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줄다리기 - 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신지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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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표현들 사이의 줄다라기 경기를 잘 들여야보면 우리 사회가 보인다. 언어의 줄다라기 경기를 관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 표현들 사이의 줄다리기 경기를 통해 우리는 현재 우리 사회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 우리도 모르게 빠져 있는 함정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언어 감수성은 높아질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언어 감수성을 높여라

 

언어 감수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언어 표현에 대한 우리의 민감도가 높아진다는 뜻이다. 언어 감수성이 높아지면 그 이전까지는 거슬리지 않던 많은 표현들이 자꾸 거슬리게 되면서 마음이 쓰이게 된다. 마음에 걸리는 표현들이 많아지고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에 주목하며 자기 말에 담긴 표현을 점검하려는 태도가 우리들에게 생긴다.

 

책의 저자 신지영은 언어의 세계를 탐험하며 발견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언어 탐험가다. 그녀는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언어의 세계를 탐험하는 즐거움을 가르치고 있다. 언어의 탐험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 하는 인문학자로,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꾸 키워 물려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저서로는 <말소리의 이해>, <한국어의 말소리>, <THE SOUNDS OF KOREAN>, <쉽게 읽는 한국어학의 이해>, <(조카 현진이와 떠나는 신지영 교수의) 한국어 문법 여행>, <열려라, 말>, <한국어 발음 교육의 이론과 실제>, <말소리 장애> 등이 있다.

 

저자가 만든 10개의 경기장은 팽팽한 '언어의 줄다리기'가 펼쳐지는 곳이다. 봉건적이고 반민주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각하라는 단어가 민주화운동의 파고에 밀려 사라졌듯이 언어는 언어사용자들 간의 치열한 격돌을 통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들 속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 작동원리의 설명과 함께 다양한  줄다리기 경쟁은 이어진다.

 

 

 

 

각하라는 호칭은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것

 

1948년 7월 17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규정함으로써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는 임금과 신하가 있고, 주인과 노비가 있고,양반과 상민을 구분하는 신분제도에 기반한 나라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주인인 평등한 나라임을 만천하에 알려주는 셈이다.

 

선거를 통해 나라의 대표자인 대통령을 선출한다. 대통령은 정해진 임기 동안 국민들이 자신에게 위탁한 권한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나라를 운영한다. 임기가 끝나면 대표자의 자격이 없어지고 대통령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대통령을 '각하'라고 부르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각하가 가진 이데올로기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각하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신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분제를 전제하는 이 표현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부인하는, 반민주공화국적 표현이 되는 것이다. 각하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제한다.

 

1. 이 말이 사용되는 공간은 신분제에 기반한 사회다

2.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이 말을 듣는 사람보다 신분이 낮다

3. 이 말을 듣는 사람의 지위는 고위 관료다

4. 이 말을 듣는 고위 관료는 누군가에 의해 임명되었다

5. 신분이 더 높은 사람에게 합하, 저하, 전하, 폐하라는 경칭을 사용해야 한다

6. 각하로 불릴 수 있도록 이 사람을 임명한 왕이나 황제가 존재한다

 

 

대통령이란 이름은 민주주의 정신에 배치된다

 

주권자인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대통령이라 호칭하다 보니 대통령을 손윗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어, 스스로 그 아래에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민들이 대통령의 관리와 통제를 받는 일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기여한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이란 단어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민주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멀다.    

 

봉건군주제에서의 왕은 통치자였고, 백성은 통치의 대상이었다. 왕은 백성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대상으로 여기는 게 자연스러웠고, 백성은 왕의 다스림과 거느림을 당하는 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민주공화국의 국민은  더 이상 통치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즉 대통령이란 임기 동안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국정을 운영하는 국민의 대표자일 뿐이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이 선출한 국민의 대표자를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다.

 

 

장애는 정상이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정상인을 '상태가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정의를 기반으로 장애인을 정의하면 '상태가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있는,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이 된다. 물론 장애인을 의도적으로 이렇게 정의하려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을 정상인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은 장애를 갖지 않은 것이 '정상'이라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장애인의 상대적인 표현을 정상인이라고 함으로써 '장애는 정상이 아니다'라는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아가 자신은 정상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즉 장애인이 아닌 사람을 정상인이라고 칭하는 것은, 장애를 가진 것은 정상이 아닌데 자신은 장애를 갖지 않아서 정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이 된다. 만약에 화자話者가 장애인이라면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을 정상인이라고 칭해야 할까? 이는 더욱 문제가 된다.

 

 

미혼과 기혼에 담긴 두 가지 이데올로기

 

기혼과 미혼이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살펴보자. 이는 세상 사람들을 두 가지 범주로 나누는 것이다. 즉 결혼을 이미 한 사람과 아직 하지 않은 사람으로 말이다. 이는 결혼 경험 여부에 따라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분류법에 따르면 기혼도 미혼도 아닌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되고 만다.

 

첫째, 결혼을 한 사람은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즉 이혼은 없다.

둘째, 미혼자는 언젠가는 꼭 결혼을 해야 한다.

 

따라서, 두 범주만을 설정함으로써 결혼을 이미 한 사람은 기혼으로 불리며 반드시 그 결혼을 유지해야 한다는 무언의 강력한 메세지를 받게 된다. 또 미혼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기혼의 상태로 곡 변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받는 셈이다. 이렇게 기혼과 미혼의 표현 뒤에는 결혼에 대한 관습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고, 결혼에 대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우리에게 제공하게 된다.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 하나?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아내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부른다. 이를 해석하면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 된다. 이는 백년해로하려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 외롭고 슬픈 처지에 놓인 여인에게 '왜 아직 죽지 못해 살고 있느냐?'고 염장질을 하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말이 오히려 '과부'나 '홀어미'보다 고급스러운 단어라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단어의 유래는 <춘추좌씨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편을 잃은 아내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표현은 다분히 중국의 순장 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남편이 죽으면 당연히 따라 죽었어야 하는데, 아직 따라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죄인이라는 뜻에서 남편을 잃은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미망인이라고 표현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미망인이라는 표현은,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응당 따라 죽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앞으로는 이런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 어른은 은어, 신어, 유행어에 불편하다

 

우리들은 욕설이나 비속어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이는 듣기 삻은 말을 듣는데서 오는 불편함이다. 반면에 은어, 신어, 유행어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자기 자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들은 데서 오는 불편함이다. 그리고 은어, 신어, 유행어에서 느끼는 요즘 어른들의 불편함은 사실 언어 권력을 침해당한 데서 오는 언짢음이 도사리고 있다.

 

어떤 언어의 사용자가 되려면 누구나 그 언어를 배워야만 한다. 말하자면 가르쳐주는 대로 따라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태어난 후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언어를 배운다. 즉 언어란 어른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언어의 권력자는 가르치는 사람인 어른인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나 젊은 계층에서 사용하는 신종어, 은어, 유행어는 이를 새롭게 배워야만 하는 어른들에겐 언짢은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통을 위해 기꺼이 스마트폰에서 생소한 이 말의 뜻을 찾아보고 익힌다.  

 

 

관 주도 언어 정책에 반기를 들다


언어의 주인은 당연히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언어 규범이란 게 있다. 이는 언어 사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규범은 사용하는 '민民'이 만들고 '관官'은 정리하는 것이다. 즉 민이 사용하는 언어를 제대로 관찰하여 규범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즐겨먹는 짜장면을 모두 그렇게 부름에도 불구하고 관이 주도한 규범에는 '자장면'으로 되어 있다.

 

짜장면의 등장은 임오군란 때 들어왔던 청나라 군인들이 인천 쪽에 화교 공동체를 이루며 살게 되면서 이들이 먹던 '작장면'이 한국화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널리 퍼져 1960년대부터 인기 메뉴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외래어표기법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된소리를 쓰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이에 맞추어 표기한 것이 바로 '자장면'이다.  


2009년 5월, SBS는 <짜장면의 진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짜장면의 이름을 돌려받고자 했다. 이후 한 네티즌은 "정부는 지금 당장 짜장면을 돌려달라!"라는 글을 올리기까지 했다. 결국 2011년 8월 31일에 복수표준어로 인정되었다. 짜장면을 통한 저항은 언어의 주인은 언어 사용자라는 점과, 언어 규범을 만드는 주인공 또한 언어 사용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언어 정책에 대한 항거였다. 또한 관 주도적인 언어 정책에서 민 주도적인 언어 정책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외침이었다.

 

 

언어 감수성을 가져라

 

언어 감수성을 통해 '성찰적 말하기'와 '배려의 듣기'가 가능해지므로 화자와 청자 간의 거리를 좁히게 된다. 성찰적 말하기란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의 감수성을 가지는 것을, 배려의 듣기란 들을 때 말하는 사람의 감수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 표현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원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동의하는 표현을 습관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에 저자는 성숙한 소통을 위해서 언어 감수성을 가질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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