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 망국의 신하에서 일본 경제의 전설이 되기까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지음, 박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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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다고 생각하면 한순간도 아니고, 길다고 보면 천 년도 더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일생이다. 하지만 짧은지 긴지는 꼭 흐른 세월의 숫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겪은 일들이 많은지 적은지에 따라, 또는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내 생애를 말하자면, 옛날 고향에 있을 때는 쟁기와 소쿠리를 짊어졌고, 장마에는 나비가 밀을 먹어버릴까 걱정했으며, 가뭄에는 묘판에 물이 부족한 것을 원망하며 살았다. 그러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한탄하여, 겁 없게도 국가의 우환을 자신의 우환이라고 여겨 줄곧 살아왔던 초가집을 떠나 서쪽의 수도 [교토]로 갔다. - '머리말' 중에서

 

 

일본 근대화의 공로자

 

책의 저자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막부 말기였던 1840년,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논어>, <대학> 등의 고전을 익혔다.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신하였으나, 막부가 무너지면서 메이지 신정부의 관리가 되어 근대 일본을 세우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요시노부의 신하였던 1867년, 27살의 나이에 파리 만국 박람회를 시찰하며 유럽 자본주의를 체험했다. 자본주의와 기업 경영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귀국 후 메이지 신정부에서 대장성 조세사정, 개정국 국장을 역임하며 일본의 조세, 화폐, 은행, 회계 등을 개혁했다. 1873년 '상업이 부흥해야 나라가 선다'는 신념으로 관직을 내려놓고 철도회사, 가스회사, 전등회사, 방직회사 등 500여 개의 기업을 세웠다. 그중 다수는 지금도 일본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도쿄양육원, 일본 적십자사 등 600여 개의 자선기관을 세우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미국, 중국, 인도 등에서 민간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도덕 경영'을 자신의 경영철학으로 삼고 실천했다. 이는 그의 저서 <논어와 주판>에도 잘 녹아있다. 1926년, 1927년에는 연속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그가 지금도 세계 각국 CEO들의 모델로 꼽히고 있는 이유는 그가 성공한 경영인이기도 했지만, 경영 철학을 만들고 실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시부사와가 현재 특히 주목받고 있는 것은 기업 설립, 운영에 관한 업적도 업적이지만, '도덕 경영'이라고 하는 그의 독특한 경영 철학 때문일 것이다. 특히 <논어>를 경영인의 필독서로 생각한 그는 부를 이루는 근원은 인의 도덕이며, 올바른 도리에 따라 쌓은 부가 아니면 그 부는 영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도덕, 경제 합일설은 국내에도 제법 알려져 있다" - '역주자의 말' 중에서

 

 

 

 

엄한 아버지 밑에 될 성 싶은 인물이 나온다

 

인물을 이해하려면 인물의 가계家系를 살펴봐야 한다. 시부사와의 아버지는 어머니 집안의 데릴사위였는데,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고지식하게 일했던 분이다. 그런 와중에 시詩나 하이카이俳諧(이후 하이쿠로 발전함)를 짓기도 하는 풍류風流 기질도 있었다. 자신에겐 무척 엄햇지만, 남에게는 관대해서 도와주는 일에 정성을 다했으며, 평소 근검勤儉을 실천하며 오직 가업家業을 위해 노력하는 견실한 사람이었다.

 

6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한 시부사와는 이후 14~15세까지 독서, 검술, 습자 등을 배웠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품성 수양이었을 뿐,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농업과 장사에 신경 써야 하므로 가업에 종사할 것"을 지시했다. 주야로 독서 삼매경에 빠져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은 집안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1854년, 즉 그의 나이 15살 때 에도에 나가서 책 상자와 벼루 상자를 사온 적이 있었다. 문구점에서 오동나무가 2개 붙어 있는 책 상자와 오동나무 벼루 상자였는데, 나중에 집에 도착한 이 물건들을 본 그의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었다. 이런 식으로 살면 집안을 무사하게 보전할 수 없으므로 불효자식을 두었다고 탄식했다. 

 

사치에 물든다는 것은 원래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차이가 없는 것이다. 미세한 부분이라도 그 분수에 따라 처음 시작될 때 잘 자제하지 않으면, 마침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경우는 예로부터 얼마든지 그 예가 있다. 지금 이렇게 화려한 벼루 상자와 책 상자를 살 정도라면 다음엔 집도 서재도 맘에 안 든다며, 만사에 사치해서 결국 집안을 견고하게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사전에 엄히게 교육을 했던 것이다.

 

 

 

막부의 신하가 되다

 

알에서 부화한 누에는 네 차례 잠을 자고 먹기를 반복한 끝에, 고치가 된 후 이어서 성체가 된다. 나중엔 결국 알로 돌아간다. 주인공 시부사와도 농민으로 태어나 경작을 주로 하는 신분이었다. 당시는 막부가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폭정暴政 수준이었다. 비록 농민이었지만, 이런 상태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지속될 경우 망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당시의 도쿠가와 정치는 문벌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아무리 능력이나 지식이 뛰어나도 신분의 상승은 더 이상 오를 수 없었다. 이에 시부사와는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나 막부를 전복시키는 일에 가담한다.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려면 역도逆道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히토츠바시가家에 출사出仕했다. 위태로운 시세에 처해 있으면서 자신의 본분이 아니라고 정치에 입을 열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므로, 정말로 마음을 다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데에 분골쇄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더 넓은 세계 유럽으로 견문을 떠나다

1867년, 프랑스 박람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이 박람회는 1855년, 1867년, 1878년, 1889년, 1900년, 1925년, 1931년, 1937년 등 총 8회 열렸다. 이 박람회엔 여러 나라의 제왕들이 참석하므로 일본도 다이쿤大君의 친척을 파견하면 좋겠다고 프랑스 공사가 제안해 왔다. 몇 차례 상의 끝에 민부공자 도쿠가와 아키타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7명의 수행원을 붙이기로 하자, 시부사와는 호기로 판단하고 파견을 부탁했다. 

 

 

 

프랑스 수도 파리에 가서 당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대박람회에 참가하러 왔다는 취지의 국서를 봉정하고 답서를 받아 공식적인 의식을 마쳤다. 시부사와는 공자 신변의 일을 살피거나 혹은 일본에 공적인 문서를 발송할 때에 그것을 집필하거나 했다. 또는 야마다카를 비롯하여 공자 직속의 사람들에게 월급을 지급하거나 공자를 위해 잡화를 매입하거나 하는 일도 했다. 마치 서기와 회계를 겸한 거 같은 직책이었지만 평소에는 매우 한가했기 때문에 그사이에 프랑스어를 공부할 생각을 했다.

 

박람회 공식 행사가 끝난 후에는 공자의 유럽 각국 순회 계획이 사전에 짜여 있었다. 먼저 스위스, 네델란드, 벨기에를 둘러보고, 이어서 이탈리아, 영국, 그리고 상황을 봐서 독일, 러시아도 둘러볼 계획이었다. 8월 초순부터 스위스 순방을 시작해 여러 나라를 거쳐서 11월 초 영국을 방문하고 그달 하순 프랑스 파리로 돌아왔다. 그래서 11월 말부터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학 교사를 고용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이국 땅에서 일본의 정볍政變 소식을 접했다 

 

 

메이지 新정부의 관리로

 

막부 정치의 종말은 시부사와에겐 커다란 행운의 기회였다. 이런 정변은 외국과의 교제가 더욱 중요해질 게 분명했다. 즉 외국에 관한 학문은 점점 필수적인 상황으로 변할 것이다. 속히 귀국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그는 유학을 위해 각종 경비의 절감을 통해 장기 유학을 꿈꾸었지만, 수행하는 공자가 미토가家를 상속받아야 하는 일이 생기자 할 수 없이 귀국해야 할 상황이었다. 

 

모든 게 '그림의 떡'이 된 상황이 되자 그는 메이지 원년(1868년) 12월 3일, 일본으로 귀국했다. 메이지 2년 12월 초순 도쿄에 도착하여 태정관에 나가보니 생각지도 않게 대장성 조세사정租稅司正이라는 직에 임명되었다. 곧바로 대장성에 출두하여 배명의 건을 보고했다. 당시 대장성에는 한 사람의 지인도 없고 또 직무에 대해서도 실제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도대체 상황 파악이 안 되었다. 사직을 결심하고 대장성의 오쿠마 대보大輔와 면담했다. 여기서 유신정부는 시부사와 같은 인재가 꼭 필요하다는 말에 감동을 받고 관리로 일할 결심을 굳혔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실업가를 꿈꾸다

 

시부사와는 오사카 조폐국에 용무가 있어 오쿠마, 이토 등과 동행하여 오사카까지 여행한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서 곰곰이 일본 장래의 경제를 생각해 보니, 결국 정부에서 아무리 마음을 쓰고 힘을 다해 화폐법을 정하고 조세율을 개정하고 회사법 또는 합본 조직을 마련하고 식산흥업의 도움을 준다 해도 지금의 상인으로는 도저히 일본의 상공업을 개량하거나 진보시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상업에 투신하여 미치지 못하더라도 솔선하여, 부진한 상업을 작흥시키고 일본 장래의 상업에 일대 진보를 이루려는 뜻을 세웠다.

 

 

 

 

진정한 부의 창출은 도덕 경영에서 시작된다

 

일본의 근대화와 자본주의에 앞장섰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유럽의 주식회사 제도를 도입해 철도회사, 가스회사, 전등회사, 방직회사 등을 설립했다. 그가 세운 '삿포로맥주', '임페리얼호텔', '도쿄전철' 등은 일본 경제를 지탱하는 큰 기둥으로 존재한다. 많은 후대인들로부터 찬사 받는 이유는 그가 이룬 경제적인 성과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일본에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들어오기도 전, 즉 상업이 무시 받던 시기에 경제의 중요성을 통찰했으며, 동시에 경제 부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도덕'을 꼽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요즈음의 경영자들이 종종 '모럴 헤자드'에 빠져 세인들로부터 비난의 손짓을 받는다. 그래서 시부사와의 도덕 경영이 더욱 깊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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