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 교수의 조선 산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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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필자가 항상 강조하는 말이다. 역사가 단지 과거의 옛 이야기로만 흘러가고, 현재에 되살아나지 못하면 그 역사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역사 속 인물들의 행적과 사건의 과정들이 현재 속에서 되살아나 새로운 방향과 의미를 제시해 줄 때 역사의 힘은 빛을 발하는 것이다. - '머리말' 중에서

 

 

역사는 현재에 다가오는 역사일 때 빛을 발할 수 있다

 

이 책은 민초들의 생활상부터 왕실의 암투에 이르기까지 미시사와 거시사를 아우르는 다양한 내용들과 그것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까지 담으려고 노력했다. 즉 선비들의 육아일기, 선조들의 설 풍속과 무더위를 피하는 방법, 한강의 얼음, 바둑 이야기, 살인 코끼리에 대한 대응, 남한산성에서의 주화파와 척화파의 갈등, 반정의 단서를 제공한 국정 농단 여인들, 세종 시대의 국민투표 등에서 이를 느껴볼 수 있다.

 

책의 저자 신병주현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역사 대중화에 관심을 두어 2013~2014년 팟캐스트 방송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고정 패널로 활동했으며, KBS 1 TV에서 <역사저널 그날>을 진행했다. 또 KBS의 <역사추리>, <TV조선왕조실록>, <역사스페셜>, EBS의 <역사극장> 등의 자문을 맡기도 했다.

 

현재 궁능 활용 심의위원, 인문학대중화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KBS 1 라디오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과 EBS 라디오 <신병주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을 매주 진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왕으로 산다는 것>, <조선과 만나는 법>, <조선평전>,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조선후기를 움직인 사건들>,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이지함 평전> 등이 있다.

 

우리들은 조선시대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왕정 시대이기에 아마도 그때는 지금보다 고지식할 것이라는 편견을 가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조선을 잘 모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세종은 새로운 세법의 적용을 위해 독단적인 지시가 아니라 모든 백성들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음이 이를 대변한다. 어쩌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민생을 우선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조선 역사의 전문가답게 기록물과 문화재를 통해 당시를 살피고, 사건 현장과 유물들을 짚어가면서 우리들에게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청계천 광통교廣通橋

 

1394년 10월, 한양漢陽(현재의 서울)이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된 데는 그만큼 이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지역을 통합하기에 좋다는 점, 도성의 동서남북 외곽에 낙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북악산 네 개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이들 산을 연결하면 도성의 방어에 매우 유리하다는 점, 한양은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내륙의 수운과 서해를 통해 한강이 연결되는 해상 교통의 요지라는 점이 수도로 선정될 수 있었던 주요 이유였다.

 

그렇다고 전혀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네 개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집중적으로 도심을 관통하는 바람에 홍수 시에는 도성 안 전체가 잠길 수밖에 없었다. 즉 청계천에 모인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유출되지 못함에 따라 비가 많이 오면 청계천이 범람하는 통에 홍수로 인한 몸살을 피해 나갈 수 없었다. 이를 해결코자 1406년 태종은 도성을 관통하는 개천의 조성 작업을 착수, 1412년 마침내 청계천 공사를 완료했던 것이다.

 

그런데, 청계천 공사를 완료하면서 기존의 흙다리나 나무다리 대신에 돌다리를 만들었다. 이 돌다리 가운데 바로 광통교가 있었다. 이 유적지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태종 이방원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신덕왕후 강씨(태조의 계비繼妃)는 정도전 등을 앞세워 자신이 낳은 아들 방석을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획책했다. 이에 이방원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과 정도전 등을 제거,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쳐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1396년 계비 강씨가 죽자 태조 이성계는 그녀를 신덕왕후에 봉하고 왕릉도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곳에 조성, 정릉貞陵이라 불렀다. 이후 왕이 된 이방원은 아버지가 죽자 정릉을 파괴하고 이를 이전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1409년, 마침내 정릉은 도성 밖 양주지방(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현재의 정릉)으로 이전했던 것이다. 1410년 8월 청계천의 흙으로 만든 광통교가 홍수로 붕괴되자 정릉의 병풍석屛風石과 신장석神將石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 이후 백성들이 이를 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인간의 증오심이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김정호는 왜 평생을 지도 제작에 올인했을까? 이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는 오직 그의 열정 때문이었다. 그가 살았던 조선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상인들에게는 전국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던 때이다. 실제 대동여지도는 접었다 펼 수 있는 절첩식 형태였기에 상인들이 휴대하기엔 무척 편리했다.

 

1책에서부터 22책에 이르는 책자가 모두 펼쳐지면 우리나라 전도全圖가 되는 형태였다. 축적은 약 16만분의 1로 각 책은 세로 30센티미터, 가로 20센티미터의 크기인데, 8폭으로 접을 수 있도록 제작했다. 전체를 펼치면 세로 6.7미터, 가로 3.3미터의 사이즈로 실로 방대한 크기이다.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널리 보급코자 이를 목판까지 새겼다는 사실이다. 대동여지도에 각 고을의 거리를 10리마다 표시한 것이나 역이나 원 등 상업과 관련된 정보가 자세한 것도 상인용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목판은 지도의 수요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오직 고산자의 발과 열정으로 탄생한 대동여지도의 가치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선비의 육아일기

 

계절의 여왕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이 때에 어울리는 무척 인상적인 기록물이 있다. 바로 600년 전에 선비 이문건에 의해 쓰여진 <양아록養兒錄>인데, 이는 현존하는 유일한 할아버지 양육 일기다. 흥미롭게도 아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손자에 대한 기록물이라는 사실이다. 저자 이문건은 중종 때 과거에 합격했지만, 명종 때 외척정치가 시작되어 경상도 성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의 자식 대부분은 천연두 등으로 일찍 죽고 유일하게 장성한 둘째 아들도 어릴 적의 열병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었다.

 

이런 모자란 아들을 교육시키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희망이자 복이 바로 손자을 얻은 것이었다. 나이 58에 2대 독자인 손자 수봉에게 그는 온통 관심을 집중했다. 이에 아이가 차츰 일어서고, 이빨이 나고, 걷기 시작하는모습 모두를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노년에 귀양살이까지 하는 그는 오직 손자 돌보는 것으로 고독을 이겨낸 셈이다.

 

"아이가 장성하여 이것을 보게 되면 아마 글로나마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양육 일기의 곳곳에서 조선시대 생활사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는 학술적 가치가 있다.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애정과 엄한 교육 방법, 여종의 아이 젖 주기, 유아 사망의 최대 주범이었던 천연두, 단오의 그네놀이, 지금 보다 현저히 낮은 아이들의 음주 문화 등은 <양아록>이 단순한 양육 일기가 아니라, 조선시대 역사 사료로서의 가치까지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에도 국민투표가 있었다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조선시대에 세종이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토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새로운 세법인 '공법貢法'을 추진하면서 세종은 최종적으로 백성들의 찬반 의견을 묻고자 했다. 투표 3년 전인 1427년 세종은 창덕궁 인정전에 나가 과거시험 문제를 내면서 공법에 대한 견해를 묻는 등 세법을 확정하기 전에 미리 분위기를 조성해갔다. 조령모개 식으로 정권이 바뀌면 마음대로 부동산 관련법을 개정하는 현재의 정부에 비하면 이 얼마나 민생 정치인가 말이다.

 

1430년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장장 5개월 간에 걸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는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정부 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 도의 감사 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 아뢰게 하라"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세종은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시행할 수 없다"는 근본을 밝히면서 농작물의 작황을 조사할 때 공정성을 잃은 경우가 많았고,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부려 부자들은 이롭게 한 반면 빈자들을 괴롭히고 있음을 우려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각 도道의 보고가 도착하면 공법의 편의 여부와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을 관리들이 깊게 논의해 결과를 보고하라고 주문한다.

 

 

조선시대는 고리타분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책은 관료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유급휴가를 도입했고,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에는 과거시험의 합격에 관해 지역별로 그 수를 명시함으로써 현재의 공공기관 지역별 인재 할당제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영조시대엔 나라에 충절을 지킨 후손들을 특별 채용하는 시험인 '충량과忠良科'를 실시하기도 했음을 소개한다. 이만하면 '조선은 고지식한 왕조였다'는 우리들의 선입견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이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조선의 역사 현장으로 발걸음하기를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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