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한 오늘
문지안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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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날들은 뜨겁고 찬란하였으나 일상이 무너진 시간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오래도록 절룩거린 뒤 겨우 잡은 안온함은 말 그대로 별것이 아니었다. 봄이 오면 꽃을 구경하고 수업에 들어가고, 기숙사에 돌아가 잠을 자고 아르바이트 비를 받는 날이면 술을 마시고, 그렇게 일학년이 이학년이 되고 삼학년이 되는 일. 흔해빠진 대학생의 일상, 나에게는 몹시 간절했던 풍경들. - '프롤로그' 중에서

 

 

살아있는 이 일상에 행복감을 느낀다

 

책의 저자 문지안은 스물두 살에 다니던 대학에서 퇴학당하고 삶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두해 후 서울대에 입학해 새로운 걸음을 떼려는 순간 암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큰 수술 후 불필요한 세포들과의 이별을 기다리는 동안 갈 곳 없는 토끼와 함께 지내며 안온한 일상의 의미를 알아갔다. 전공 수업에서 마주한 실험동물들이 자신의 토끼와 같은 모습임을 보아버린 뒤, 사는 일이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들로 여러 차례 멈춰 선 후, 말하지 않는 존재들과 함께하는 안온한 일상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현재는 가구 공방 애프터문을 운영하며, 여섯 마리의 개다섯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암에 걸린 환부를 도려내는 절제술을 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암치료에 돌입하지만, 그녀는 항암 치료를 거절하고 학교로 복귀했다. 잘 걷지 못해서 강의실을 이동할 때마다 걷다 쉬다를 반복할 정도였다. 이 때 새삼 깨달은 사실이 몸 아픈 이들의 불편이었던 것이다. 암에는 완치라는 개념이 없다. 5년 동안 동원의 암세포가 자라나지 않으면 종결된 것으로 간주하므로 그녀는 몇 개월마다 검사를 받는데, 다행스럽게도 재발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술전공자이면서 한 때 로커였고 오랫동안 디자이너였던 남자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이 남자는 가구 공방의 경영에는 관심이 1도 없이 그저 단순한 작업자로 남기를 바란다. 그런데, 따뜻한 마음씨를 소유한 탓에 집 없이 불쌍하게 길거리를 방황하는 개나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주거나 집을 지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보살펴 주는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개와 고양이들이 이들의 공방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는 인연이 있고

모든 인연의 끝에는 헤어짐이 있다.

끝이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는 동안 더 만많은 존재와

좋게 닿았다가 헤어질 수 있겠지.

 

닿아있는 시간이 따사롭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아침에 인사하고 저녁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세상에는 왜 키우는 사람, 버리는 사람, 거두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일까.

털이 빠져서, 늙어서, 품종이 안 좋아서, 짖어서, 말을 안들어서 등등의 이유가

어떤 이들에게는 함께 살던 존재를 내칠 이유가 되는 것일까.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귀찮다는 이유로 존재를 버리는 일이 당연하다면

늙은 날의 우리들은 어떠할까, 오늘의 우리들은 어떠할까.

 

 

 

"행복이라는 가치는 찰나의 반짝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비어져 나오는 감정을

홀로 안고 잠드는 밤,

떠나간 존재의 빈자리를

손으로 쓸어보는 새벽,

존재를 보내었으나

보내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겨울,

삶이 몇 도쯤 서늘해졌음을 깨닫는 봄,

긴 시간을 관통하는

개인의 통증들.

 

괜찮지 않다거나

괜찮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저

서늘함을 내포한 평정 상태에

천천히, 아프게 적응해 갈 뿐이다.

 

 

절박한 순간에 필요한 것은

가능성 있는 수많은 이들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흔쾌하면

세상이 나에게 흔쾌한 것 같은 마음이 된다.

거절당하지 않은 절실함은

내리막으로 치닫는 기울기를 변화시키는

변곡점이 되어 준다.

 

 

 

내 손으로 옷을 입고 벗고

타인의 도움 없이 용변을 해결하고

생각하는 바를 목소리로 전달할 수 있으며

고양이의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개의 등을 쓰다듬는 촉감을 느낄 수 있고

봄 하늘의 푸르름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오늘.

 

건강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무탈한 오늘,

당연한 시간으로 여겨지지만

어떤 이에게는 처음부터 당연하지 않았으며

결국 모두에게 당연하지 않아질 지점.

훗날 돌아보면

전성기였다고 기억할지도 모를

 

무탈한 오늘.

 

 

"일상이 곧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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