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박현찬, 설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연암의 글쓰기에서 삶의 자세를 배우다

여름의 끝자락에 비가 내렸다.
우산을 타고 팔뚝 위로 떨어질 때 오스름 소름이 돋게 하는 차가운 빗방울.

팔뚝위로 소름을 만들고 그게 사명이었다는 듯 다시 또르르르 땅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문득,그런 생각이 든다.
평온하다고 느껴왔던 것들이 지루함으로 변해버리는,그 찰나에 내리는 빗줄기가 섬뜩한 한기를 품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도서관을 오가고 인터넷 서점을 뒤지면서도 별 다른 감흥 없이 밋밋하게 계속 돼 오던 독서.
그로 인해 가끔 작은 한숨을 토해내며 나른한 오후의 권태로운 햇빛 속에서 차라리 꾸벅꾸벅 졸고 싶은 기분이 들 무렵에,더위가 휩쓸고 간 살갗위로 오스름 소름을 만들어주었던 차가운 빗방울 같은 한권의 책을 만났다.

바로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라는 책이다.
이 책은 소설가 설흔과 스토리텔러 박현찬이 공동 집필한 책으로,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연암박지원의 글과 생활에서 엿 볼 수 있는 실용적인 글쓰기와 본격적인 문장론을 다루고 있다.

또, 그 구성방식이 소설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인문실용소설이라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부제가 붙어있기도 하다.

허구와 사실의 결합되어있는 팩션소설인 이 책은 글의 시대적배경이 조선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어떤 억지나 무리 없이 연암이 200년 전의 사람이라는 것을 잠시 잊어버리게 만들만큼 시대간의 소통을 부드럽게 이끌어 내고 있다.

이 소설은 연암의 아들 종채가 아버지연암의 글을 둘러싼 표절시비를 추적하는 것으로 그 서장을 시작한다.

저자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인 ‘김지문’과 연암의 아들 종채의 여정을 통해서 이야기가 전개되며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가 연암의 제자가 되어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해줄 만큼 탄탄한 구성아래 쓰여 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소설가다운 상상력과 함께 연암에 관계된 여러 가지 문헌속의 글들을 적절히 인용하여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글쓰기 이론가인 연암 박지원의 가르침을 정리해 나간다.

또,거기서 멈추지 않고 글쓰기를 병법에 비유하기도 하면서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글쓰기 수칙을 깔끔하게 정리해주기도 한다.

게다가 이책에서는 김조순,유한준,박제가등 당대의 세도가들이자 내노라 하는 글쓰기의 대가들을 함께 만날 수 있는데 그들에 대한 사실적 기술이 적절하게 어우러져있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책을 읽는 재미를 더욱 쏠쏠하게 느낄 수가 있다.

한편 이 책은 연암의 글쓰기를 다루며 더 나아가 그의 정신과 삶의 자세를 통해 독자들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주고 있다.
글쓰기이론을 다룬 인문실용서인 동시에 삶의 철학을 담은 교양서인 셈이라고나 할까.
사실 나로선 굳이 분류를 하자면 ‘실용서’쪽 보다는 ‘교양서’쪽에 손을 들고 싶어진다.

그냥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한다면 어쩌면 이 책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찾을 수 없겠지만,조금만 깊이 있게 이 책을 들여다보면 책의 진짜 가치는 책의 제목대로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암의 글쓰기이론 속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자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단순한 실용서는 감탄은 할 수 있지만 감동은 주지 않는다.

비록 저자는 후기에서 ‘이 책은 독자들이 훌륭하고 짜임새 있는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기위한 것 이지만,동시에 집필과정자체가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는 과정이었다.’라는 고백을 하며 이 책이 단순한 인문실용소설인 것처럼 말했지만 조금만 각도를 바꾸어 연암의 글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그것에 젖어들다 보면 글쓰기를 배우는 과정쯤은 차라리 덤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 책에 나와 있는 연암의 정신과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의 기회를 주고 있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이 책속의 많은 인용문을 읽다보면 연암의 글쓰기 가르침은 곧 삶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세속의명예나 이익이 아닌 순정한 마음으로 쓰는 진실의 글만이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이나 관점과 관점사이를 꿰뚫는 ‘사이’의 통합적 관점에 대한 정리.

문제를 인식하는 ‘관찰’과 넓고 깊은 반복으로 문제의 본질을 깨닫는 ‘통찰’의 시간이 없이는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다는 가르침 등이 결코 글쓰기에만 국한된 자세인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가볍게 읽을 요량으로 구입한 책이었는데 결코 가볍지 않은 연암의 글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들어와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때때로 어두운 곳에서 휘젓는 팔처럼 의미없는 절망으로 몰아가던 사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내게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문장을 만드는 활자뿐만이 아니라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던 종이의 감촉까지도 쉼 없이 말을 걸어오며 나를 반짝이게 하는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 반짝이던 순간들을 기억한다면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왔던 사념들로 부터 조금은 자유롭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를 하게 해준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어쩌면 혼자 읽고 덮어버리기엔 아까운 책.

어느날 문득 하늘이 높아져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하늘을 함께 보고 싶은 벗이 생긴다면

그 벗에게 가만히 이 책 한권을 건네보면 어떨까.이미 푸른 물이 들어있는 손으로.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는 거리를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네가 이리저리 걸으며 까마귀를 본 것이 그 방법이었다.

그럴 때 비로소 문제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그것을 일컬어 약의 이치라 하느니라.

문제를 인식하고 나면 언젠가는 문제의 본질을 깨닫는 통찰의 순간이 오는 법.

네가 갑자기 깨달았다고 한 그 순간이니라.

통찰은 결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반드시 넓게 보고 깊게 파헤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을 일컬어 오의 이치라고 하느니라”

 



 

<연암이 말하는 글쓰기 법칙>

 

一. 정밀하게 독서하라


글쓰기의 시작은 독서다.

근래 들어 속독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난무하지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의미 해석 능력이다.

연암은 천천히, 꼼꼼하게 읽다 보면 미처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二. 관찰하고 통찰하라


관찰과 통찰은 글쓰기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꼼꼼하게 읽고 나면 이젠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책에 담긴 의미를 명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

통찰은 결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반드시 넓게 보고 깊게 파헤치는 절차탁마의 과정이 필요하다.


 

三. 원칙을 따르되 적절하게 변통하여 뜻을 전달하라


옛것을 따르되 변화를 수용하고,

새것을 받아들이되 옛것의 법도를 지켜야 한다.

그때 고루하지 않으면서도 참신한 글을 쓸 수 있다.


 

四. ‘ 사이'의 통합적 관점을 만들라


대립되는 관점을 아우르면서도 둘 사이를 꿰뚫는 새로운 제3의 시각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서 있는 자리와 사유의 틀을 깨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五. 11가지 실전수칙을 실천하라


명확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제목의 의도를 파악해서 글을 쓰며,

사례를 적절히 인용하고, 일관된 논리를 유지하며,

운율과 표현으로 흥미를 배가하라.

인과 관계에 유의하고, 참신한 비유를 사용하며,

 반전의 묘미를 살려서 시작과 마무리를 잘하라.

또한 함축의 묘미를 살리고, 반드시 여운을 남길 것이다.


 

六. 분발심을 잊지 말라

한 번 뱉으면 사라지고 마는 말이 아니라,

지극한 초심으로 한 자 한 자 새긴 글로써 세상에 자신의 뜻을 증명해야 한다.

글 쓰는 사람의 자세는 이와 같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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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2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매력이 풀풀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이 책은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사비나님의 글이 기억 속 깊숙히 밖혀 잊혀졌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군요.

사비나 2007-09-04 12:04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가슴을 뛰게하는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에 나와있는 글쓰기 이론도 주옥같지만
'관계'에 대해서 어수선한 마음이 일때..늘 곁에두고 읽게될것 같은 책이에요.
짱돌이님도 꼭 한번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