이유와 철학이 내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안나를 죽음으로 내몬 귀족 청년과 안나의 남편, 그리고 타인들을 악하다고만 할 수 없는 셈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가장 불행한 인간이 되느냐, 그중의 어느 것도 당신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 하지만 그것조차 안 된다면 죽어 버리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저는 기꺼이 죽어 버리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괴롭히는 존재라면 이젠 두 번 다시는 당신 앞에 나타나질 않겠습니다"
이는 불나비처럼 들이대던 귀족 청년이 안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이 저돌적인 공격에 맥을 못추고 안나는 청년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미 사랑에 눈이 먼 상태였기에 그녀는 비극의 시초를 알아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사랑에 성공한 청년의 노하우는 뭘까? 청년의 고백에서 안나는 진정성, 즉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이다. 그렇다. 타인의 마음을 얻으려면 '진심' 뿐인 것이다.
행복의 조건은 노동이다
톨스토이의 우화(동화) <바보 이반>은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한다. 줄거리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흡사하다. 오만해진 리어왕은 세 명의 딸에게 왕국을 분할해서 상속하려고 충성 테스트를 하는데, 간사한 장녀와 차녀의 말에 속아 막내 딸을 추방하고 만다. <바보 이반>에 등장하는 부유한 농부도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에게 재산을 분배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남과 차남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주고 바보 이반과 막내 딸에게는 빈 손이었다.
도깨비를 살려준 대가로 마음씨 착한 이반은 도깨비로부터 병사와 돈을 만드는 법을 배워 궁지에 몰린 두 형을 도와 큰형은 군사력으로 왕국을 일으키고, 둘째 형은 돈과 무역으로 왕국을 키워 갈 수 있도록 만든다. 한편, 이반은 심각한 병에 걸린 나라의 공주를 고쳐준 포상으로 왕의 사위가 된 후 나중에 왕국을 물려 받는다.
바보 이반은 왕이 되었지만 장인의 장례를 치르고 나자 임금 복식을 내 벗어 던지고 삼베 속옷에 잠방이를 걸치고 짚신을 신은 채 일(노동)에 매달렸다. 대신들이 이런 왕의 행동을 말리자 이반은 대신들에게 말한다. "임금도 자기가 먹을 건 자기가 일구고 만들어 먹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반의 귀머거리 여동생은 궁궐의 부엌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밥만 축내는 게으름뱅이의 기준을 만든다. 기준은 정말 단순하다. 즉 '손에 못이 박혀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못이 박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남이 먹다 남은 음식 찌거기를 준다. 귀빈이나 고관 대작들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렇게 톨스토이가 말하는 '노동'은 거창하고 고되고 어려운 게 아닌 듯하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자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단지 자기가 먹을 건 자기가 만들자는 정도다. 이를테면, 자기 빨래는 손수하고 자기 집의 낡은 곳도 직접 수리해서 살라는 것이다. 눈이 많이 내린 날 아파트 앞에 쌓인 눈을 치우지도 않는 도시인들에게 톨스토이는 <바보 이반>을 통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말한다.
타인의 부고를 접했을 때 우리들의 마음은?
나이가 쉰을 훌쩍 넘어 선 톨스토이는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할 의도였는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란 책을 펴냈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들에게 묻는다.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은 어떠냐고 말이다. 우리들 대부분 누군가의 부고 소식을 접하면 의례 '다음 세상에선 좋은 곳에서 편히 살길' 이라고 애도의 마음을 보낸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우리들에게 그뿐이냐고 다그친다.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 신사들은 하나같이 머릿속으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자신과 동료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분석하고 계산하기에 바빴다. '요컨대, 이반 일리치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가 오늘밤 유쾌하게 지내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말일세'
슬픈 죽음. 끔찍한 죽음. 참 안된 죽음. 그러나 그보다, 다행인 죽음. 내가 아니라서 다행 인 죽음. 나에게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죽음. 나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길 바라는 죽 음. 내 즐거운 일을 방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죽음. 그리하여 귀찮은 죽음. 불결한 죽음. 우리 마음은 어느덧 망자에 대한 슬픔과 연민에서 이질감과 경계심, 귀찮음과 불결함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106쪽)
참고로, 소설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러시아에서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를 통해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죽음에 대해 일생을 바친 20세기 유명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의 이론에도 닿아있다. 퀴블로 로스(1926~2004년)는 수많은 암환자들을 관찰한 끝에,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가 이를 수용하는 과정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는 5단계로 설명한다. 이 위대한 발견으로 수많은 학술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전에 톨스토이의 작품에 드러나 있다.
톨스토이를 읽자
톨스토이는 생전에 인류의 스승으로 존경받은 인물이다. 노년에 들어서는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막강한 팬덤을 구축했고, 전 세계 지성인들도 앞다투며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는 작가들의 작가로 칭송받은 대문호임과 동시에 인간과 인간의 삶을 성찰한 위대한 사상가이다. 요즈음 한국영화는 수작秀作이라 불리면 관객이 일천만 명을 돌파한다. 하지만 톨스토이를 읽는 독자의 수가 일천만을 넘을까? 아무리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지만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을 뭘까? 사색아닐까 싶다. 이는 독서를 통해 쌓이는 능력일 것이다. 잘 풀리지 않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사람들이라면 특히 더 독서가 필요하다.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