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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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책을 그다지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작은방을 하나 만들어놓고 오밀조밀 모여있다가 가끔 내게 말을 걸어오는 책들이 있다.

 

흔히들 하루키의 대표작이라고들 하는<상실의 시대>는 그의 단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더불어서 내가 지금도 가끔 즐겨 읽는 책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독서습관 이라는 게 있기 마련인데 나 같은 경우는 평소 유난히 애정을 느끼고 있는 작가의 책이거나 작가와는 상관없더라도 한번쯤 가슴을 뒤흔들었던 문장을 간직하고 있는 책은 반복해서 여러 번 읽는 편인데 하루키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상실의 시대>는 언제 어디서 어떤 부분을 읽든지 아직까지도 나를 즐겁게 해주는 책 중의 하나이다. 

 

어떤 날은 단 몇 시간 만에 한 권을 다시 뚝딱 읽어 치우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내가 좋아하는 한 부분-그러니까 몇 페이지 안 되는 분량을 읽으면서 하루를 보내기도 하며.

 

그래서 그런지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책은 책꽂이에 꽂혀져 있는 다른 책들에 비해서 유난히 낡아 있고 다시 그 중에서도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에 전혀 힘을 들이지 않아도 책장이 저절로 넘겨질 만큼 낡아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와타나베가 고베의 아미료로 나오코를 찾아갔던 부분인데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고 그만큼 자주 즐겨 읽는 부분이기도 하다.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오래도록 마음이 머무는 부분이란 표현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싶게.

 

그러고 보면1989년도에 발행된 이 책을 그 비슷한 시기에 구입한 이후 지금까지 정말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를 정도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단어가 이끄는 문장들이 새로운 하나의 영상을 만들곤 하는데 가끔 그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어쩔 때는 소설의 한 장면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기억의 한 부분을 재생시키고 있는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심지어는 그곳,고베의 아미료-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거닐던 길목-에 내가 함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잡목 숲을 거닐고 있는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모습과 함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의 모든 이미지들이 떠올려진다.

음과 양의 선명한 대비처럼 초원과 숲의 경계에 쏟아지는 가느다란 빛 이라든가 쓰다듬듯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그때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살짝 몸을 비틀며 나뭇잎들이 토해내는 탄식 같은 떨림.

 

늦여름에 죽은 매미가 바삭하게 말라 흩어져있는 소나무 숲을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거닐고 있는 모습이 아른거리고 그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밑에서 들려오던 사각사각 소리가 세상의 모든 적막을 거부하는 작은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던 작은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 오르면 그때까지 가을볕을 어깨에 걸치고 아무 말도 없이 앞장서 걷고 있던 나오코가 조용히 뒤를 돌아다 보는 모습.

그리고 곧 이어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은 나오코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내 귓가를 간질인다.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내가 존재해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요.

 







 

 

사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고 특히 이 부분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이유 같은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여 누군가 이유 같은 걸 물어본다면 문학적 작품의 완성도가 어쩌구 하면서 폼을 잡기보단 보단 아마 왠지 분위기 있는 소설이잖아!’정도의 간단한 대답쯤은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이상의 의미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책을 읽다 보면 한쪽한쪽 책장을 넘길 때마다 왠지 모르게 울컥한 심정이 들곤 한다.

“..나를 기억해 주세요…”그동안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했던 부탁이 종소리처럼 마음에 작은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 책 <상실의 시대>가 내 책꽂이에 꽂혀져 있길 십 수년.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책의 서두에 이 소설을 통해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그려내 보고 싶었다’,고 분명히 밝혔지만 나는 이 소설을 통해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사랑>이란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이미지가 만들어내던 분위기에 매료 되어 있었고 하루키식 문체에 흠뻑 빠져있었으며 책에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들-돌격대부터 시작해서 미도리라든가 레이코여사등 쉽게 만날 수는 없지만 꼭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내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다는 것 .또 그러다 보면 그들을 만날 수 있진 않을까 하고 가끔 말도 안 되는 기대나 상상을 해보며 약간의 즐거움을 느꼈던 그런 소설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17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의 원제 이기도 하다)이 흘러나오는 기내에 앉아 나오코를 떠올리며 그녀의 기억이 희미해지면 희미해질수록 좀 더 많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와타나베의 심정처럼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오래 전의 어느 날 이후 이제서야 이 소설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만 같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때로는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이 되어 마음 속에서 성을 쌓기도 하는데 그 성이 견고해지기 위해선 심장처럼 끊임없이 뛰고 있는 시계 바늘 속에 수많은 상념과 눈물을 녹일 줄 알아야 하는것일까.

 

어렴풋한 느낌 같은 것들이 자꾸만 형태와 색을 바꿔가며 가끔 혼란에 빠뜨리긴 했지만 결국은 이 책에서 하루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사랑이었음을 이제서야 알 것만 같다.

불완전한 퍼즐을 맞추듯 기억의 부분부분을 짜맞추며 그렇게 그 안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와타나베를 떠올리면 다시 한번 더 사랑이란 것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이해한 사랑을 와타나베에게 다가가 나즈막히 속삭여주고 싶다. 정작 아미료에서 나오코가 했던 말들이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꺼낸 말들이었는지 모를 만큼 나오코의 사랑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또 그녀가 자신을 사랑조차 하지 않았다고 믿으며 청춘을 세월저편으로 흘려 보내놓은 와타나베에게.

 

 

 

나오코를 이해한다면 그녀의 사랑도 이해해야 해요.

비록 그녀는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오코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듯이

사랑하는 방식이나 표현의 방식도 다를 수가 있는 거에요.

생각 해 보세요..

이미 죽음이 드리워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던 한 여자가

자신의 삶에 마지막 일 것이 분명한 한 남자에게 과연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자신을 잊지 말고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달라는 부탁을 할 수는 없는 법이에요.

 

그녀에게 사랑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성화 같은 것이 아니지요.

한번 타올랐다가 작은 흔적으로만 남는 모닥불일지라도

그녀에게는 타올랐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사랑인 거에요..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흔적만으로도 타올랐던 순간을 쉽게 기억해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녀는 어떤 흔적이든 간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알 수 있겠어요?

그녀가 그런 식으로 당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래요..나오코는 누구보다도 당신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에요.

나를 기억 주었으면 해요..”

죽음이라는 흔적을 당신 가슴에 남기고선

두고두고 당신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랬던 거에요.

그녀에겐 그것이 사랑이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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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몇번이나 읽었는지 모릅니다. 질리지 않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과 함께한 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읽고 싶은 마음이 끓어 오르는 군요. 또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동생한테 전화해서 언넝 가져오라 해야겠군요.^^;

사비나 2007-09-06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짱돌이님의 이 글에 대한 느낌..읽었어요.
같은 책에 비슷한 느낌을 갖는 사람이 있다는거..
읽으면서 참 반가웠다죠..

김난주번역의 노르웨이의숲이 있고
유유정의 상실의시대가 있는데
역시 번역에 따라 글의 느낌은 달랐어요.
(김난주번역은 그때만 해도 꽝이었어요..쉬잇~!^^)
90년대 초였던가..하루키붐이 일기 한참전에 이 책을 만났었는데..
원어로 읽어보고 싶단 욕심에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었다는
참 용감한 시도를 했었던 기억이 나요..

이궁,.하루키 얘기하니까 길어지네요.참아야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