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24
김유철 지음 / 네오픽션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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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는 멍하니 서서 함박눈이 내리는 저수지를 바라봤다. 저수지의 표면은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하늘에서 떨어진 눈송이는 저수지 경계면에 부딪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해나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춥지 않을 거야" 해나는 습관처럼 주먹을 꼭 쥐었다. "춥지 않을 거야. 용기 내, 해나야" - '프롤로그' 중에서

 

 

비극은 예정되어 있었다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한 여고생의 시신이 저주지 위로 떠오른다. 같이 밤을 보낸 학교 선배 '재석'해나를 성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혐의로 구속된다. 대학 후배이자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는 '조 변호사'의 부탁으로 이 사건을 맡게 된 '김'(김 변호사)은 단순한 남녀 사이의 문제가 아님을 직감하고, 사건 이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해나의 가족, 친구, 학교, 직장 동료 들을 만나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항상 밝게 생활하던 해나가 현장실습을 나갔던 콜센터 해지방어팀의 과도한 실적 압박과 비정상적인 업무량, 비인격적인 대우로 고통스러워했고, 그것이 해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의 작가 김유철은 부산 출생으로, 2002년 스포츠서울과 바로북에서 주관하는 1회 한국인터넷문학상에 장편 추리소설로 대상을 탔다. 2007년 1회 황금펜상을 수상했고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중편해양소설부분에 당선, 2010년 제15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장편으로는 <오시리스의 반지>,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 등이 있으며, 중단편으로는 <국선변호사 그해 여름>, <탐닉>, <암살>, <메이데이>,<미츠코에 관한 추억>, <연인> 등을 발표했다.

 

이 사건의 이해를위해선 먼저 김해나의 집안 형편을 살펴보는 게 좋다. 한 달에 120만 원을 버는 청소운 엄마, 중학생과 초등학생 두 남동생, 이렇게 해나를 포함해 4인 가족이다. 살고 있는 집은 빌라의 반지하로 보증금 3천만 원에 월세 20만 원짜리 주거시설이다. 집안의 장녀인 해나는 책임감이 투철해서 고3 때 부산의 한 기업체의 콜센터 해지방어팀으로 현장 실습을 나갔다.

 

콜센터라는 곳이 어떤 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루 100건 이라는 목표가 할당량으로 주어지는데, 이를 채우지 못하면 퇴근이 없는 그야말로 악명 높은 근무지인 셈이다. 고객이 요구하는 해지를 막아야 하기에 온갖 욕을 얻어먹으면서 노동함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선 할당량 미달이면 추가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슈퍼갑질'을 행사한다. 게다가 상사로부터의 험한 말을 감수해야 하고, 반성문까지 제출해야 하는 그런 근무 환경이다. 그래서 단기간에 퇴사하거나 퇴사후에도 정신과 진료를 받는다는 얘기까지 있다.

 

 

 

 

죽음을 결심하기 전, 해나는 현장실습의 애로와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담임 선생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 자리에선 위로와 격려는 커녕 "불경기에 그런 대기업 하나 뚫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느냐", "졸업할 때까지 무조건 버텨라"라고 강압적인 말과 함께 손찌검까지 당하고 만다. 더 이상 해나가 기댈 곳이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무조건 월요일에 출근하라는 말이 해나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던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좀 전에 너네 팀장님하고도 통화를 했으니까. 월요일에는 꼭 출근하는 거야"
"그래도 다니기 싫다면요?"
"어머니에게 전화를 할 거다. 그리고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말할 거야"
해나는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해나는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한 번만이라도, 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어볼 수는 없으세요? 전,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헛구역질이 나고 손발이 떨린단 말예요" - 207쪽

 

이처럼 해나와 같은 현장실습생은 화장실을 갔다 오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콜 수에 대한 압박을 받고, 그리고 욕설과 함께 무작정 화부터 내는 사람들을 매일매일 상대해야 하는 감정노동에 가까운 일을 감당해내야 하면서도 정작 회사나 학교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실태였다. 아무리 강한 성격을 가진 해나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평소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보살펴주던 선배 재석을 불러내 술을 마시고 당일 잠자리를 함께 한 후 새벽에 저수지로 향했던 것이다. 범인으로 지목되어 감옥으로 향할 뻔 했던 재석은 김변호사의 활약으로 무죄를 확정받는다. 결정적인 증거물은 저수지에 빠진 해나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나랑 함께 있어줘 고마워. 언제나 내편이었던 사람은 재석 선배뿐이었던 것 같아. 베란다 창문으로 하늘이 밝아오는 걸 보면서 난 절망을 느꼈어. 이대로 영원히 월요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거든. 미안하지만 나 대신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탁해도 될까. 선밴 착하니까 분명히 거절하진 못할 거야. 그렇지?^^ 그리고... 미안해.

 

 

자본주의 시스템의 민낯을 보다

 

현장실습생 제도의 여러 폐단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IMF가 터지자, 경제위기의 두려움 속에서 현장실습생 제도는 임금 부담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매스컴에서는 '고졸 신화', '학력 파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정작 학생들은 아무런 사회적 보호망조차 마련되지 않는 현장으로 내몰려야 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미래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민낯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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