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트레이시 슈발리에 <진주 귀고리 소녀>-베르메르를 다시 만나게 해준 아주 특별한 소설

 아주 오래전 늘 기형도의 시집을 가지고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베르메르의 그림과 함께.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가 인쇄되어있던 종이 한 장.
화집에서 오려낸 것 같기도 했고 미술잡지의 한 페이지를 잘 찢어낸 것 같기도 했던 그 그림은 엽서만한 크기로 잘 접혀져서 그 친구가 늘 품고 다니던 기형도 시집 어느 부분에서 나지막하게 숨 쉬고 있었다.

기형도와 베르메르라니. 휴우.

지나간 시절속의 누군가를 떠올릴 때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야하는 부분에선 그다지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이기에(실은 무지 후진 기억력에 가깝다. ㅡ.ㅡ) 적어도 삼십 초정도는 미간을 찌푸리고 집중을 해야만 기억해낼 수 있는 그 친구의 이름이지만 나는 지금도 가끔 기형도의 글을 만나거나 베르메르의 그림을 접하게 될 때면 어김없이 그 친구가 떠올려지곤 한다.

그건 정말이지..어쩔 수 없이 떠올려진다,고 해도 좋을 표현 같다.

어쩌면 그 친구를 기억하는 부분에 있어서 그가 기형도 시집만을 가지고 다녔다든가, 베르메르의 그림만에 심취해있었다든가 했더라면 장담하건데 이제와서 그 친구를 떠올리는 일 같은 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가지의 사물을 두고 그 조합에 있어서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라고 말할 수 있는 판단기준이 무엇인진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 친구가 가지고 다니던 기형도의 시집을 볼 때마다 그 안에 베르메르의 그림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꽤나 신경 쓰였었고 그때 나는 혼자서 차라리 바스키아의 그림이라면 좀 더 나을텐데, 라는 터무니없는 억척까지 부렸었다.

베르메르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서두가 또 길어지고 말았다.

아니,정확하게 말하면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진주 귀고리 소녀>를 모티브로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쓴 소설<진주 귀고리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우선 슈발리에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요하네스 베르메르란 화가에 대해서 잠깐 말하자면, 나로선 정말 잠깐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베르메르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 이렇다 할 개인적 견해를 가지고 있진 않다.(적어도 슈발리에의 소설을 읽기 전까진.)

사실 베르메르는 당시 누군가의 입에 거론이 될 만큼 잘 알려진 화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사는 벨라스케스나 램브란트의 영향력 만으로도 충분히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한 것처럼 우쭐대는 듯 했고 요하네스 베르메르란 작가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 거대한 벽을 두드리기엔 그의 생은 거의 알려진 것조차 없을 만큼 특별하지도 않았다. 후세에 알려진 그의 작품은 겨우 30여점뿐이었고 다작을 하지 않고도 유명해진 여느 예술가들처럼 그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지도 않았다.

하지만 평가조차도 오랫동안 감추어져있던 이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가 최근에 와서 여러 사람의 눈에 머물고 귀를 간질이고 소곤소곤 무언가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데 그건 19세기중엽 그를 발견한 미술사가의 덕이 아니라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한 소설가의 숨가쁜 상상력과 그 상상을 이어준 섬세한 필력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발 빠른 허리우드의 기획사는 곧 이 소설을 영상으로 만들었고 베르메르는 대중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그린 <진주 귀고리 소녀>를 본 것은 내가 열아홉 살 때였다.그 전에는 이 화가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나는 미술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지만,이 그림에 즉시 빠져들고 말았다.소녀의 머리를 감싼 푸르고 노란 아름다운 천,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위에 내려앉은 빛,물기를 머금은 듯한 눈동자와 귀에 매달린 촉촉한 진주에 매료됐다.나는 밖으로 나가 이 그림의 포스터를 사 가지고 들어왔고,이 그림은 이후 이십년 동안 내가 어디에 살든 벽의 한곳을 차지해왔다.

-트레이시 슈발리에 <진주 귀고리 소녀>한국어판 서문中



책 서문에 의하면 슈발리에는 이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을 쓰기위해 베르메르에 대한 자료를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베르메르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고 그녀는 오히려 그 놀라움에 즐거워한다.-‘아무도 이 소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난 즐거웠다. 그건 내가 상상하는 대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렇게 몇 가지 사실만을 토대로 마음껏 상상하여 쓰여진 소설<진주 귀고리 소녀>는 슈발리에가 했던 그 특별한 시도만큼이나 독자로 하여금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빠져든다, 라는 표현을 아낌없이 하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의 구성과 독자로 하여금 마치 자신이 그리트가 되어 델프트의 거리를 걷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인물과 분위기에 대한 생생한 묘사. 하녀와 화가,그 사이에 서성이며 잠깐 울고 싶게 만드는 그 안타까운 사랑은 또 어떻고.

눈물을 별로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아주 슬픈 멜로영화를 볼 때 갑자기 넘쳐나는 눈물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내가 눈물을 수습하기 위해서 계속 마음으로 오물거리던 말. -지어낸 이야기일 뿐인데. 뭐.저 여주인공 조금 있으면 컷소리와 함께 분명 화장 고칠거야.등등..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같은 말을 오물거렸다.-상상속의 사랑일 뿐이야. 뭐가 그렇게 가슴이 아파.

하지만 책장을 덮고도 며칠 동안이나 가슴에 남아있는 그리트 때문에, 그 생생한 아픔 때문에 가슴언저리를 쓸어내리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고 만다. 그 진주 귀고리 소녀를.

그리고 요하네스 베르메르라는 화가의 얼마 되지 않은 모든 그림을.

트레이시 슈발리에.

감히 미술에 대해선 거의 알지도 못한다고 했던 그녀가 누구보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했던 것은 관심을 넘어선 사랑의 힘이었을까. 이십년 동안 그녀의 한쪽 벽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준 바로 그!진주 귀고리를 달고 있던 소녀에 대한.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은 결국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실제로 일어났을 것만 같고 또 그렇게 믿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 독자들의 가슴에 요하네스 베르메르라는 화가를 잉태시키고 그의 그림을 찾아 긴 여정에 오르게 한다.

슈발리에의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그러했겠지만(정말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나는 책을 덮는 순간 그녀의 책에 수록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원화 22점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그의 작품집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잊혀질 뻔 했던 그림들을 보면서 소설에서 받았던 감동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감동으로 가슴이 채워져오기 시작함을 느낀다. 여름 오후 갯벌에 밀물이 차오르듯 조용한 감동. 하지만 그 선명한 움직임이란.

요하네스 베르메르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떤 정제된 시간 속으로 모든 사물이 빨려 들어가 있는 듯 한 고요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의 소재들은 하다못해 그림 속에 표현된 벽에 걸린 액자마저도 그 고요함속에서 저마다 뭔가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어쩌면 아우성처럼.

마음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 말을 걸고 싶게 만들어지는 어떤 순간들.

그러다 불현듯 내가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면서 갖게 되는 이 느낌이 조금도 낯설지가 않고 오히려 아주 익숙해져있는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래전 기형도가 토해내던 활자들을 되새김질하며 내 가슴속에 오래오래 살다간 ‘그 어떤것’과 아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던 순간이었다.

슈발리에만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슈발리에 식으로 느낄 수 있던 그의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나는 다시 제멋대로 상상한다.
기형도와 베르메르..
또,역시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내 오래전 친구.

문득, 만약 아주 오래전 바스키아가 아닌 베르메르의 그림을 엽서처럼 접어서 기형도의 시집에 넣고 다녔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책 페이지 사이사이 기형도의 어떤 시가 쓰여진 부분에 그 그림을 꽂아두었었냐고, 꼭 한번 묻고싶다, 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보면 이렇게 십 수년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던 일들이 어느날 갑자기 궁굼해지도 하는 법이다.
그 친구를 앞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못 만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도 그동안의 상상은 언제나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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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7-09-04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읽고 여러 사람에게 소개했더랍니다..

사비나 2007-09-06 00:25   좋아요 0 | URL
분위기있는 소설이었어요.
아무런 감흥없이 무료함이 찾아올때
삶에 잠깐 탄력주기~딱 좋아요.^^

비로그인 2007-09-05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느낌이 좋은 책이네요. 친구가 한번 읽어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는 군요. 베르메르라는 베일에 쌓인 여인의 모습이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아마도 가까운 시일안에 읽게 될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사비나 2007-09-06 00:24   좋아요 0 | URL
짱돌이님의 리뷰 기대 만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