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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아픈 사랑에 답하다 - 사랑에 아파하는 영혼들을 위한 심리 정화 솔루션
이규환 지음 / 왕의서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저자 이규환은 정신분석 전문의로, 10년도 넘게 마음이 아픈 사람, 마음에 상처를 입어 슬픈 사람, 외로움과 고독에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자 먼저 터득한 지혜나 지식을 나누는 데 힘쓰고 있다. 1996년, 한국 최초의 인터넷 상담 공간 '한마음 정신건강 상담실'과 2000년 10월, 16명의 의사와 함께 '마음클럽'이라는 상담카페를 열어 심리 치유 상담을 했다.
그는 가톨릭대학교 의대대학을 졸업, 대전 성모병원과 강남 성모병원에서 정신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경기도 평택에서 '이규환 신경정신과의원'을 운영하는 원장이다. 강연 및 출강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는 마음 건강 전도사로 자리 잡았으며, 저서로는 <의사들이 가르쳐주지 않는 마음건강 X파일>, <스토킹의 심리학> 등이 있다.
우리들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의 이별에 아파하지만, 또 다시 사랑에 빠지는 반복 행위를 한다. 이에 저자는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의 관점에서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고통과 혼란에 빠지는 이유를 설명하고, 이 아픔을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다. 책은 총 2부(처음부터 '사랑하는 너'란 없다, 심리학이 섹스를 말하다)로 구성되었는데, 심리학적으로 풀어본 사랑과 이별, 섹스, 결혼에 대한 처방전을 만날 수 있다.
사랑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물에 빠지다. 웅덩이에 빠지다 등등, '빠지다'라는 용어의 어감은 부정적이고 두려운 것을 대상으로 사용한다. 한번 생각에 보자. 같은 물 속인데, 물에서 물장구치며 재미있게 놀았다면 어떻게 표현할까? '물속에 빠지다'라기보다는 대신에 '물속에서 놀았다'라고 대체로 말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들은 사랑에 '빠졌다'라고 말할까? 이는 막연히 두려워하고, 허우적대며 방황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 아닐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왜 사랑하려고 하지?' 당연히 이에 대한 답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아마도 가장 많은 답은 '외로워서'일 것이다. 홀로 산다는 게 너무 외로워서 둘이 만나 사랑을 하면 외롭지 않기 때문이란다. 정말 과연 그럴까? 사랑을 하면 외로움이 졸지에 사라지는 걸까? 저자의 답은 나와 마찬가지다. 결단코 '네버never'이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보자. 계속 가다 보면 도달하는 곳은 어머니의 자궁 속일 것이다. 모든 인간의 생명 씨앗은 이곳에 자리잡기 때문이다. 정말 포근하고 안전한 곳이다. 체온과 비슷하게 따뜻한 물속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이곳은 가히 에덴동산이요, 낙원이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이곳과 생이별을 해야 한다. 필연적이다. 도저히 피할 수 없다. 바로 탄생이다. 지금껏 지내오던 환경과의 이별 때문에 커다란 상실감을 맛보게 된다.
이때의 상실감을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모체 상실에 따른 근원적 상실감'이라 했다. 출생의 충격에 따른 상실감의 기억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고스란히 저장된다. 이는 의식 저 너머에 있는 모든 상실감과 외로움의 원형으로 말이다. 이 상실감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감정을 소통시키고 싶어 하는 기본 동력이 된다. 이를테면 이 근원적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과 사랑을 찾아 방황한다는 뜻이다.
신화에 따르면, 태초의 인간은 다리가 넷, 팔도 넷인 거인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신을 능가할 만큼 강햇고 그래서 교만했다. 이에 신들은 이런 인간들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몸을 반쪽으로 갈라놓는 것이다. 기원전 이스라엘 왕국의 솔로몬 대왕이 서로 자신의 아기라고 우기는 두 여인을 향해 내린 판결이 '아이를 둘로 갈라서 공평하게 나눠주라'고 말한 것처럼. 이후 인간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사랑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여야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을 하면 두 사람이 완전한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외로움과 고독의 반대어로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왜 우리들은 사랑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가 아니고 외롭고 고독할까? 왜냐하면 외로움이라는 그릇의 뚜껑이 결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 외로움을 덮을 수 없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상실감을 메워주었는지 몰라도 사랑의 열정과 희열이 식으면 또 다시 그 빈 곳의 허전함이 드러나는 법이다.
이를 우리는 종종 사랑의 탓으로 돌린다. 우리 사랑의 방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너와 나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잘못이 아니다. 상대를 잘못 고른 것도 아니며 사랑의 방식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자. 사랑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랑도 우리의 근본적인 외로움은 채워 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은 제 자리를 찾게 된다.
사랑을 소유한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두려운 적은 뭘까? 서로를 소유하려는 마음이다. 사실상 이런 소유욕은 사랑하는 연인들 간에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잘못이기도 하다. 연인과의 교제를 떠올려보라.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부모님 아래서 성장했는지 등등 궁금해지는 게 점점 많아진다. 물론 이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순수한 마음의 발로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상대를 소유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결말은 달라진다. 그것도 완전히.
소유란 어떤 개념인가? 물질이나 대상을 전적으로 자신에게만 속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유해야 하는 것도 분명 있다. 예를 들어, 음식을 소유해야만 굶지 않고 먹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사랑이 음식처럼 소유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은 물질이 결코 아니다. 추상적인 감정일 뿐이다.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단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행동들' 뿐이다.
사랑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사람들은 싱대를 아니 사랑을 소유하려 든다. 정확하게는 '사랑의 행동들'을 소유하려고 한다. 행동을 독점하려는 소유욕은 점점 자라서 상대의 의식조차도 소유하고 싶어한다. 상대의 말랑말랑한 뇌 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 무슨 기억이 담겨 있는지 모두 알아야만 마음이 놓인다. 심지어 이미 사라져 버린 지나간 과거의 일조차도 그들의 소유욕의 대상이 된다. 오늘은 누구와 만나 무엇을 했는지, 왜 나 대신 친구와 영화를 보았는지, 어제는 왜 밤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갔는지 마치 형사가 범인을 취조하듯이 귀찮게 한다. 이리 되면 우리들은 외치고 싶어진다.
"내가 니끼가(너의 것이냐)?"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연인을 만나 핑크빛으로 물든 사랑을 할 때, 대체로 우리들은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안다고 가정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본 모습인 실재實在 그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그와의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다 잘 알고 이해하려면 우리 자신이 가정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한다. 가정하지 말고 단지 그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들어야 하며, 그에 대해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더라도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그에 대해 생각하고 가정하는 것을 줄일수록 그의 본 모습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정복과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먹었다', '따 먹었다'는 말은 성행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성행위와 '먹는다는 행위'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바이블에서 금기시하는 7대 죄악은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색욕인데, '창세기'편에 등장하는 뱀은 이브의 성적 욕구를 상징하며 성숙한 이브가 아담을 유혹해 성행위를 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심리학의 대가 프로이트도 <꿈의 해석>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선악과를 성행위로 해석함으로써 '먹는다'와 '따 먹는다'를 같은 의미로 간주하는 셈이다. 즉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해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고, 아담은 기쁨의 대가로 얻은 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평생 노동을 감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행위를 '먹었다'라고 표현할 때엔 심하게 화를 낼 것이다. 아마도 먹힌 쪽이 자신들이라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외형상 먹히는 쪽은 남성의 거시기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아마존의 한 부족은 성행위를 '거시기 따 먹기'라고 더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 아무튼 '먹었다'란 표현은 성행위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를 정복하고 소유한다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 성욕을 일으키는 상대가 슈퍼 울트라 파워(팔루스)를 지닌 존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랑하는 상대로 인해 부족한 자기 자신이 채워질 수 있고 완성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 남자는 있지도 않은 슈퍼 울트라 파워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성과 사랑의 행위를 통해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며, 여자는 슈퍼 울트라 파워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남자를 통해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성에 관한 한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 체계가 있다.
"배우자와의 성행위가 가장 떳떳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