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질 나쁜 연애 ㅣ 민음의 시 118
문혜진 지음 / 민음사 / 2004년 3월
평점 :
도마 위의 사랑
네가 부르면 달려가서 도마 위에 눕는 나는 생체요리, 그는 나의 요리사 내 눈물에 레몬가루를 뿌려 샤벳을 만드는가 하면 달달 볶다가 내 뛰는 심장을 바짝 태우기도 하고, 팔팔 끓여 국물을 우려내는가 하면 한동안 독에 처박아 놓고는 묵은 김치처럼 꼼짝 말고 있으란다 그래? 그래 주지 나는 독안에 웅크리고 앉아 네 마음의 경로를 좇아본다 너의 히스테리에 휘말린 내가 가여우나 너를 훔쳐보고 끝없이 닥달하는 게 내 유희가 아니던가, 네 장난이 가소로우나 네가 친 그물속에서 가끔은 집을 짓고 살고 싶은 내 마음을 진짜 혹은 가짜라 할 수 있을까 너의 요리는 늘 재미나다 내 몸에 한켜씩 회를 떠 조악한 장식을 곁들인 생체요리, 너는 오랜 칼질을 마치고 일어나 걸어 보라 한다 얼마나 지겨웠던지 나는 겨우 뼈를 맞추고 도마에 누워 칼질하는 횟수를 세다가 잠들었는지 몰라
-문혜진 시집 <질 나쁜 연애>중에서.
![](http://cfs6.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DJHYzJAZnM2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MC5qcGcudGh1bWI=&filename=0.jpg)
많이 사랑했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더 사랑할 수도 있었던 시절이었다.
맥심모카골드 인스턴트커피믹스 두 봉지를 커다란 머그컵에 털어 넣고 정수기 왼쪽 버튼을 눌러 뽑아낸 더운물로 탄 커피는 호호 불 필요도 없이 뜨뜨미지근했다.
또,그렇게 싱겁게 식도를 타고 곧바로 위속으로 흘러 들어간 갈색액체는 커피라고 하기엔 뭔가 턱없이 부족한 것 같기만 하다.
이런이런. 갓 볶아낸 블루마운틴 원두를 갈아서 내린 원두커피를, 마시기 직전에 쏟아버리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차라리 그냥 커피 같은 건 포기하고 냉수한잔 정도로 만족 하는 게 나을 뻔했는데.
아니면 애당초 처음부터 블루마운틴 원두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말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커피가 맥심모카골드 커피믹스 하나뿐이라고 생각을 했더라면 그 커피 한잔을 타는데 있어서 정성씩은 아니더라도 좀 더 신경을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뜨뜨미지근한 물을 주전자에 팔팔팔 3분만 더 끓여주었더라면...
점심식사를 마친 후의 산책코스(?)가 되어버린 같은 건물 3층에 자리한 영풍문고에서 시집코너를 어슬렁거리다가 문혜진의 시를 처음 만났다.
젊은 시인답게 독특하고 감각적인 언어.
팔딱거리며,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 한 감성 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지면에서 잠자고 있던 활자가 꼼지락꼼지락 기어 나와 일상 속으로 티 안 나게 스며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치 철지난 바닷가에서 듣던 오후 네 시의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마냥 나른하게.
그러다가 이상하게도 그녀의 시를 읽다보면 잊혀 졌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선명해지고 추억이라 명명할 수 있는 것들을 불러내어 결국 그 청춘을 함께 걸어온 나의 사랑을 참으로 안쓰럽게 만들고 만다.
많이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표현하지 못해서 미안한 사랑이고
많이 사랑했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더 사랑할 수도 있었던 시절이었다.
지나간 날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회상 할 수 있는 기억을 청춘저편에서 건져 올리며 그 안에 떡 버티고 있는 나의 사랑이 내가 어느 날 밤 쏟아 엎질러 버린 원두커피, 또는 막 타버린 그 뜨뜨미지근한 인스탄트 커피와 참 많이 닮아있다고, 잠깐 울먹이고 싶어졌다.
시금치 편지
-문혜진
나는 올리브 당신은 뽀빠이 우리는 언제나 언밸런스, 당신은 시금치를 좋아하고 나는 먹지 않는 시금치를 요리하죠 그래서 당신께 시금치 편지를 씁니다 내가 보낸 편지엔 시금치가 들어 있어요 내가 보낸 시금치엔 불 냄새도 없고 그냥 시금치랄 밖에는 아무런 단서도 없지요 끓는 물에서 금방 건져 낸 부추도 아니고 흙을 툭툭 털어 낸 파도 아니고 돌로 쪼아낸 봉숭아 이파리도 아니고 숭숭 썰어서 겉절인 배춧잎도 아니에요 이것은 자명한 시금치 편지일 뿐이지요 당신은 이 편지를 받고 시금치 스파게티를 먹으며 좋아라 면발 쫙쫙 당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동네 공터에 개똥을 밟아 가며 당신을 위한 시금치 씨를 뿌리고 있답니다 시금치가 자라면 댕강댕강 목을 베어 버리겠어요! 그 때…… 다시 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