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 피할 수 없는 내 운명을 사랑하는 법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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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투쟁하고, 다른 사람들과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인생은 우리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엄습하는 운명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이러한 운명과의 싸움입니다. 이러한 싸움에서 우리는 좌절하면서 자신이 부딪힌 운명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운명에 비해 너무나 가혹했고 인생은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한탄할 수도 있습니다. 니체는 사람들에게 '그대의 운명이 평탄하기를 바라지 말고 가혹할 것을 바라라'라고 외치며, 그런 운명과 투쟁하면서 장렬하게 죽을지언정 패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삶에 대하여 니체에게 묻는다 

 

이 책의 저자 박찬국은 서울대학교과 동 대학원에서 철학 전공으로 학, 석사학위를,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롯한 실존철학이 주요 연구 분야다. 2011년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 연구>로 제5회 '청송학술상', 2014년 <니체와 불교>로 제5회 '원효학술상', 2015년 <내재적 목적론>으로 제6회 '운제철학상', 2016년 논문 <유식불교의 삼성설과 하이데거의 실존방식 분석의 비교>로 제6회 '반야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이 책의 초판본인 <초인수업>은 중국어로 번역되어 대만과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출간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그대 자신이 되어라-해체와 창조의 철학자 니체>,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나치였는가>, <현대철학의 거장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니체와 하이데거> 등이 있다.

 

그는 책의 서두에서 작고한 장영희 작가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 번>에 담긴 소설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감상한 글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귀절이 바로 니체 철학의 정수精髓를 담고 있다면서 니체가 생각하는 운명과 우리 자신 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사랑의 투쟁'이라는 말로 묘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사랑의 투쟁이란 사람들이 서로 투쟁함으로써 서로를 고양시키고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품게 되는 관계를 말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은 가혹한 운명을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사랑할 수도 있게 된다. 이때 비로소 우리들은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자신의 운명에게 한 것처럼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아, 나의 형제여, 나는 이제껏 너보다 아름답고, 강인하고, 고귀한 상대를 본 적이 없다. 자, 나를 죽여도 좋다. 누가 누구를 죽이든 이제 나는 상관없다"

 

 

 

 

니체에게 묻고 싶은 10가지 질문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왜 하나도 없을까?'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걸까?"

"신념은 꼭 필요한 걸까?"

"왜 인생이 자꾸만 허무하게 느껴질까?"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저자는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은 고통과 험난한 운명을 자신의 고양과 강화를 위해 오히려 요청하는 패기에 찬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바로 니체가 말한 '초인초인의 정신'이다. 니체는 "초인이란 고난을 견디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고나에게 얼마든지 다시 찾아올 것을 촉구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사람 간의 관계가 점점 각박해지는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해 니체를 통해 해답을 찾는 여정을 떠나보자.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안락하면서도 오래 지속되는 생존을 추구함과 동시에 가능한 한 많은 감각적 쾌락을 좇는 존재라고 보았다. 반면에, 니체는 인간은 짧게 그리고 험난하게 살더라도 자신의 힘,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력이 고양되었음을 느끼고 싶어 하는 존재라고 본다. 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장수와 안락한 삶이 아니라 힘의 고양과 증대라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을 말한다"

 

이는 플라톤의 행복 5가지 조건과 닮아 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기에 조금은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이들이 칭찬하기엔 약간 부족한 외모. 셋째, 자신의 생각보다 절반 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넷째, 남과 겨루엇을 때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할 때 청중의 절반 정도만 박수를 보내는 말솜씨. 그렇다. 이 조건들의 공통점은 바로 '부족함'이다. 행복은 부족함에서 오듯이,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 또한 안락한 삶이 아니다.

 

 

놀이에 빠진 아이처럼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니체는 '인간의 정신은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그리고 사자의 정신에서 아이의 정신으로 발전해가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죽을 때가지 낙타나 사자의 정신 단계에 머무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가 말한 인간 정신 발달의 3단계는 이상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낙타는 황량한 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아무런 불만도 없이 뚜벅뚜벅 나아가는 동물로, 인내와 순종의 대명사인 셈이다.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정신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절대 진리로 수용하고, 무조건 복종하는 정신을 뜻한다. 어릴 적의 우리들은 집이나 유치원 학교에서 이런 사회적 가치와 규범을 주입받는 교육을 받는다. 군말 없이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에 순종했다.

 

성장하면서 어느날 갑자기 삶의 허무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우리들은 낙타에서 사자로 돌변한다. 지금까지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 한 번도 않다가 갑자기 삶이 허망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런 허망함이 확대되면 '살아서 뭐 하나, 어차피 죽으면 끝나는 인생인데'라는 생각이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게 된다. 마침내 회색빛 인생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래서 무의미한 공부를 강요하는 학교와 사회에 분노를 쏟아낸다.

 

니체는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라고 얘기한다.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니체를 이를 '허무주의(니힐리즘)'라고 명명했다. 인간이라면 견딜 수 없는 가장 큰 고통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니체는 니힐리즘에 빠지는 게 우라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는 견해이다.

 

니힐리즘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회복한 정신의 단계를 '아이의 정신'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들이 재미있는 놀이에 빠지면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냥 이 놀이가 재미있어서 놀 뿐이다. 놀이의 재미가 사라질 때 비로소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고 계속 놀이를 할지의 여부를 고민한다.

 

우리들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다.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이다. 그때 우리는 삶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면서 '왜 이 짐을 짊어져야 하지?'라고 묻게 되는 것이다.

 

 

부족함이라는 가혹한 시련은 자신을 단련시킨다

 

니체는 책이 거의 팔리지 않을 정도로 전혀 유명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인생에 만족했고 그것을 긍정했다. 그는 설령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삶을 낭비하지 않고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자신이 처한 운명적 상황을 자기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니체는 심지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야말로 자신의 발전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경여의 신으로 추앙받는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바로 니체의 운명 철학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의 파산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다. 그는 직원 누군가가 자신의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대해 '나는 하늘의 세 가지 은혜를 입고 태어난 덕분'이라고 대답했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 부지런히 일하는 습관을 익혔다

허약하게 태어난 것~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부지런히 몸을 단련했다

못 배운 것~ 배우려고 한 덕분에 많은 지식과 지혜를 쌓을 수 있었다

 

 

왜 경쟁을 부정적으로 보는가?

 

호메로스<일리아드>에서는 아킬레스가 자신의 동료를 죽였던 헥토르를 전차에 매달고 질주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슬인들은 이렇게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승부욕에 불타는 사람들이었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원래 야만적인 힘에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승부욕을 건설적인 경쟁심으로 승화시켜 고대 올림픽을 창시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협동과 협조는 긍정적으로 보는 반면 경쟁은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니체는 경쟁이 없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경쟁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자신을 뛰어난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스포츠에서 동일 포지션의 선수들에게 무한 경쟁을 도입하고 있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니체는 왜 신을 죽였나?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신을 죽인 자는 바로 우리다! 살하재들 중의 살해자인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위로할 것인가?"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야말로 니체가 남긴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니체의 이 말은 매우 역설적이다. 신이 인간과 달리 신일 수 있는 이유는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이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것은 근대에 들어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서양의 중세인들은 자신들에게 부딪힌 모든 문제들을 신에 의지하고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면서 스스로 힘으로 이를 해결하려 한다. 인간들이 겪는 고통은 보통 자연 또는 사회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폭우나 가뭄처럼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해, 전쟁이나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처럼 말이다.

 

근대인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써 자연에서 비롯되는 재해를, 사회구조의 개혁으로써 잘못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극복하려 했다. 이렇게 자신들에게 부딪힌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 했던 인간들의 노력은 많은 부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인간들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는 신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힘을 더욱 믿게 되었다.

 

 

연민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이젠 너무 들어서 듣는 것조차 짜증스러운 얘기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지금 현재에도 누군가에 의해 자살이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들의 주위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자살은 패배의 형태를 보인다. 인생의 고달픔에 좌절해서 '이렇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에 현실에서 죽음으로 도피하는 행동이다.

 

이런 자살은 용기가 아니라 나약함과 비겁함의 표현 아닐까? 삶의 고단함에 지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연민이다. 하지만 니체는 연민을 비판했다. 니체가 연민을 비판한 것은 그가 몰인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연민은 인간을 성장시키기보다는 연약하게 만들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불쌍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고, 불쌍한 사람으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약하고 무력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연민을 받는 사람이 느끼고 있는 무력감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연민을 아무런 거부감없이 수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은 당연히 누구나 좌절할 수밖에 없고 그래도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를 수용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에 노예가 되지 말라

 

이는 주체성에 관한 얘기다. 한국 사회는 특히 젊은 세대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길들이려고 한다. 즉 유치원 때부터 선행학습이나 영어 조기교육을 강요한다. 아이 때부터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공부라는 게 선한 효과도 분명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길들이는 과정에서 왜곡 내지는 병적인 현상이 많이 발생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삶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염증을 느끼거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나 긍지를 갖지 못하면서, 자신에게 무한한 지원과 응원을 보내는 부모님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강조한다. 우리들은 자신의 성격과 적성 그리고 환경 들을 고려해 이를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남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에 합당한 시선에 맞추려는 노예가 되어선 안 된다. 즉 타인을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항상 남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을 쓰고 남이 무시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니체는 이렇게 남의 평가에 민감한 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노예근성 때문이라고 본다. 고대 노예제 사회를 생각해보라. 노예는 결코 자신을 평가할 수 없다. 오직 주인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의 시선과 평가에 연연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노예의 지위로 하락시키고 있는 셈이다.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라

 

니체의 시각에 따르면, 오늘날의 사회는 거대화되고 있는 반면, 이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개개인들은 갈수록 점점 더 왜소화되고 있다. 말하자면 현대인들은 사회가 굴러가는 데 필요한 부품이 되는 대가로 안락한 삶과 향락을 즐길 수 있는 물자를 제공받는 셈이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소심한 사람이 되어 간다. 온갖 질병에 계속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사랑했던 니체, 그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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