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톨로지 (스페셜 에디션, 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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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경제를 부르짖던 '산업화세대의 정부'가 몰락하자 그 대안으로 새롭게 등장한 단어가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아, 참으로 황당하다! 낡은 산업화세대가 사라진 후, 새롭게 등장한 캐치프레이즈도 지극히 '산업화시대적'이기 때문이다. 4차가 아니라 10차, 100차의 단계에 이른다하더라도 산업혁명의 개념으로는 결코 오늘날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산업혁명'이 아니다. '지식혁명'이고 '인식혁명'이다! - '개정판을 내며' 중에서

 

 

창조는 나만의 독창적인 편집이다

 

책의 저자 김정운은 문화심리학자로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전임강사 및 명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일본 교토사가예술대학 단기대학부에서 일본화를 전공하고 2015년 수료했다.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와 터를 잡은 곳은 전라남도 여수. 창밖으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가끔 작은 배를 몰고 나가 고기를 잡는다.

 

수많은 책으로 빼곡한 서재에서 글을 쓰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는 현재 조선일보에 '김정운의 여수만만', 채널예스에 '김정운의 인터벨룸' 등을 연재 중이다. 그의 저서로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노는 만큼 성공한다> 등이 있다.

 

"창조란 유에서 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서 탄생한다"고 말하는 그는 이 책에서 '낯설게 보기'를 통해 독창적인 관점을 갖는 법, 암기형 공부가 아닌 주체적 공부로 나만의 이론과 철학을 만들어내는 법 등 실제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에디톨로지 방법들을 소개한다. 아울러 실용적인 독서법과 차별화된 글쓰기 방법 등의 핵심 노하우를 전수한다.

 

 

 

 

창조의 본질

 

창조는 편집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모든 과정을 '편집'이라고 정의한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서 밝혀지듯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느라 실험 동영상에 나타난 고릴라를 보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즉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해석이 된다. 

 

여기에서 편집의 방법론이 등장한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잡지나 신문의 편집자는 원고를 모아 지면에 맞게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촬영 자료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장면을 채택한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건과 의미를 각자의 방식으로 편집하는데, 저자는 이런 방법론을 '에디톨로지'라고 명명한다.

 

창조는 '창의적 사고'가 수반되어야 한다. 창의적 사고란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데서 시작한다. 자극을 수용하는 단계부터 다르다. 아주 익숙하고 진부한 장면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창조적 질문이 비로소 시작된다. 우리의 삶이 힘든 이유는 똑같은 일상이 매번 반복되기 때문일 것이다. 창조적이고 싶다면 이 따분한 삶을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

 

 

천재와 또라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인간이 가장 창의적일 때는 멍하니 있을 때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다는 뜻이 아니다. 멍하니 있을 때, 생각은 아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가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할 때가 있다. 그러고는 그 생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거꾸로 짚어나간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생각의 흐름을 찾아냈을 때, 자신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날아다녔던 생각의 범위에 놀라게 된다. 보통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창조적인 순간인 셈이다.

 

보통사람은 어쩌다 겪는 '날아가는 생각'이지만, 천재에게는 일상이다. 천재의 생각은 날아다닌다. 하지만 그 날아다니는 생각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수많은 IT 창업자 중, 오늘날 포브스 500대 부자이자, 한국의 10대 부호 안에 드는 유명 게임업체 넥슨의 창업주 김정주는 날아다니는 생각을 구체화한 특별한 인물이다.

 

그런데, 날아다니는 생각은 천재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또라이'의 특징이기도 하다. 천재와 또라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천재는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또라이는 그렇지 못하다. 생각이 그냥 계속 날아다닌다. 자신의 생각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마구 날아간다.

 

오늘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보통사람들도 천재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이 일부 천재들에게만 부여한 '날아다니는 생각'을 이제 보통사람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쥐', 즉 컴퓨터의 '마우스' 때문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생각을 날게 하는 도구를 갖게 된 것이다.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관심 있는 곳을 클릭하면 생각은 바로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방금 전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다. 이건 엄청난 혁명이다. 

 

 

크로스텍스트 vs 하이퍼텍스트

 

성장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지적 충격을 받는다. '아, 나도 한번 저 사람처럼 글 쓰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다. 지식욕도 일종의 허영이다. 사람은 남들에게 폼 나 보이고 싶을 때 성장한다. 어릴 때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이 들면서는 대중에게 폼 나 보이려고 한다. 남자들이 항상 여자에게 폼 나 보이고 싶어 하는 것과도 같다.

 

헤겔의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의 핵심은 나도 한번 폼 나고 싶다는 심리학적 '동기'다. 그런데, 저자의 지적 성장 과정에서는 도올 김용옥 교수와 이어령 선생이 그렇게 폼 나 보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도 그들처럼 글 쓰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저자가 도올 김용옥과 이어령 선생을 닮고 싶었는지 살펴보자.   

 

김용옥은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 쓴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인문, 사회과학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쓰는 경우는 없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과학이 학문의 전형으로 여겨진 후, 인식주체인 '나'는 학문적 글쓰기에서 사라졌다. 자연과학적 지식의 핵심은 '주체가 배제된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기초는 실험이다. 실험의 결과가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려면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즉 누가 실험해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객관성', 반복된 실험에도 그 결과는 동일해야 한다는 '신뢰성', 측정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측정했다는 '타당성', 그리고 그 결과를 일반화할 수 있는 '표준화'(비교 가능성)이다. 주관성은 과학성의 최대 적인 셈이다. 그럼에도 김용옥은 '자기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의 한국 교수들이 두려워하는 '주체적 글쓰기'가 도올에게 가능했던 것은 그의 크로스텍스트적 사유 때문이다. 그의 무기는 '동양고전'이다. 해당되는 텍스트를 둘러싼 사회, 문화, 언어, 정치적 맥락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이런 크로스텍스트적 독해는 개신교, 천주교, 불교를 넘나들 수 있는 무기로 장착했기에 당연히 주체적 글쓰기로 연결되면서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학을 다녀온 소위 유학파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교수들은 누구나 자기 전공이 있다. 흥미롭게도 모두 다 위대한 서구 학자를 전공했다. 헤겔 전공?, 그렇다면 헤겔은 누구 전공일까?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오늘날 한국에서 '인문학 위기'를 거론하는 이유는 바로 한국의 맥락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서양인들의 텍스트로 서양의 학문을 해왔으니 말이다.

 

한국의 콘텍스트에서 새로운 텍스트가 가능하려면 기존의 텍스트를 해체해야 한다. 텍스트의 해체와 재구성은 김용옥식 크로스텍스트로는 불가능하다. 탈脫텍스트, 즉 하이퍼텍스트가 가능해야 한다. 한국에서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온 학자가 바로 이어령 선생이다. 소위 'IT 혁명'이라며 남들이 모두 '디지털'을 논할 때,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인 '디지로그'를 제시했다. 이 개념의 핵심은 바로 디지털의 발전이 아날로그의 변화를 초래하고, 아날로그는 여전히 디지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주체적 학습과 데이터베이스

 

한국적 상황에서 강요받았던 공부의 방향이 상실되자, 주체적 학습의 내용과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왜 공부해야 하는가의 때늦은 질문이기도 했다. '사회Gesellschaft'와 '문화Kultur'의 개념적 차이에 관한 논의에 특히 관심이 갔다. 결국 저자는 '문화심리학'으로 자신의 공부 방향을 결정했다.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Was ist deine Theorie? 네 이론은 뭔가?”

 

면담 신청 후, 몇 달을 기다려 겨우 만난 지도 교수는 저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가 펼쳐놓은 논문 계획서는 아예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자신만의 이론을 생각해본 적도, 그렇다고 그런 이론을 만들 생각도 없었는데, 지도 교수는 이제 막 독일에 정착한 그에게 '네 이론이 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그는 당연히 "이론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당신의 이론을 배우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는 "나가라고" 했다. 석사, 박사 논문을 쓰겠다는 학생이 어찌 자기 생각이 없을 수가 있느냐는 반응이었다. 게다가 남의 이론 요약하는 것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제시하고 싶은 이론의 방향을 생각해서 다시 오라고 했다.

 

주체적 시선으로 공부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학문적 문제의식이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는 바로 자신만의 주체적 관점이 분명해야 남의 이론을 흉내 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공부하는 방법부터 바꿔야 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저 대가의 이론을 이해하고 외우는 것만으로 저자 자신만의 이론 구성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관찰해보니 아주 특이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학생들 대부분이 작은 카드에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학교 앞 노점상들도 다양한 사이즈의 카드를 팔고 있었다. 심지어 이런 카드를 정리하는 다양한 모양의 상자까지 팔고 있었다. 재질은 나무, 가죽, 플라스틱 등 참으로 다양했다. 그럼에도 저자는 한국에서의 습관대로 노트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바로 '편집 가능성'이다. 카드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편집이 가능했지만, 저자의 노트는 편집이 불가능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책을 읽으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내용을 카드에 정리한다. 카드 맨 위엔 키워드를 적고, 그 밑에는 '연관 검색어'를 적고, 출처와 날짜 등을 기록해둔다. 물론 내용은 카드 앞뒤로 빼곡히 요약한다. 다소 번잡스럽긴 해도 이것들이 모이면 아주 중요한 데이터베이스가 되는 것이다.

 

 

저자의 편집력

 

1. 일단 책을 많이 산다

2. 책에 밑줄을 긋고 내 생각을 적는다

3. 중요한 내용은 '데이터베이스 앱'에 저장한다

4. 넓찍한 모니터 2개를 나란히 붙여 사용한다

5. 책상 3개를 'ㄱ'자로 연결해 아주 넓게 사용한다

6. 각 방마다 주제별로 책들을 모아 놓는다

7. 유튜브 같은 영상자료를 수시로 본다

8. 연재를 쒸지 않고 계속한다

9. 나만의 '개념'을 끊임없이 편집해내야 한다

10. 콘텐트 생산, 그 자체가 재미있어야 한다

 

 

 

축구 중계를 폼 나게 하라

 

현재 아시안 게임이 진행 중이다. 얼마전 대형 스포츠 행사인 월드컵 축구에서 한국 대표팀은 16강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나마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독일을 이긴 게 위안거리였다. 이것도 우리의 실력이라기보다는 상대의 실수로 얻은 행운의 승리였다. 며칠 전 한국 대표팀은 비교적 약체라던 말레이지아에게 패하고 말았다. 말레이지아에서 보면 우리가 독일을 이긴 것처럼, 한국 선수들의 실수로 얻은 행운일 것이다. 그나저나 손흥민 선수의 병역 특혜가 걸린 금메달인데, 출발이 영 시원찮다.

 

저자는 책에서 한국 축구의 중흥을 위해선 축구 중계를 폼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축구를 보여주는 방식이 바뀌면 선수들의 경기 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공간을 읽는 경기를 펼치게 되므로 덩달아 실력이 향상되며, 축구팬들의 태도도 함께 바뀐다는 것이다. 이제 애국심에 호소하는 '애국 축구'를 그만하자. 축구팬들이 축구를 이해하는 수준이 바로 그 나라의 축구 수준이다. 애국심으로 축구 수준을 올리려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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