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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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 늘어갈수록 내 자유가 공동체의 자유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개인적인 삶의 의미가 우주의 넓이로 확장되는 것이 바로 완성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도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추상하는 능력으로 힘을 발휘하며 사는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일을 동양의 선현들은 천인합일天人合一 등의 어법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기보다는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한다. - '개정판 서문' 중에서

 

 

철학을 통해 세상은 진화한다

 

이 책의 저자 최진석은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중국 흑룡강대학교를 거쳐 북경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삶의 지혜와 인문학적 통찰을 담은 강연 및 저술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문·과학·예술 분야 국내 최고 석학들이 모인 인재육성기관 '건명원建明苑'의 초대 원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나는 누구인가>(공저),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등이 있고, <노자의소>(공역), <중국사상 명강의>, <장자철학>, <노장신론> 등의 책을 해설하고 우리말로 옮겼다. 이 책 <탁월한 사유의 시선>은 2015년 건명원(建明苑)에서 진행한 다섯 차례의 철학 강의를 묶은 것이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시대의 병病은 뜻있는 개인으로서의 내가 발견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에서 공적公敵이다. 게다가 새롭고 위대한 것들은 다 시대의 병을 고치려고 덤빈 사람들의 손에서 나왔다. 이렇게 해서 세상은 진화한다. 이것은 또 나의 진화이기도 하다. 내가 시장 좌판에 진열된 생선이 아니라 요동치는 물길을 헤치는 물고기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표현된다. 나는 눈뜨고 이렇게 펄떡거릴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하고 고치려고 덤빈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강强했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약弱했다고 지적하면서 그렇다고 약하면서 강한 척하거나, 약한 부분을 애써 외면하다가는 한번이라도 제대로 살다 가기 힘들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철학하는 삶을 영위해야 할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부정否定~ 버리다

 

철학은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매우 효율이 높은 장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동안 철학을 추상적인 체계로서의 이론으로만 간주해왔다. 이는 우리 스스로 철학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수입하였기 때문이다. 철학이 생산되는 순간은 그 속에 피 냄새, 땀 냄새, 아귀다툼의 찢어지는 음성들, 바람 소리, 대포 소리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처럼 철학의 생산 과정에는 역사에 대한 치열한 책임성과 헌신이 녹아 있다. 그동안 우리들이 배우는 플라톤, 데카르트, 칼 마르크스, 니체, 공자, 노자, 정약용 등이 다 그러했다. 철학 수입자들은 창백한 이론을 진실이라고 하지, 울퉁불퉁한 역사와 육체를 진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들은 사유를 사유하려 들지 세계를 사유하려 들지 않는다. 이와 달리 철학 생산자들은 직접 세계를 사유한다. 사유를 사유하지 않는다.

 

철학을 수입한다는 말은 곧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은 수입한 그 생각의 노선을 따라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은 생각의 종속은 가치관뿐 아니라 산업까지도 포함해 삶 전체의 종속을 야기한다. 생각을 수입하는 사람들은 생각의 수출하는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물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어려워하게 된다.

 

"철학은 결국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 또는 사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이론적인 내용의 습득보다는 사유의 활동 혹은 사유의 높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철학을 하는 목적은 철학적인 단편 지식을 축적하는 게 아니라 직접 철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의를 발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머리로는 알면서도 이를 일상의 범위를 벗어난 아주 생소한 활동으로 치부해버린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제 후퇴냐 아니면 한 단계 더 높은 발전을 향한 도전이냐 하는 기로 말이다.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시선으로 새롭게 무장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부와 명성의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키기란 매우 어렵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사회, 정치적인 문제까지도 마찬가지다. 지금과는 전혀 다르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그 시선이 인문적 시선이고 철학적 시선이고 문화적 시선이며 예술적 시선이다. 이 높이에서는 기능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 도전할 수 있다.

창의적인 결과들이 나오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를 살펴보면, 나오는 나라는 끊임없이 창의적으로 발전해가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는 계속 그런 결과물을 내지 못한다. 창의성과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는 단계에선 이미 나와 있는 것만 습득해 따라한다. 하지만 철학적인 높이로 상승한 단계의 사람들은 어떠할까? 바로 전면적인 부정否定을 이야기한다. 전면적인 부정이 새로운 생성을 기약한다. 새로운 생성은 전략적인 높이에서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여는 일이다.

 

 

선도先導~ 이끌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무리 철학적 지식이 많아도 '철학'을 하지 못한다면 이는 무용지물이다.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주체적으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높이에서 자신의 삶을 끌고 가지 못한다면 이는 철학을 하는 게 아니다. 즉 반복해 말하자면 철학이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적 지식,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동사처럼 작동할 때만 철학이다.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철학적인 높이에서 작동시키는 것이 철학이다.

 

어떤 나라가 문화적일까? 이는 바로 장르를 만들 수 있는 지의 여부로 판가름난다. 장르를 만드는 나라는 문화적 차원에서 움직이고, 장르를 만들지 못하고 수입하는 나라는 아직 문화적이지 않다. 장르를 만들면 그 장르가 새로운 산업이 되어서 경제적인 성취를 이루고, 경제적인 성취가 힘을 형성하여 그 힘으로 앞서나간다. 장르-선도력-선진은 이렇게 연결된다. 장르를 개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꿈'이다.

 

독립적 주체들은 대답하는 일에 빠지지 않고 질문을 시작한다. 질문은 '우리'로부터 이탈한 독립적 주체들만이 할 수 있다. 대답에서는 지식이나 이론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뱉어내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질문은 이와 다르다. 질문이 일어나려면 우선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해야만 한다. 이런 궁금증과 호기심은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다. 인간은 결국 질문할 때에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고유한 존재가 자신의 욕망을 발휘하는 형태가 바로 질문이다. 그래서 질문은 미래적이고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대답은 우리를 과거에 갇히게 하고, 질문은 미래로 열리게 한다. 

철학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항상 시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해서 고도의 추상적인 이론으로 구조화한 체계다. 하나의 철학이 생산될 때에는 구체적인 현실과 추상적인 이론이 함께 붙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수입될 때는 시대적 맥락은 사라지고 추상적인 이론으로만 들어온다. 그래서 결국엔 철학자가 되지도 못하고 전도사가 되어버린다. 공자, 노자, 헤겔, 칸트 등 전도사 말이다.

반역자는 기존의 것으로 확고히 굳어 있는 것에 대한 답답함으로 인해 이와 과감하게 결별하고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반역은 기존의 것에 저항하는 것, 이미 있는 것보다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더 궁금해하는 일이다. 아직 오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려는 도전, 이것이 반역의 삶이다. 모든 창의적 결과들은 다 반역의 결과다.

독립獨立~ 홀로서기

 

탁월한 인간은 항상 '다음'이나 '너머'를 꿈꾼다. 우리가 '독립'을 강조하는 이유도 '독립'으로만 '다음'이나 '너머'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이나 '너머'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이 힘들어서 편안함을 선택하면, 절대로 '다음'이나 '너머'를 경험할 수 없다. 이때 불안을 감당하면서 무엇인가를 감행하는 것이 '용기'다. 탁월한 높이의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불안을 감당한다.

진인眞人~ 참된 나를 찾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창의성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이다. 인격이라는 토양에서 튀어나온다. 삶의 깊이와 인격적 성숙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다. 인격의 문제를 매우 길게 제기한 사상가는 바로 장자다. 그는 <장자>의 '대종사大宗師'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

 

장자는 기존의 자기를 살해하고 새로 태어난 자기를 오오라고 했다. 즉 가치관으로 결탁된 자기를 살해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드러날 수 없다. 자기살해를 거친 다음에야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등장한다. 참된 인간을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무아無我'도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자기로 등장하는 절차다. 자기살해 이후 등장한 새로운 '나', 이런 참된 자아를 독립적 주체라 한다. 

우리는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지知에 매몰되어 한편을 지키는 일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해와 달을 동시적 사건으로 장악하는 명明의 활동성을 동력으로 삼아 차라리 황무지로 달려가야 한다. 이미 있는 것에 편입되어 안정되기보다는 아직 이름도 붙지 않은 모호한 곳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야 한다. 스스로 불안을 자초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자신의 평생 사명을 "나의 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겠다"였다고 한다. 나라까지는 못할지라도 나 자신만이라도 새롭게 하자.

절대적 보편 진리는 없다

 

생각의 결과를 배우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철학이다. 정해진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일 수 없다. 자기만의 진리를 구성해보려는 능동적 활동성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다.  이 나라를 걱정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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