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다보면 평소에 크게 마음언저리를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행여 길을 가다가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쉽게 돌아서지 못하게 되는 인연이 있다.
가던 방향을 잠시 잊어버리고 두 눈을 반짝이며 ‘크게 무리가 되지 않으면 차 한잔 어떠겠냐’,고 내 쪽에서 먼저 권하게 되는 사람.

차 한잔 함께 마시면서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왜 이 사람을 그동안 만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눈을 맞추고 있는 내내 좋은 느낌을 갖게 해 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인연은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깊은 겨울밤 나뭇가지위로 소복하게 쌓이는 눈송이 같다.
다음 만남의 어떤 기약도 하지 않고 손을 흔들어도 결코 이별은 없을 거라는 가녀린 예감 같은 것이 마음속에서 잔잔한 평화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윤대녕의 소설은 내게 있어 우연히 마주치면 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그러한 인연과도 같다 

지난7월,분당의 영풍문고에서 윤대녕의 소설집<제비를 기르다>를 만났다.
지금은 분당매장을 정리한 덕에 분당으로 출근할 일이 없지만 그때만 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매장일 때문에 분당으로 출근하곤 할 때였다.

대휴근무라도 할 경우는 바깥 날씨조차 파악할 수 없는 꽉 막힌 매장에서 10시간 이상을 버티면서 벌떡증(?) 때문에 한숨을 쏟아내기도 하며.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벌떡증’을 감수해낼 수 있을 만큼의 즐거움하나가 오히려 밋밋한 생활에 탄력을 주기도 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같은 건물 안에 영풍문고라는 기막힌 산책코스(?)가 있다는 것인데 대형서점이 자신이 일하고 있는 건물 3층에 있어서 읽고 싶었던 책을 수시로 찾아볼 수 있고, 누군가에게 선물할 책을 고르며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긴다는 것,또 그때마다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그 사각거리는 종이의 촉감을 싱싱하게 느껴보는 것이 얼마나 설레는 일이었는지 오히려 그 때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찬찬히 서점 안을 걷다보면 두껍게 깔려진 카페트가 발소리 뿐 만이 아니라 가슴을 어지럽히던 우울함까지 흡수해버려서 조금 더 웃을 수 있었던 시간들.

사람마다 제각기 서점에서 만나는 신간 중에 눈에 띄는 순간 어떤 망설임도 없이 구입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
그것도 책의 내용이나 간간히 읽게 되는 서평과는 상관없이 그저 시야에 꽂히듯 들어오는 작가의 이름 하나만을 보고.

글보다는 그 글을 쓴 작가가 좋아서 구입하게 되는 책이 있고 작가는 별로지만 작가가 내뿜어 내는 글 빨에 매혹되어 구입하게 되는 책들.

책을 선택하는 이유에서 전자,후자의 동기가 사뭇 대립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오랜 시간 만나온 친구를 대하는 마음과도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슴속에 오랜 시간을 두고 찬찬히 쌓아온 믿음 같은 것이 애정이 되어 앙금처럼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들은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만나든 불편하지 않다고나 할까.

내겐 파울로 코엘료와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국내 작가로는 윤대녕과 김영하의 책들이 그렇다.

특히 윤대녕.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의 작품들을 만날 때, 이번엔 윤대녕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냈을까 하는 생각 같은 건 거의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윤대녕의 작품들 이구나,로 시작해서 읽는 내내 윤대녕스러움에 푹 빠져 있을 뿐이다.

소설‘제비를 기르다’는 칠월이 저물어가는 어느 오후,분당 매장을 정리할 무렵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찾은 영풍에서 우연히 만난 윤대녕의 책이었다.
(어떤 망설임도 없이 이 소설책한권을 카운터로 가져가며 적잖은 설레임에 가슴이 콩콩거렸던 것을 기억한다.계산을 하기위해 줄을 서있는 동안 출간된지 꽤 된 소설인데 왜 그동안 이 책이 눈에 뜨지 않았을까,그제서야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하며. )

<누가 걸어간다>이후 3년만에 출간된 소설집인 이 책에는 ‘제비를 기르다’를 비롯해서 8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그의 대부분의 글들이 그렇듯 이번 소설집역시 윤대녕 특유의 감각적인 표현들과 삶의 평범한 한 자락에서 그가 쏟아내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글 곳곳에서 숨 쉬고 있다.

특히 이번 단편집은 그가 그려내고 있는 삶의 방식과 그 속에서 어우러지는 인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층 더 깊어진 그의 내면을 엿보는 것만 같은데 그것은 ‘그동안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하는 상상을 내 멋대로 하게 만들곤 했다.

독특한 구성이나 기막힌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소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그의 글들.
하지만 그의 글을 읽고 있자면 난데없이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고 있는 것만 같아 잠시 책을 덮고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윤대녕은 독자의 느끼게 될 그러한 감정을 이미 예상이라도 했었던 걸까.
작가후기에 남겨진 그의 말이 가슴에 사무치며 긴 여운을 남긴다. 

길을 잃으면 안되겠기에 보다 숨을 낮추고 되도록 말을 꺼렸다.

 그렇게 생의 한가운데를 어두운 숲처럼 더듬더듬 관통하면서

나는 '그 모든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 그리움을 자주 체험했다.

삶의 정체는 결국 그리움이었을까? 



                                                                               그의 소설들은 내밀하고 매혹적이다.

                                                                       저항하고 싶다가도 아름다워서 다는 못한다.

내가 너무 일상적이 되어가는 거 아닌가, 관계들이 이렇게 시시할 수가 있나 좌절감이 들 때,

일부러 그의 소설들을 찾아 읽을 때가 있다.

그는 사소한 개인을 신화적으로 이끌 줄 알아서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나도 너도 사뭇 소중하고 장엄해지는 것이 은근히 살아갈 맛이 생겨난다.

윤대녕스러운 것에 이미 얼마간 중독이 되어 있는 이들에게도

'고래등', '탱자', '마루 밑 이야기' 같은 작품이 실어나르는 깊이있는 인간에 대한 성찰은

중독자가 되길 잘했다는 은근한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 신경숙 (소설가)

 

 

 

'인생이란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잠깐 스쳐지나가는 빛을 바라보는 것.

따뜻한 강물처럼 나를 안아줘.

더 이상 맨발로 추운 벌판을 걷고 싶지 않아.

당신의 입속에서 스며나오는 치약냄새를 나는 사랑했던거야,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거라고 내게 얘기해줘.가

끔은 자유와 이상과 고독에 대해서도 우리 얘기해.

화병처럼 나는 주인만을 사랑해.나도 너의 주인이 되고싶어.

당신이 먼저 잠든 밤마다 나는 이렇게 한줄씩 쓰고 있어요.-'못구멍' 中

 

 

생에는 화해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도 엄연히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그토록 악마처럼 굴던 삶이

오히려 나에게 관대한 점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삶을 완수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다는 건 얼마나 갸륵하고 오묘한 사실인가 -‘고래등’中

 

 

그저 찰나를 못버텨 미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또한 사람의 일이지 싶다-편백나무숲 쪽으로中

 

돌이켜보니 나는 그 양철집을 좋아했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주소를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작년에 무슨 일로 근처를 지나가 생각이 나서 부러 들러보았는데

그 집은 당연한 일인 듯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거대한 휴게소가 들어서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이든 무엇이든 흔적없이 사라지게 마련인 모양이다.

나는 휴게소에 들어가 앉아 커피를 마시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릴 적 그 어둑한 방에 누워 우박처럼 듣는 빗소리를 듣고 있을 때처럼. -고래등中

 

 

희뿌연 어둠속에서 문희가 내게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몹시 지쳐 보였다.

 집으로 가는 막차 안에서 아버지가 또 타령조로 말했다.

"장차 너도 알게 되겠지. 사는 게 얼마나 고독한 행사인가를." -제비를 기르다中

 

 

제비가 찾아올 때까지 어머니는 턱을 괴고 앉아 마루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른들로부터 종종 지청구를 먹거나 걱정을 샀다.

계집 아이가 벌써부터 무언가를 그리워한다고 말이다.

계집아이는 나중에 커서 고독해지거나 또 남을 고독하게 할 팔자라고 했다.

아홉살 되던 해는 무려 보름이나 늦게 제비가 돌아왔는데,

열흘째 어머니는 기다림에 지쳐 자리에 앓아눕고 말았다.

읍내에서 의원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진맥을 본 뒤 나직이 혀를 차며 말하길,

상사병이라 했다.

외할아버지는 못 들은 척 헛기침을 하며 방에서 나가버렸고

이마에 식은깜을 흘리며그런 요 위에 누워 있는 어린 딸을 흘겨보며

외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의원이 가방을 들고 일어나려는 터에, 어머니가 빨갛게 실눈을 뜨고 물었다.

  "의원님, 강남이 어디여요?"-제비를 기르다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내가 결혼했다. 이게 모두다. 나는 그녀의 친구가 아니다. 친정식구도 아니다. 전 남편도 아니다. 그녀의 엄연한 현재 남편이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은 엉망이 되었다.

 


제 2회 세계문학상 당선작인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강윤후 시집을 찾아 헤매다가 들어간 동네의 작은 서점에서 역시나 허탕을 치고 그냥 나오기가 머쓱해 눈에 띄는 대로 집어 나온 책이다.-나중에 알았지만 이 소설은 어느  서점에서나 제일 좋은 장소, 제일 눈에 띄는 곳에 떡 하니자리하고 있었다.물론 베스트셀러란 타이틀로.-

<아내가 결혼했다>는‘ 보편적 윤리관을 뛰어넘는 주제가 월드컵 결승전을 관전하듯 경쾌하게 전개된다,’는 김원일의 심사평처럼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킥킥킥..읽는 내내 입술을 삐집고 참기 힘든 웃음이 새어나왔던.

하지만 이 작품은 재미에만 그치지 않고 사랑이나 결혼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것도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설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하다. 한 여자가 있고 한 남자가 있고 둘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고  어느 날 아내가 또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남편도 사랑하고 그 남자도 사랑한다, 사랑하는 남편과는 이혼은 하기 싫고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를 정부로 만들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진짜다. 이것이 진짜 내용이다.

아내가 결혼했다, 라는 파격적인 제목을 보고 책장을 펼치면서도 실제로 아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한 이야기겠어, 하고 의심들을 하시겠지만-나로서도 얼핏 축구이야기가 있어서 아내가 축구와 결혼했다,라고 표현 할 만큼  축구를 무지 좋아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하지만 때로는 제목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믿어주는 미덕이(?) 필요하다.

소설 속에서 (물론) 축구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여주인공 인아는 축구를 만만치 않게 좋아하는 남편 덕훈과 이혼하지 않고 또 다른 남자 재경과 결혼을 한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이 소설은 우선 재미있게 읽혀지는데 그  읽혀지는 이유는 일단 ‘일처다부제’라는 발상이 발칙했고 그리고 축구이야기를 접목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세련된 텍스트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소재가 일반적이지 않듯 읽고 난 후에 일반 적 이지 않은 것들, 또는 다분히 일반 적인 것 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그 것도 읽을 때 킥킥거리던 웃음이 조금 미안해질 만큼 약간은 무거운 마음으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박현욱이 왜 이렇게 골머리 싸매가며 자기 지식만으론 턱도 없이 모자란 일부다처제나 축구에 대한 참고문헌을 수 도 없이 들척이면서 이 글을 썼을까, 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뭐 1억이란 상금이 욕심이 났고 그걸 얻기 위해서 다른 작가들과는 뭔가 다른 특이한 걸 써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써내려갔든 안 그랬든.

아무튼 1억의 상금만큼은 아니지만 꽤 괜찮은 작품이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박현욱이 서두에서도 밝혔지만)그가 정말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일부다처제라는 발상은 그가 이 소설을 쓰기위한 소재에 불과하고 책 내용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축구이야기는 독자들을 즐겁게 하고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끌어준 일종의 윤활유역을 충분히 잘 해냈을 뿐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부다처제’라는 발칙한 발상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논쟁의 핵심을 한곳에 치중한다.

어찌보면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자.이자 더욱 지극히 평범한 남.편.인 덕훈이 아내의 결혼을 인정하기까지의 갈등과 그 갈등이 주었던 고통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건 단 하나 아내‘인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가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이었다. 또한 얼마나 치열한 노력이었던가!

그가 결코 일처다부제에 대해 인정하고 따른 것은 아니었다. 여주인공 인아가 모권사회 의 부활을 꿈꾸는 대단한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듯이.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상 받은 작품 뒷장을 어김없이 차지하는 심사평을 읽으면서 조금 놀라기도 했다.

참 나. 이 사람 도대체 소설을 제대로 읽은거야, 하는 의심이 가는 심사평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동안 존경해마지않던 박범신 아저씨의 심사평은 고개 갸우뚱 세 번-슬픈 신문명의 풍경 속으로 어쩌구, 현대인의 쓸쓸한 에스컬레이터 저쩌구는 는 정말 깬다.

게다가 김미현의 심사평은 완전 레드카드감이다-이 소설을 두고 이런‘판타지’가 필요 할 만큼 일부일처제나 절대적 사랑의 시효가 만료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키기에 슬프다니.

덧붙여 일부다처제든 일처다부제든 이런 보편적이지 않은 관습과 제도에 대한 내 견해를 잠깐 이야기 하자면 나는 그런 제도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거나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식으로는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일반적인 것에 익숙해있는 우리로선 파격적인 것을 이해한다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약간은 혼란스러울 뿐이다. (약간은? 아니,많이!)

인류가 생성되고 시대가 변하면서 관습과 제도는 수없이 바뀌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차피 절대적인 것 은 없다.
아직도 지구상엔 폴리안드리로 살아가는 민족이 있고 이슬람이 있고 몰몬교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슈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보편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살아오면서 수많은 경험을 통해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행하는 것 일 것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제아무리 삼국시대가 모계사회였던 흔적이 남아있던 어쩌든,
신라에선 혼전섹스가 흔했고 유부남,유부녀들이 프리섹스를 했건 어쨌건.
고려시대엔 쌍화점에서 남녀가 만나 원나잇스탠드를 했건 안했건.
서라벌땅의 선덕여왕이 남편을 셋을 거느렸건 어쨌건.
어쨌건..저쨌건 ...등등등등..

지금은 500년 밖에 안 된 조선의 관습과 제도가 현시대의 거의 모든 관습과 제도를 대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 평범한 사실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결국 인간이 만드는 제도와 관습 이란 건  선험적 경험을 통해 스스로가 감당해 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이상적 인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보편화 시킨 것이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되도록 이면 덜 상처 받을 수 있는 관계. 상처를 받더라도 보호 받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했고 그 제도 안에서 안주하는 것이 생각보다 편리했기에 그것이 보편화되는데 일반적이지 않은 사고로 테클을 걸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하는.

사랑과 결혼은 다르다.

오. 어떻게 사랑과 결혼이 다를 수가 있나요,라고 반문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뭐 그냥 결혼해봐,라고 무책임한 말을 할 수밖에.(정말 결혼해보시오.)

물론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겠지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이란 제도에 안주할 때 스스로가 의식하지 않은 그 무언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결혼을 함으로서 얼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까보다는 얼만큼 안정될수 있을까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는 결혼을 함으로서 정신적인 안정이든 물질적인 안정이든 안정이 되어야만 비로소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 덕훈은 오로지 ‘사랑’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아야만 행복해지는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는 진실이었다. 비록 일처다부제의 결혼형태로 함께 하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내 인아에 대한 사랑이었을 뿐이다.

마지막 글이 제법 감동적이다.

‘바티스투타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항상 축구가 있다.’-그는 결국,

모든 것이 무너져도 나에겐 사랑이 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축구공의 진실.

축구공 안에 담겨 있는 위대함이란 행복과 관련된 어떤 것이다.

축구공이란 행복과 가까운데 있는 무엇이다.

축구공이란 바로 행복이다 .

자본가들이 선수들을 축구 노동자로 만들어 축구라는 상품을 화려하게 포장해서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더라도,

정치가들이 축구열기를 이용해서 표를 훔쳐가고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축구공속에 깃든 행복만은 그들이 독점할 수도,팔아먹을 수도,훔쳐갈수도 없다.

 

 

또 하나의 진실.

어떤 사람이건 사랑을 하게 마련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싶어한다.

어린아이도,

어른도.

결혼을 한 사람도,

하지 않은 사람도.

노동자도,자본가도. 좌파도,우파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질 나쁜 연애 민음의 시 118
문혜진 지음 / 민음사 / 200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마 위의 사랑                      

네가 부르면 달려가서 도마 위에 눕는 나는 생체요리, 그는 나의 요리사 내 눈물에 레몬가루를 뿌려 샤벳을 만드는가 하면 달달 볶다가 내 뛰는 심장을 바짝 태우기도 하고, 팔팔 끓여 국물을 우려내는가 하면 한동안 독에 처박아 놓고는 묵은 김치처럼 꼼짝 말고 있으란다 그래? 그래 주지 나는 독안에 웅크리고 앉아 네 마음의 경로를 좇아본다 너의 히스테리에 휘말린 내가 가여우나 너를 훔쳐보고 끝없이 닥달하는 게 내 유희가 아니던가, 네 장난이 가소로우나 네가 친 그물속에서 가끔은 집을 짓고 살고 싶은 내 마음을 진짜 혹은 가짜라 할 수 있을까 너의 요리는 늘 재미나다 내 몸에 한켜씩 회를 떠 조악한 장식을 곁들인 생체요리, 너는 오랜 칼질을 마치고 일어나 걸어 보라 한다 얼마나 지겨웠던지 나는 겨우 뼈를 맞추고 도마에 누워 칼질하는 횟수를 세다가 잠들었는지 몰라                    

-문혜진 시집 <질 나쁜 연애>중에서.


                      

 많이 사랑했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더 사랑할 수도 있었던 시절이었다.

맥심모카골드 인스턴트커피믹스 두 봉지를 커다란 머그컵에 털어 넣고 정수기 왼쪽 버튼을 눌러 뽑아낸 더운물로 탄 커피는 호호 불 필요도 없이 뜨뜨미지근했다.

또,그렇게 싱겁게 식도를 타고 곧바로 위속으로 흘러 들어간 갈색액체는 커피라고 하기엔 뭔가 턱없이 부족한 것 같기만 하다.

이런이런.  갓 볶아낸 블루마운틴 원두를 갈아서 내린 원두커피를, 마시기 직전에 쏟아버리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차라리 그냥 커피 같은 건 포기하고 냉수한잔 정도로 만족 하는 게 나을 뻔했는데.

아니면 애당초 처음부터 블루마운틴 원두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말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커피가 맥심모카골드 커피믹스 하나뿐이라고 생각을 했더라면 그 커피 한잔을 타는데 있어서 정성씩은 아니더라도 좀 더 신경을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뜨뜨미지근한 물을 주전자에 팔팔팔 3분만 더 끓여주었더라면...

점심식사를 마친 후의 산책코스(?)가 되어버린 같은 건물 3층에 자리한 영풍문고에서 시집코너를 어슬렁거리다가 문혜진의 시를 처음 만났다.

젊은 시인답게 독특하고 감각적인 언어.

팔딱거리며,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 한 감성 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지면에서 잠자고 있던 활자가 꼼지락꼼지락 기어 나와 일상 속으로 티 안 나게 스며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치 철지난 바닷가에서 듣던 오후 네 시의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마냥 나른하게.

그러다가 이상하게도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잊혀 졌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선명해지고 추억이라 명명할 수 있는 것들을 불러내어 결국 그 청춘을 함께 걸어온 나의 사랑을 참으로 안쓰럽게 만들고 만다.

많이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표현하지 못해서 미안한 사랑이고

많이 사랑했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더 사랑할 수도 있었던 시절이었다.

지나간 날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회상 할 수 있는 기억을 청춘저편에서 건져 올리며 그 안에 떡 버티고 있는 나의 사랑이 내가 어느 날 밤 쏟아 엎질러 버린 원두커피, 또는 막 타버린 그 뜨뜨미지근한 인스탄트 커피와  참 많이 닮아있다고, 잠깐 울먹이고 싶어졌다. 


 

 


 
시금치 편지                            

  -문혜진

나는 올리브 당신은 뽀빠이 우리는 언제나 언밸런스, 당신은 시금치를 좋아하고 나는 먹지 않는 시금치를 요리하죠 그래서 당신께 시금치 편지를 씁니다 내가 보낸 편지엔 시금치가 들어 있어요 내가 보낸 시금치엔 불 냄새도 없고 그냥 시금치랄 밖에는 아무런 단서도 없지요 끓는 물에서 금방 건져 낸 부추도 아니고 흙을 툭툭 털어 낸 파도 아니고 돌로 쪼아낸 봉숭아 이파리도 아니고 숭숭 썰어서 겉절인 배춧잎도 아니에요 이것은 자명한 시금치 편지일 뿐이지요 당신은 이 편지를 받고 시금치 스파게티를 먹으며 좋아라 면발 쫙쫙 당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동네 공터에 개똥을 밟아 가며 당신을 위한 시금치 씨를 뿌리고 있답니다 시금치가 자라면 댕강댕강 목을 베어 버리겠어요! 그 때…… 다시 쓰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트레이시 슈발리에 <진주 귀고리 소녀>-베르메르를 다시 만나게 해준 아주 특별한 소설

 아주 오래전 늘 기형도의 시집을 가지고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베르메르의 그림과 함께.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가 인쇄되어있던 종이 한 장.
화집에서 오려낸 것 같기도 했고 미술잡지의 한 페이지를 잘 찢어낸 것 같기도 했던 그 그림은 엽서만한 크기로 잘 접혀져서 그 친구가 늘 품고 다니던 기형도 시집 어느 부분에서 나지막하게 숨 쉬고 있었다.

기형도와 베르메르라니. 휴우.

지나간 시절속의 누군가를 떠올릴 때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야하는 부분에선 그다지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이기에(실은 무지 후진 기억력에 가깝다. ㅡ.ㅡ) 적어도 삼십 초정도는 미간을 찌푸리고 집중을 해야만 기억해낼 수 있는 그 친구의 이름이지만 나는 지금도 가끔 기형도의 글을 만나거나 베르메르의 그림을 접하게 될 때면 어김없이 그 친구가 떠올려지곤 한다.

그건 정말이지..어쩔 수 없이 떠올려진다,고 해도 좋을 표현 같다.

어쩌면 그 친구를 기억하는 부분에 있어서 그가 기형도 시집만을 가지고 다녔다든가, 베르메르의 그림만에 심취해있었다든가 했더라면 장담하건데 이제와서 그 친구를 떠올리는 일 같은 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가지의 사물을 두고 그 조합에 있어서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라고 말할 수 있는 판단기준이 무엇인진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 친구가 가지고 다니던 기형도의 시집을 볼 때마다 그 안에 베르메르의 그림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꽤나 신경 쓰였었고 그때 나는 혼자서 차라리 바스키아의 그림이라면 좀 더 나을텐데, 라는 터무니없는 억척까지 부렸었다.

베르메르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서두가 또 길어지고 말았다.

아니,정확하게 말하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진주 귀고리 소녀>를 모티브로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쓴 소설<진주 귀고리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우선 슈발리에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요하네스 베르메르란 화가에 대해서 잠깐 말하자면, 나로선 정말 잠깐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베르메르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 이렇다 할 개인적 견해를 가지고 있진 않다.(적어도 슈발리에의 소설을 읽기 전까진.)

사실 베르메르는 당시 누군가의 입에 거론이 될 만큼 잘 알려진 화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사는 벨라스케스나 램브란트의 영향력 만으로도 충분히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한 것처럼 우쭐대는 듯 했고 요하네스 베르메르란 작가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 거대한 벽을 두드리기엔 그의 생은 거의 알려진 것조차 없을 만큼 특별하지도 않았다. 후세에 알려진 그의 작품은 겨우 30여점뿐이었고 다작을 하지 않고도 유명해진 여느 예술가들처럼 그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지도 않았다.

하지만 평가조차도 오랫동안 감추어져있던 이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가 최근에 와서 여러 사람의 눈에 머물고 귀를 간질이고 소곤소곤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데 그건 19세기중엽 그를 발견한 미술사가의 덕이 아니라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한 소설가의 숨가쁜 상상력과 그 상상을 이어준 섬세한 필력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발 빠른 허리우드의 기획사는 곧 이 소설을 영상으로 만들었고 베르메르는 대중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그린 <진주 귀고리 소녀>를 본 것은 내가 열아홉 살 때였다.그 전에는 이 화가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나는 미술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지만,이 그림에 즉시 빠져들고 말았다.소녀의 머리를 감싼 푸르고 노란 아름다운 천,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위에 내려앉은 빛,물기를 머금은 듯한 눈동자와 귀에 매달린 촉촉한 진주에 매료됐다.나는 밖으로 나가 이 그림의 포스터를 사 가지고 들어왔고,이 그림은 이후 이십년 동안 내가 어디에 살든 벽의 한곳을 차지해왔다.

-트레이시 슈발리에 <진주 귀고리 소녀>한국어판 서문中



책 서문에 의하면 슈발리에는 이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을 쓰기위해 베르메르에 대한 자료를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베르메르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고 그녀는 오히려 그 놀라움에 즐거워한다.-‘아무도 이 소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난 즐거웠다. 그건 내가 상상하는 대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렇게 몇 가지 사실만을 토대로 마음껏 상상하여 쓰여진 소설<진주 귀고리 소녀>는 슈발리에가 했던 그 특별한 시도만큼이나 독자로 하여금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빠져든다, 라는 표현을 아낌없이 하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의 구성과 독자로 하여금 마치 자신이 그리트가 되어 델프트의 거리를 걷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인물과 분위기에 대한 생생한 묘사. 하녀와 화가,그 사이에 서성이며 잠깐 울고 싶게 만드는 그 안타까운 사랑은 또 어떻고.

눈물을 별로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아주 슬픈 멜로영화를 볼 때 갑자기 넘쳐나는 눈물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내가 눈물을 수습하기 위해서 계속 마음으로 오물거리던 말. -지어낸 이야기일 뿐인데. 뭐.저 여주인공 조금 있으면 컷소리와 함께 분명 화장 고칠거야.등등..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같은 말을 오물거렸다.-상상속의 사랑일 뿐이야. 뭐가 그렇게 가슴이 아파.

하지만 책장을 덮고도 며칠 동안이나 가슴에 남아있는 그리트 때문에, 그 생생한 아픔 때문에 가슴언저리를 쓸어내리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고 만다. 그 진주 귀고리 소녀를.

그리고 요하네스 베르메르라는 화가의 얼마 되지 않은 모든 그림을.

트레이시 슈발리에.

감히 미술에 대해선 거의 알지도 못한다고 했던 그녀가 누구보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했던 것은 관심을 넘어선 사랑의 힘이었을까. 이십년 동안 그녀의 한쪽 벽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준 바로 그!진주 귀고리를 달고 있던 소녀에 대한.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은 결국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실제로 일어났을 것만 같고 또 그렇게 믿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 독자들의 가슴에 요하네스 베르메르라는 화가를 잉태시키고 그의 그림을 찾아 긴 여정에 오르게 한다.

슈발리에의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그러했겠지만(정말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나는 책을 덮는 순간 그녀의 책에 수록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원화 22점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그의 작품집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잊혀질 뻔 했던 그림들을 보면서 소설에서 받았던 감동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감동으로 가슴이 채워져오기 시작함을 느낀다. 여름 오후 갯벌에 밀물이 차오르듯 조용한 감동. 하지만 그 선명한 움직임이란.

요하네스 베르메르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떤 정제된 시간 속으로 모든 사물이 빨려 들어가 있는 듯 한 고요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의 소재들은 하다못해 그림 속에 표현된 벽에 걸린 액자마저도 그 고요함속에서 저마다 뭔가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어쩌면 아우성처럼.

마음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 말을 걸고 싶게 만들어지는 어떤 순간들.

그러다 불현듯 내가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면서 갖게 되는 이 느낌이 조금도 낯설지가 않고 오히려 아주 익숙해져있는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래전 기형도가 토해내던 활자들을 되새김질하며 내 가슴속에 오래오래 살다간 ‘그 어떤것’과 아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던 순간이었다.

슈발리에만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슈발리에 식으로 느낄 수 있던 그의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나는 다시 제멋대로 상상한다.
기형도와 베르메르..
또,역시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내 오래전 친구.

문득, 만약 아주 오래전 바스키아가 아닌 베르메르의 그림을 엽서처럼 접어서 기형도의 시집에 넣고 다녔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책 페이지 사이사이 기형도의 어떤 시가 쓰여진 부분에 그 그림을 꽂아두었었냐고, 꼭 한번 묻고싶다, 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보면 이렇게 십 수년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던 일들이 어느날 갑자기 궁굼해지도 하는 법이다.
그 친구를 앞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못 만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도 그동안의 상상은 언제나 내 몫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유 2007-09-04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읽고 여러 사람에게 소개했더랍니다..

사비나 2007-09-06 00:25   좋아요 0 | URL
분위기있는 소설이었어요.
아무런 감흥없이 무료함이 찾아올때
삶에 잠깐 탄력주기~딱 좋아요.^^

비로그인 2007-09-05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느낌이 좋은 책이네요. 친구가 한번 읽어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는 군요. 베르메르라는 베일에 쌓인 여인의 모습이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아마도 가까운 시일안에 읽게 될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사비나 2007-09-06 00:24   좋아요 0 | URL
짱돌이님의 리뷰 기대 만빵 ^^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책을 그다지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작은방을 하나 만들어놓고 오밀조밀 모여있다가 가끔 내게 말을 걸어오는 책들이 있다.

 

흔히들 하루키의 대표작이라고들 하는<상실의 시대>는 그의 단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더불어서 내가 지금도 가끔 즐겨 읽는 책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독서습관 이라는 게 있기 마련인데 나 같은 경우는 평소 유난히 애정을 느끼고 있는 작가의 책이거나 작가와는 상관없더라도 한번쯤 가슴을 뒤흔들었던 문장을 간직하고 있는 책은 반복해서 여러 번 읽는 편인데 하루키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상실의 시대>는 언제 어디서 어떤 부분을 읽든지 아직까지도 나를 즐겁게 해주는 책 중의 하나이다. 

 

어떤 날은 단 몇 시간 만에 한 권을 다시 뚝딱 읽어 치우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내가 좋아하는 한 부분-그러니까 몇 페이지 안 되는 분량을 읽으면서 하루를 보내기도 하며.

 

그래서 그런지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책은 책꽂이에 꽂혀져 있는 다른 책들에 비해서 유난히 낡아 있고 다시 그 중에서도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에 전혀 힘을 들이지 않아도 책장이 저절로 넘겨질 만큼 낡아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와타나베가 고베의 아미료로 나오코를 찾아갔던 부분인데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고 그만큼 자주 즐겨 읽는 부분이기도 하다.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오래도록 마음이 머무는 부분이란 표현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싶게.

 

그러고 보면1989년도에 발행된 이 책을 그 비슷한 시기에 구입한 이후 지금까지 정말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를 정도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단어가 이끄는 문장들이 새로운 하나의 영상을 만들곤 하는데 가끔 그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어쩔 때는 소설의 한 장면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기억의 한 부분을 재생시키고 있는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심지어는 그곳,고베의 아미료-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거닐던 길목-에 내가 함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잡목 숲을 거닐고 있는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모습과 함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의 모든 이미지들이 떠올려진다.

음과 양의 선명한 대비처럼 초원과 숲의 경계에 쏟아지는 가느다란 빛 이라든가 쓰다듬듯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그때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살짝 몸을 비틀며 나뭇잎들이 토해내는 탄식 같은 떨림.

 

늦여름에 죽은 매미가 바삭하게 말라 흩어져있는 소나무 숲을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거닐고 있는 모습이 아른거리고 그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밑에서 들려오던 사각사각 소리가 세상의 모든 적막을 거부하는 작은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던 작은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 오르면 그때까지 가을볕을 어깨에 걸치고 아무 말도 없이 앞장서 걷고 있던 나오코가 조용히 뒤를 돌아다 보는 모습.

그리고 곧 이어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은 나오코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내 귓가를 간질인다.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내가 존재해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요.

 







 

 

사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고 특히 이 부분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이유 같은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여 누군가 이유 같은 걸 물어본다면 문학적 작품의 완성도가 어쩌구 하면서 폼을 잡기보단 보단 아마 왠지 분위기 있는 소설이잖아!’정도의 간단한 대답쯤은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이상의 의미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책을 읽다 보면 한쪽한쪽 책장을 넘길 때마다 왠지 모르게 울컥한 심정이 들곤 한다.

“..나를 기억해 주세요…”그동안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했던 부탁이 종소리처럼 마음에 작은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 책 <상실의 시대>가 내 책꽂이에 꽂혀져 있길 십 수년.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책의 서두에 이 소설을 통해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그려내 보고 싶었다’,고 분명히 밝혔지만 나는 이 소설을 통해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사랑>이란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이미지가 만들어내던 분위기에 매료 되어 있었고 하루키식 문체에 흠뻑 빠져있었으며 책에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들-돌격대부터 시작해서 미도리라든가 레이코여사등 쉽게 만날 수는 없지만 꼭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내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다는 것 .또 그러다 보면 그들을 만날 수 있진 않을까 하고 가끔 말도 안 되는 기대나 상상을 해보며 약간의 즐거움을 느꼈던 그런 소설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17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의 원제 이기도 하다)이 흘러나오는 기내에 앉아 나오코를 떠올리며 그녀의 기억이 희미해지면 희미해질수록 좀 더 많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와타나베의 심정처럼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오래 전의 어느 날 이후 이제서야 이 소설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만 같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때로는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이 되어 마음 속에서 성을 쌓기도 하는데 그 성이 견고해지기 위해선 심장처럼 끊임없이 뛰고 있는 시계 바늘 속에 수많은 상념과 눈물을 녹일 줄 알아야 하는것일까.

 

어렴풋한 느낌 같은 것들이 자꾸만 형태와 색을 바꿔가며 가끔 혼란에 빠뜨리긴 했지만 결국은 이 책에서 하루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사랑이었음을 이제서야 알 것만 같다.

불완전한 퍼즐을 맞추듯 기억의 부분부분을 짜맞추며 그렇게 그 안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와타나베를 떠올리면 다시 한번 더 사랑이란 것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이해한 사랑을 와타나베에게 다가가 나즈막히 속삭여주고 싶다. 정작 아미료에서 나오코가 했던 말들이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꺼낸 말들이었는지 모를 만큼 나오코의 사랑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또 그녀가 자신을 사랑조차 하지 않았다고 믿으며 청춘을 세월저편으로 흘려 보내놓은 와타나베에게.

 

 

 

나오코를 이해한다면 그녀의 사랑도 이해해야 해요.

비록 그녀는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오코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듯이

사랑하는 방식이나 표현의 방식도 다를 수가 있는 거에요.

생각 해 보세요..

이미 죽음이 드리워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던 한 여자가

자신의 삶에 마지막 일 것이 분명한 한 남자에게 과연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자신을 잊지 말고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달라는 부탁을 할 수는 없는 법이에요.

 

그녀에게 사랑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성화 같은 것이 아니지요.

한번 타올랐다가 작은 흔적으로만 남는 모닥불일지라도

그녀에게는 타올랐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사랑인 거에요..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흔적만으로도 타올랐던 순간을 쉽게 기억해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녀는 어떤 흔적이든 간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알 수 있겠어요?

그녀가 그런 식으로 당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래요..나오코는 누구보다도 당신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에요.

나를 기억 주었으면 해요..”

죽음이라는 흔적을 당신 가슴에 남기고선

두고두고 당신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랬던 거에요.

그녀에겐 그것이 사랑이었던 거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9-0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몇번이나 읽었는지 모릅니다. 질리지 않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과 함께한 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읽고 싶은 마음이 끓어 오르는 군요. 또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동생한테 전화해서 언넝 가져오라 해야겠군요.^^;

사비나 2007-09-06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짱돌이님의 이 글에 대한 느낌..읽었어요.
같은 책에 비슷한 느낌을 갖는 사람이 있다는거..
읽으면서 참 반가웠다죠..

김난주번역의 노르웨이의숲이 있고
유유정의 상실의시대가 있는데
역시 번역에 따라 글의 느낌은 달랐어요.
(김난주번역은 그때만 해도 꽝이었어요..쉬잇~!^^)
90년대 초였던가..하루키붐이 일기 한참전에 이 책을 만났었는데..
원어로 읽어보고 싶단 욕심에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었다는
참 용감한 시도를 했었던 기억이 나요..

이궁,.하루키 얘기하니까 길어지네요.참아야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