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찮아요?라는 말.

무수한 발을 가진 기나긴 슬픔이 우리들의 부정한 궤적위로 지나간다.

이상하리만치 가볍고 나른하고 비현실적으로.

그렇게도 불행한가.괜찮아요,라는 말 한마디가 그토록 따뜻할 만큼.

감정이란 때로는 이상한 것이다.약속할 수도 없고 기대할 수도 없기 때문일까.

연인에게 느끼는 열정이란 그것으로 충분할 뿐 나의 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의 생과는 더욱이 무관해져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헤어지면 우리사이에 일어난 한때의 얽힘은 이 세상 아무도 모를 것이다.

먼 강변에 아무도 모르게 죽은 새 한 마리가 마르고 헤지고 녹아

마침내 모래 속으로 스며들어버리듯이,

덧없이 영원 속으로 익사하는 것이다.

 

 

 

 

나고 보니 나쁜 일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강물과 바람이 모래를 실어 나르듯.

모든 것은 인생이 실어 나르는 모래알 같은 것이다.


말을 해도 어쩔 수 없이 모호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 함께 증발되어버리고 말 하나의 느낌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이 순간에는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 것 같다.

굳이 말을 하자면,이런 것이다.

공기 속에 자신을 놓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삶을 신뢰하며 순간의 등을 올라타고 달려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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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깊은 슬픔에는 눈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다.

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어서 소리를 내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나 나이를 먹었고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이 세계에는 눈물조차도 흘릴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깊은 슬픔이 눈물마저도 빼앗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 혹시라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런 슬픔은 다른 어떤 형태로도 바뀌어지지 않고,

다만 한 줄기 바람도 불어오지 않는 밤에 내리는 눈처럼

그냥 마음에 조용히 쌓여가는 그런 애달픈 것이다.

조용히 쌓이는 눈은 슬프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나는 그런 슬픔을 어떻게 해서든지 언어로 표현해 보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아무에게도 전달할 수 없었고

심지어 나 잔신에게조차도 전할 수 없어서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언어를 폐쇄시키고 나의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한없이 외롭고 슬픈영혼에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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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글.깊은 사연 문인 편지 전>이 열리고 있는

영인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은 발걸음 보다 마음이 한보 먼저였다.

 

관람시기를 놓친 것 같아 거의 포기했었다가

이미 공식적인 관람기간이 지나버린 9월의 마지막 금요일.

전시회 마지막 날을 하루 남기고 아직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사정이 그다지 좋진 않았지만 출근을 좀 늦춰서라도 나서 보자 싶어

내내 가보고 싶었던 그곳을 향해 달뜬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문학관측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전시일정이 일주일 연장되었다.

목요일 오후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해본 건 그날 내가 했던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 같다^^)


 

보고 싶던 전시회를 보러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살짝 가슴도 뛰었다.

-쿵쿵쿵..그러고 보니 심장에서 신호를 보내온 것도 꽤 오랜 만의 일이지 싶다.


 

뭔가를 기다리며 설레여 보는 것.

그것은 마치 군대 간 애인에게 첫 면회를 가기 전날 밤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건 조금 자신 없는 비유이긴 하다.^^

왜냐면 그 비유를 두고 어쩌면 군발이 애인을 둔 ‘그녀’들이

어디 감히~하며 발끈할지도 모르고(설마!)

애인을 한 번도 군대에 보내본 적이 없는 나로선 사실 첫 면회를 가기 전날 밤의 기분 같은 건

그저 짐작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먼 곳에 있는 그리운 이를 만나러 가기 위해 첫 발걸음을 뗄 때의 심정은

누구나 같지 않을까.

정착할 곳 없어 서성대던 그리움이 초행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단상 속으로

녹아내리듯 스며드는 그 찰나를 발견하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어딘가에 ‘보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을 가다보면 보고 싶었던 것을 꼭 만날 수 있을 거란 확신은

그 길을 지날 때,차 창밖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별로 잘나지 않은 풍경마저도

마음에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인 문학관>

 

영인문학관이 있는 평창동까지 가는 길.

시선이 자꾸 저 먼 곳으로 던져지는 것을 의식하며 문득,어딘가를 찾아가면서

마음이 그토록 여유 있어 보기는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잘 알려지지도 않은 작은 전시회 하나 보러가면서

이런저런 상념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걸 보니 괜히 피식하고 웃음도 나온다.

나도 참 그동안 어지간히 목이 말랐었구나 싶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그래도 아직까지 목이 마르다는 것을 느끼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올 해는 비교적 다양한 전시회를 다닌 셈인데 이번 영인문학관의<문인 편지전>은

지금까지 관람했던 전시회중의 최고의 전시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난봄에 보았던 간송미술관의 <우암송시열 특별전>과 밀레의 만종 앞에서

손을 모으고 숨을 멈추게 했던 <오르쉐 미술관전>이 아직까진 최고다^^)

별로 신통치 않은 기억력을 가진 내가 오래도록 기억할 몇 안 되는

전시회중의 하나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현관을 열자마자 보이는 문학관 내부

 

 



   계단을 올라가서 오른쪽이  전시실 입구

 

볕과 바람이 담장마다 촘촘히 붙어있던 문학관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여기 였구나.하는 안도감과

‘자 이제 가볼까 ’하는 기대감을 동시에 전해주던 현관내부도 좋았고

전시회 자체도 우리가 흔히 보는 회화 전시회에서 받는 그 느낌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뭐랄까.작가들의 편지를 통해 엿보는 사적인 영역에서 지금까지 그들의 글을 읽으며

느껴왔던 소위 말하는 ‘문학의 향기’가 아닌

풋풋한‘인간냄새’를 발견하곤 살며시 미소가 지어진다고나 할까.

 




                    1전시실 -개관하자마자 첫 관람객이 된 덕분에 전시실엔 아직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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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화가)과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아내 정미경(소설가)이

1981년12월에 주고받은 편지 일부
“날이 차오. 혹 생떽스의 글을 생각해본 적 있소? 우리를 무참히 죽여가는 것은 암울한 계절의 어두운 강에 다리가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던 사람. 그 다리의 이름은 휴머니즘이라고. 소등한 밤에 마지막 문을 닫고, 내 구두소리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낭하를 걸어나갈 때 춥고 검은 우수를 한 번씩은 경험하곤 하오. 가을날에 비하면 겨울은 아무리 순해도, 내면에 아문 상처의 잇자국을 남길 수 있는 계절인 것 같으오.”

“안녕. 책을 읽다 잠시 덮어두고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씁니다. 책 글줄 사이를 문득문득 그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소란한 삶이 끝나면, 이렇게 시계소리만 들리는 밤시간이 오듯, 그냥 마주앉아 그의 웃는 얼굴을 바라본다든가, 같이 時라도 한 줄 읽거나, 더운 차를 앞에 놓고 하루의 일들을 조용히 얘기하고 싶은 그런 바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나는 그가 있는 내 삶에 감사드렸습니다. 어쩌면 나의 고개 숙임은 신앙이라기보다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나도 그만큼의 정말 믿음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은 그 사람 속에 내가 있는 느낌인 것입니다. …안녕, 내 귀여운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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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혜린이 누구에게 보낸 엽서일까

 

그러고 보면 강인숙 관장만큼 서한문의 묘미에 대해서 깔끔한 정리를 할수 있는 사람도 드물것 같다.

서한문의 매력은 발신자 내면의 가장 깊은 풍경을 담았다는 것”이고

문인의 편지는 수신자가 혼자서만 읽을 수 있는 최고의 호사스러운 문학작품

이라고 했던가.


 

다른 전시회 보다 유난히 발 동동 구르며 가보고 싶어 했던 이번<문인 편지전>.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한 것처럼 뭔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에 이유야 있겠냐 만은

관람이후 많다면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문득,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유난히’란 표현까지 들먹이며 이 전시회를 보고 싶었던 건

언제부턴가 내면의 가장 깊은 풍경을 담고있는 서한문과 조우하는 일이

드물어지는것에 대해 어쩔수 없이 느껴지는 상실감을 위로받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또 ,수신자가 혼자서만 읽을 수 있는, 그 인간냄새까지 폴폴 풍기는 호사스러운

문학작품을 <전시회>라는 것을 통해서라도 함께 읽는 호사를 누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학창시절 언니의 연애편지처럼 몰래 훔쳐보는 수준이 아니라

당당하게 대놓고 즐길 수 있는 그런류의 호사를.

 



                      문인들의 육필원고.집필문고 외에도 손때뭍은 일상용품 등을 볼수 있다. 

 



춘원 이광수 초상

 


왠지 의식적으로 잘 쓰게 되지 않는 단어가 있다.

내게도 그런 단어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하나가 바로‘답장’이란 단어다.

‘답장’이란 단어는 단어자체가 가장 자유로워야 할 것이

어떤 의무감에 속박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단어에 그토록 알러지 반응 처럼 민감한 내가

H에게는 가끔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엄격히 말하면 답장이란 단어를 대놓고 쓰는 것은 아니고

가끔 편지를 써달라는 말을 하는데 (대부분 내가 며칠동안 출장을 가게되는 경우지만.)

뭐 거의‘답장’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



 


전시회를 보고 온 날 돌아오는 길, H의 편지가 갑자기 너무 그리워졌다.

언제나 ‘내면의 가장 깊은 풍경’을 담고 있는 그 H의 편지가.

그리고 그날 밤 H에게 편지를 써달라는 은근한 압력을 넣었다.

 출장도 안가면서.

H가 비록 문인은 아니지만

다분히 문학적인 그의 편지를 받고 간만에 호사를 누려볼까 했는데

되돌아온 대답이 쓰기 싫은 핑계치고는 되려 문학적이어서 그냥 봐줘야할 것 같다.

         편지는 말야.

흘러넘칠때 써야하는거야.

넘쳐 땅에 떨어지는게 아까울때.

그걸 받아서 기록해두는거라구.

덕수궁에서 자격루 본적있지?

계단식 항아리..

마음의 그릇은 그렇게 하나가 채워지면 또 하나의 그릇이 생기고.

그걸 열심히 채우면 넘쳐 다른 그릇을 채워나가고.

중요한건 말야.

쉼없는거지...

많이 흐르기도하고 조졸 흐르기도 하지만.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지는거.

그게 시간이고 세월이기도하고..

당신이 편지를 받고 말야.

나에게 무지무지 화가난 상태에서 읽어도

봄눈처럼 사르르 녹을만한 편지를 써야지....



 

 

아.조만간 무지무지 화가난 상태에서 출장을 가보는건 어떨까.

 

 

 

 20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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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묵묵히 해를 품고있던 바다가

결국 그 열기를 참지못해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세상에 토해내는 순간을 보고싶었다.

 

서울과 강릉의 거리라는 것이  

바다를 보고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퇴근후 가볍게 다녀올수 있는거리는 아니지만

뭐,어떨까 싶기도 했다.

 

약간의 망설임이 있긴 했지만

 결국 퇴근후 밤열시가 넘어선 시간에 영동고속도로를 탔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다음날  조금 늦은 출근을 할수도 있었다.

 

다시 일상.

매일 하는 양치질처럼 변함없는 것 들만이 무성한 일상이지만

그 변함없는 것들을 보며 쓸쓸해하는 일 같은건,

당분간 내 몫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멋대로 해본다.

 

사실 서울과 강릉의 물리적인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그리워하는 '그 무엇'과 내마음의 거리만큼 더 먼것은 없다.

 

이젠..

조금씩 그 거리를 좁히는 연습을 하며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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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산다.

불멸의 신神적인 것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방 안에 혼자 있으면 코를 후빈다.

내 영혼안에는 인도의 온갖 지혜가 자리하고 있지만,

한번은 카페에서 술 취한 돈 많은 사업가와 주먹질을 하며 싸웠다.

나는 몇 시간씩 물을 응시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뒤쫓을 수 있지만,

어느 주간 신문에 내 책에 대한 파렴치한 논평이 실렸을 때는 자살을 생각했다.

세상만사를 이해하고 슬기롭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때는 공자의 형제이지만,

신문에 오른 참석 인사의 명단에 내 이름이 빠져 있으면 울분을 참지 못한다.

난 숲 가에 서서 가을 단풍에 감탄하면서도 자연에 의혹의 눈으로 꼭 조건을 붙인다.

이성의 보다 고귀한 힘을 믿으면서도

공허한 잡담을 늘어놓는 아둔한 모임에 휩쓸려 내 인생의 저녁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리고 사랑을 믿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인들과 함께 지낸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의 인간인 탓에 하늘을 믿고 땅을 믿는다. 아멘.

 

 

산문집 <하늘과 땅>의 서문

 

 

 

 

 

 

 

 

 

 

 

 

 



하늘과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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