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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글쓰기 특강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미국의 고전학자 월터 옹은 인간이 점점 더 내면적인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글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문자 문화가 인간의 내면성을 키웠다는 것이다. 이런 내면화 효과는 한 개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물론 내면성을 키우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적정 수준의 내면성이 바람직하겠지만, 내면성이 너무 부족한 사람은 글쓰기를 통해 그걸 키워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머리말' 중에서
글쓰기의 모든 것
책의 저자 강준만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논객 중 한 사람으로, 직선적이고 도발적이고 감각적인 구어체 문장으로 논쟁 상대를 인정사정 없이 짓밟아 버린다. 지역차별, 학력차별, 남녀차별 등 모든 형태의 차별과 연고주의, 패거리 문화를 혐오하며, 지식인의 기회주의로 판단되는 언행들을 제1의 논적으로 삼는다.
표현이 너무 거칠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그나마 자제해서 그렇게 쓰는 거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필자들은 비판당하는 사람이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쓰레기 같다'를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정도로 점잖게 쓰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의 글에는 감정이 깔려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러면 우리 사회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될 정도의 문제만 있는, 그렇게 좋은 사회인가?'라고 항변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글을 쓰면서 글에다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 논리적으로만 쓰라?라는 주문은 오히려 말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힌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왕도나 지름길이나 요령도 없다. 평소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해보는 버릇을 길러야 한다. 독서의 생활화가 꼭 필요하다. 독서의 생활화를 위해선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책의 종류와 성격은 물론 자신의 선호도와 수준에 따른 차별적 독서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
적극적 자세를 갖고 책을 읽으면 피곤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대충 책 읽기도 어려운 세상에 하나 마나 한 말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맞다. 동의한다. 그러나 처음이 문제일 뿐이다. 익숙해지면 전혀 피곤하지 않다. 오히려 훨씬 더 재미있다. 생각은 '고통'인 동시에 '쾌락'이다. 쾌락 쪽으로 끌고 가자. 남은 자투리 시간도 그런 쾌락을 위해 이용하면 좋다.
죽어라 스마트폰을 장난감 삼아 물고 늘어질 일이 아니라 글을 써봐야 한다. 문자 메시지 날리고 댓글 다는 것만으론 안 된다. 그런데, 이게 참 문제다. 왜냐하면 스스로 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의 글쓰기 특강을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이 특강의 가장 큰 혜택은 여러분에게 글쓰기를 강제하는 점"이라고 말하는 건 결코 겸양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말 없이 글 없다
"글을 소리 내어 읽는 음독이 글자와 내용을 바로잡는 교정에 효과적임은 빼어난 선배 글쟁이들의 작업을 엿보면서 내가 익힌 바다.주변 사정 때문에 음독이 불가능하면 입술로 읽어보는 순독이 차선책이다. 음독이든 순독이든 나는 글 고치기를 길고 짧은 글 할 것 없이 스무 번 넘게 거듭한다. 자랑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어려운 도전이고,그럼에도 노력하는 만큼 좋은 글을 쓸 수 있음을 후배들에게 말해주려 함이다"
이는 서울대 김형국 교수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말한 것이다. 말 없이 글 없다. 글을 눈으로만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귀로도 읽는다. 평소 글을 쓰면서 속으로 입술로나마 읽어보는 '순독脣讀' 습관을 갖는 게 좋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 자식들이 과거 공부한다고 책을 펴놓고 이웃까지 들리도록 크게 소리내어 읽는 것도 결국엔 과거장에서 문장으로 답안을 제출할 목적이 아닌가 말이다.
명암明暗의 법칙
(사례) 인터넷은 대통령 탄핵이나 효순이, 미선이 시위 때 커다란 여론을 일으켜 사람들이 광화문이라는 한 장소에 모이게 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이와같이 사회적인 큰 방향을 일으키는 사건을 함께 공유하는 것은 좋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소수의 생각은 무시할 수도 있는 요소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수의 의견을 거스를 때는 특히나 익명이 가능한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무참히 공격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쌍방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소수의 일방통행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인터넷 포퓰리즘'을 다루고 있다. 표현엔 좀 문제가 있지만 인터넷의 상호 모순되는 특성을 지적하고 있다. 인터넷은 '연대의 체'인 동시에 '분열의 매체'이며, '탈중심적 매체'인 동시에 중심을 향해 괴력을 집중시키는 '소용돌이의 매체'이기도 하다. 사례의 글을 쓴 필자의 지적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저자는 아래와 같이 글을 고쳐 쓴다.
인터넷은 대통령 탄핵이나 효순이, 미선이 시위 때처럼 막강한 여론 조성 능력으로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을 광화문이라는 한 장소에 모이게 하는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능엔 명암이 있다. 사회적인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함께 공유하는 것은 좋으나 그런 집중력은 소수의 생각을 무시하게끔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이버 공간에서 다수의 의견을 거스를 때는 익명의 주류파 네티즌들로부터 무참히 공격당하기도 한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다수의 곧재하에 놓일 때 그건 쌍방향이 아니라 일방통행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경계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무슨 주제건 명암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걸 명심하고 양쪽을 동시에 보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순기능-역기능론'과 통하는 것이다. 예컨대, 부정부패에도 '순기능' 또는 '명明'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새뮤얼 헌팅턴은 적어도 후진국에선 부정부패가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부정부패의 상호 유착 효과에 의한 엘리트의 결속', '극소수에게 부가 편중됨으로써 자본 축적 용이', '뇌물에 의한 관료주의 통제 우회로 일의 신속한 처리' 등과 같은 순기능을 갖고 있단 점에 주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