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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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평소에 크게 마음언저리를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행여 길을 가다가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쉽게 돌아서지 못하게 되는 인연이 있다.
가던 방향을 잠시 잊어버리고 두 눈을 반짝이며 ‘크게 무리가 되지 않으면 차 한잔 어떠겠냐’,고 내 쪽에서 먼저 권하게 되는 사람.

차 한잔 함께 마시면서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왜 이 사람을 그동안 만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눈을 맞추고 있는 내내 좋은 느낌을 갖게 해 주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인연은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깊은 겨울밤 나뭇가지위로 소복하게 쌓이는 눈송이 같다.
다음 만남의 어떤 기약도 하지 않고 손을 흔들어도 결코 이별은 없을 거라는 가녀린 예감 같은 것이 마음속에서 잔잔한 평화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윤대녕의 소설은 내게 있어 우연히 마주치면 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그러한 인연과도 같다 

지난7월,분당의 영풍문고에서 윤대녕의 소설집<제비를 기르다>를 만났다.
지금은 분당매장을 정리한 덕에 분당으로 출근할 일이 없지만 그때만 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매장일 때문에 분당으로 출근하곤 할 때였다.

대휴근무라도 할 경우는 바깥 날씨조차 파악할 수 없는 꽉 막힌 매장에서 10시간 이상을 버티면서 벌떡증(?) 때문에 한숨을 쏟아내기도 하며.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벌떡증’을 감수해낼 수 있을 만큼의 즐거움하나가 오히려 밋밋한 생활에 탄력을 주기도 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같은 건물 안에 영풍문고라는 기막힌 산책코스(?)가 있다는 것인데 대형서점이 자신이 일하고 있는 건물 3층에 있어서 읽고 싶었던 책을 수시로 찾아볼 수 있고, 누군가에게 선물할 책을 고르며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긴다는 것,또 그때마다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손바닥위에 올려놓은 듯 그 사각거리는 종이의 촉감을 싱싱하게 느껴보는 것이 얼마나 설레는 일이었는지 오히려 그 때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찬찬히 서점 안을 걷다보면 두껍게 깔려진 카페트가 발소리 뿐 만이 아니라 가슴을 어지럽히던 우울함까지 흡수해버려서 조금 더 웃을 수 있었던 시간들.

사람마다 제각기 서점에서 만나는 신간 중에 눈에 띄는 순간 어떤 망설임도 없이 구입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
그것도 책의 내용이나 간간히 읽게 되는 서평과는 상관없이 그저 시야에 꽂히듯 들어오는 작가의 이름 하나만을 보고.

글보다는 그 글을 쓴 작가가 좋아서 구입하게 되는 책이 있고 작가는 별로지만 작가가 내뿜어 내는 글 빨에 매혹되어 구입하게 되는 책들.

책을 선택하는 이유에서 전자,후자의 동기가 사뭇 대립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오랜 시간 만나온 친구를 대하는 마음과도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슴속에 오랜 시간을 두고 찬찬히 쌓아온 믿음 같은 것이 애정이 되어 앙금처럼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들은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만나든 불편하지 않다고나 할까.

내겐 파울로 코엘료와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국내 작가로는 윤대녕과 김영하의 책들이 그렇다.

특히 윤대녕.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의 작품들을 만날 때, 이번엔 윤대녕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냈을까 하는 생각 같은 건 거의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윤대녕의 작품들 이구나,로 시작해서 읽는 내내 윤대녕스러움에 푹 빠져 있을 뿐이다.

소설‘제비를 기르다’는 칠월이 저물어가는 어느 오후,분당 매장을 정리할 무렵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찾은 영풍에서 우연히 만난 윤대녕의 책이었다.
(어떤 망설임도 없이 이 소설책한권을 카운터로 가져가며 적잖은 설레임에 가슴이 콩콩거렸던 것을 기억한다.계산을 하기위해 줄을 서있는 동안 출간된지 꽤 된 소설인데 왜 그동안 이 책이 눈에 뜨지 않았을까,그제서야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하며. )

<누가 걸어간다>이후 3년만에 출간된 소설집인 이 책에는 ‘제비를 기르다’를 비롯해서 8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그의 대부분의 글들이 그렇듯 이번 소설집역시 윤대녕 특유의 감각적인 표현들과 삶의 평범한 한 자락에서 그가 쏟아내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글 곳곳에서 숨 쉬고 있다.

특히 이번 단편집은 그가 그려내고 있는 삶의 방식과 그 속에서 어우러지는 인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층 더 깊어진 그의 내면을 엿보는 것만 같은데 그것은 ‘그동안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하는 상상을 내 멋대로 하게 만들곤 했다.

독특한 구성이나 기막힌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소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그의 글들.
하지만 그의 글을 읽고 있자면 난데없이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고 있는 것만 같아 잠시 책을 덮고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윤대녕은 독자의 느끼게 될 그러한 감정을 이미 예상이라도 했었던 걸까.
작가후기에 남겨진 그의 말이 가슴에 사무치며 긴 여운을 남긴다. 

길을 잃으면 안되겠기에 보다 숨을 낮추고 되도록 말을 꺼렸다.

 그렇게 생의 한가운데를 어두운 숲처럼 더듬더듬 관통하면서

나는 '그 모든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 그리움을 자주 체험했다.

삶의 정체는 결국 그리움이었을까? 



                                                                               그의 소설들은 내밀하고 매혹적이다.

                                                                       저항하고 싶다가도 아름다워서 다는 못한다.

내가 너무 일상적이 되어가는 거 아닌가, 관계들이 이렇게 시시할 수가 있나 좌절감이 들 때,

일부러 그의 소설들을 찾아 읽을 때가 있다.

그는 사소한 개인을 신화적으로 이끌 줄 알아서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나도 너도 사뭇 소중하고 장엄해지는 것이 은근히 살아갈 맛이 생겨난다.

윤대녕스러운 것에 이미 얼마간 중독이 되어 있는 이들에게도

'고래등', '탱자', '마루 밑 이야기' 같은 작품이 실어나르는 깊이있는 인간에 대한 성찰은

중독자가 되길 잘했다는 은근한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 신경숙 (소설가)

 

 

 

'인생이란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잠깐 스쳐지나가는 빛을 바라보는 것.

따뜻한 강물처럼 나를 안아줘.

더 이상 맨발로 추운 벌판을 걷고 싶지 않아.

당신의 입속에서 스며나오는 치약냄새를 나는 사랑했던거야,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거라고 내게 얘기해줘.가

끔은 자유와 이상과 고독에 대해서도 우리 얘기해.

화병처럼 나는 주인만을 사랑해.나도 너의 주인이 되고싶어.

당신이 먼저 잠든 밤마다 나는 이렇게 한줄씩 쓰고 있어요.-'못구멍' 中

 

 

생에는 화해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도 엄연히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그토록 악마처럼 굴던 삶이

오히려 나에게 관대한 점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삶을 완수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다는 건 얼마나 갸륵하고 오묘한 사실인가 -‘고래등’中

 

 

그저 찰나를 못버텨 미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또한 사람의 일이지 싶다-편백나무숲 쪽으로中

 

돌이켜보니 나는 그 양철집을 좋아했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주소를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작년에 무슨 일로 근처를 지나가 생각이 나서 부러 들러보았는데

그 집은 당연한 일인 듯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거대한 휴게소가 들어서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이든 무엇이든 흔적없이 사라지게 마련인 모양이다.

나는 휴게소에 들어가 앉아 커피를 마시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릴 적 그 어둑한 방에 누워 우박처럼 듣는 빗소리를 듣고 있을 때처럼. -고래등中

 

 

희뿌연 어둠속에서 문희가 내게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몹시 지쳐 보였다.

 집으로 가는 막차 안에서 아버지가 또 타령조로 말했다.

"장차 너도 알게 되겠지. 사는 게 얼마나 고독한 행사인가를." -제비를 기르다中

 

 

제비가 찾아올 때까지 어머니는 턱을 괴고 앉아 마루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른들로부터 종종 지청구를 먹거나 걱정을 샀다.

계집 아이가 벌써부터 무언가를 그리워한다고 말이다.

계집아이는 나중에 커서 고독해지거나 또 남을 고독하게 할 팔자라고 했다.

아홉살 되던 해는 무려 보름이나 늦게 제비가 돌아왔는데,

열흘째 어머니는 기다림에 지쳐 자리에 앓아눕고 말았다.

읍내에서 의원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진맥을 본 뒤 나직이 혀를 차며 말하길,

상사병이라 했다.

외할아버지는 못 들은 척 헛기침을 하며 방에서 나가버렸고

이마에 식은깜을 흘리며그런 요 위에 누워 있는 어린 딸을 흘겨보며

외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의원이 가방을 들고 일어나려는 터에, 어머니가 빨갛게 실눈을 뜨고 물었다.

  "의원님, 강남이 어디여요?"-제비를 기르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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