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4 - 태평천국 Downfall 본격 한중일 세계사 4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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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 전쟁으로 말미암아 청조는 10년의 시간과 막대한 경제력·인력을 낭비했기에 19세기 중반의 골든타임과 포텐셜을 허망하게 날렸다고 볼 수 있고, 2차 아편전쟁은 이후 중국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의 오프닝으로서 청조가 점차 쇠망해 50년 후의 멸망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청조 존망의 파천황적 위기라는 정세 분석이 맞는 셈이죠. - '머리말' 중에서

 

 

청나라가 쇠망해가다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했던 당시 중국을 오간 조선의 사신들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지방 도적 떼의 준동蠢動 정도로 그리고 영불연합군에 의한 베이징 함락도 일시적인 사변으로 정세보고서에 기록했다고 한다. 반면 일본은 태평천국에 관해 한족 국가 부흥 운동이자 대륙의 패권이 걸린 내란으로, 2차 아편전쟁에 대해선 중국이 완전히 서양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두 나라의 시각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대동소이하다.   

 

즉 청淸나라 말기 홍수전과 농민반란군이 세워 14년간(1851~1864년) 존속한 태평천국은 난징 주변의 그리 크지 않은 영역만 초토화시켰을 뿐 지역 반란으로 끝났고, 서양 세력은 베이징에 들어왔다가 금방 나가 장사에 몰두할 뿐이었다. 이후 청조는 모든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금 힘을 회복하는 동치 중흥기 同治 中興期로 접어들며 반백년을 더 버텼으니, 이 모든 난리에도 청조의 통치가 계속되리라는 정세 판단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의 글과 그림을 모두 담당한 굽시니스트(김선웅)는 1981년 대전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했다. 굽시니스트라는 필명으로 2009년부터 <시사인>에서 <본격 시사인 만화〉를 연재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본격 한중일 세계사>, <박4모>,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전 2권), <이이제이의 만화 한국 현대사> 등이 있다.

 

19세기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사이비 종교 태평천국은 어떻게 시나브로 사라졌을까? 1차 아편 전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던 서구 세력이 어째서 다시 청나라 앞바다에 모였을까? 베이징 앞마당에서는 총포를 쏴대던 영불연합군이 왜 상하이에서는 청 관군의 편에 서서 태평천국을 공격했을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청나라의 안팎 사정을 두루 살펴보아야 한다.

 

책은 태평천국이라는 '내우內憂'와 영불연합군이라는 '외환外患'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청나라 말기 상황을 들여다본다. 내부분쟁인 천경사변 이후 태평천국의 상황부터 2차 아편 전쟁의 시작과 끝, 청 황제 함풍제의 붕어와 신유정변까지 다루고 있다. 한편, 책 말미에 실린 '굽씨의 오만잡상'이라는 추가글은 만화에 미처 다루지 못한 역사지식을 제공하는 덤이다.

 

 

 

 

청 제국을 향한 19세기 세계열강의 시선은 복잡다단하다. 대포 찜질로 순조롭게 굴복시키고 싶으면서도 청나라가 망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서양이 연합군을 결성해 남중국해에 집결하고 총칼을 들고 베이징까지 진격하면서도, 태평천국의 공격에 비실거리는 청 관군에 협력해 상하이를 지키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청 제국은 서양의 공격 앞에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도 함께 태평천국을 물리쳐달라며 서양에게 손을 내민다. 태평천국은 그들 나름대로 '같은 기독교 믿음의 형제' 운운하며 서양 선교사들을 회유하고, 바다 쪽을 점령하려는 동정 정책과, 장강을 따라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서정 정책으로 청 관군을 향한 공세를 이어간다.

 

 

제2차 아편 전쟁

 

베이징 서북쪽 호수 지대에 조성한 황실 정원-삼산오원. 그 으뜸으로, 만원지원이라 불리는 원명원圓明園. 18세기, 건륭제가 이탈리아 신부 미술가 카스틸리오네 등을 기용해 건축한 서양루 등 화려한 건축물들 안에는 매시간 해당 시간의 동물이 물을 뿜어내는 12간지 분수 시계 등 온갖 진기한 보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원명원에 프랑스군이 난입한 1860년 10월 6일, 원명원 수비대는 전멸하고 내무부 대신 문풍은 자결했으며, 궁인들은 도주했다. 원명원 대약탈로 프랑스군 장병 4천여 명이 1인당 수천만 원에서 억대의 보물을 챙길 수 있었다고 하니 도적 중의 도적이다. 한편, 영국군은 다음 날 원명원에 도착해보니 이미 프랑스군이 거의 다 노략질을 한 듯 보였다. 이에 영불 약탈품 분배 위원회를 구성, 이를 고옹 경매에 붙이기로 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벌써 빼돌려 진 상황이었다. 

 

 

 

 

상하이 트위스트

1860년 8월, 청나라는 영불연합군과 전쟁 중이었다. 연합군이 톈진 연안에 상륙해서 베이징으로 진격할 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이 베이징 쪽에선 청나라군을 두들겨 패고, 상하이 쪽에선 청나라군을 돕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래서 태평천국의 이수성은 상하이의 서양인들 협조를 요청하며 영불 선교사들에게 작위까지 부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강남대영을 궤멸시키고 상하이로 진격한 장군 이수성은 청나라와 영불연합군이 전쟁 중이니 당연히 상하이에서 영불이 청나라 편을 들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상황은 완전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즉 상하이의 영불 공사들에게 내려진 본국 전권대표단의 지시는 "상하이의 영불병력은 청 당국에 협력해 상하이를 지킬 것"이었다. 왜 영국과 프랑스는 이런 행동을 보였을까? 그 이유를 알아보자.   

 

그 이유는 첫째, 상하이가 태평천국군에게 점령당할 경우, 청나라에게서 얻은 영불의 이권을 태평천국에게서 갱신받기 어렵다. 둘째, 영불의 전쟁 목적 달성에 태평천국의 상하이 점령은 방해가 될 수 있다. 셋째, 청나라에 지금까지 들인 서열 정리 작업의 공이 아깝고 이젠 마무리 단계이기에 그 과실을 맛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 때문이었다.

 

 

황실의 피난

 

일찌기 제위 초 반부패 개혁 운동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함풍제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숙순은 정국을 주도하는 권신으로 위세를 떨친다. 하지만 1860년, 영불연합군을 피해 함풍제를 데리고 열하熱河로 도망치면서 숙순의 권위에 살짝 금이 가기 시작한다. 황실의 피난, 원명원 소실, 베이징 함락 등 미증유의 국치 사태를 맞아 책임론이 거론되면서 숙순의 반부패 숙청에 두들겨 맞았던 관료의 다수가 베이징에서 숙순에 대해 반격의 칼날을 갈기 시작하면서 베이징 내 안티 숙순, 국정 쇄신의 여론은 베이징에 남아 난국을 수습한 공친왕에게 모아진다.

 

하지만 이에 부담을 느낀 동생 공친왕은 함풍제 형님에게 열하에서 자금성으로 환궁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숙순 입장에선 베이징으로의 환궁은 자신에게 책임론과 처벌론이 대두될 수 있는 매우 불리한 일임을 알기에 함풍제에게 서두르지 말고 아직도 영불연합군이 톈진에 남아 있고 함대가 발해만에 진을 치고 있으므로 이곳 열하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고 건의한다. 황제도 면목이 없기는 매 한 가지라 이를 받아들인다.  

 

 

우화대 전투

 

1862년 7월, 증국전군軍 3만은 난징성 바로 옆 우화대 고지에 도달했다. 지난 1, 2차 강남대영과는 기반이 확실히 달랐다. 장강을 따라 차근차근 난징까지 정석대로 진격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태평천국은 무장 이수성에게 급히 난징으로 돌아오라고 명령을 하달한다. 그리고 난징 주변으로 왕 작위를 부여받은 열세 명의 왕 휘하 13만 병력이 집결한다.

 

 

장강을 통해 보급을 충실히 지원받는 증국전의 군대는 식량이나 화약 어느 하나 뒤질 게 없어서 사기 충만했다. 반면 태평천국은 전술상의 이점도 별로 없고 그들의 전투력도 예전과는 같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화약 공격을 할 경우, 신앙심 투철한 용사가 화약통 둘러메고 기꺼이 자폭 공격에 나섰지만 지금은 병사들에게서 그런 대단한 신앙심이나 신념을 찾아보기 힘들어, 화약통도 목숨을 보전하려고 대충 멀찍이 던져놓고 올 뿐이었다. 시간은 흘러 11월, 병사들의 사기는 추위만큼이나 떨어졌다. 결국 이수성은 군을 퇴각시킨다. 상하이로의 복귀만 염원했던 이수성은 난징 방어에 발이 묶이고 만다.

 

 

 

 

태평천국의 오류

 

태평천국은 난징 주변의 장강을 모두 점거했음에도 장강을 오르내리는 선박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의아하기 짝이 없다. 수군이 소멸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이해한다 손치더라도 강변에 포대를 설치하고 대포를 쏘면서 강을 이용하는 배를 격침시켰다면 역사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장강의 스케일이 엄청나게 거대하므로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비교해 보자면 한강대교의 길이가 1,005미터인데, 난징장강교의 길이는 무려 6,772미터이라니 그 규모에 어안이 막힐 정도이다. 아무튼 청나라 황실의 보물들이 프랑스의 퐁텐블로 궁에 자리잡고 있으니 부끄러운 중국 역사의 한 대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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