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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남한강편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즐겨 읽는 기행문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여덟 번째 이야기를 읽었단다. 여덟 번째 이야기는 남한강 편이란다. 이번 시리즈도 유익한 글이 많이 실려 있고, 당장 이 책에 소개된
곳을 달려가고 싶게 만들었단다. 이 책을 쓰신 것은 2015년이란다. 유홍준 님께서 답사하시고 나서도 한참 시간이 흘렀으니 또 그 모습들이 얼마나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남한강이라고 하면 아빠는 신륵사 앞쪽에 넓게 흐르는 그 강만 생각이 났단다. 그래서
그 근처의 문화 유산을 들려주나 싶었지. 그런데 남한강의 상류가 강원도 산골짜기까지 이어진 것이 당연한
것인데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구나. 그래, 저렇게 큰 강이면
당연히 상류가 있겠지… 남한강 역시 많은 지류가 있고, 그
상류가 강원도 영월까지 이어지게 된단다. 그리고 영월에 있는 유명한 한 동강과 서강이 남한강의 상류라고
하는구나.
오, 그랬구나… 영월에
여행 갔을 때 동강과 서강을 보면서도 그 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생각해 보질 않았는데 말이야. 거기서
본 강물이 남한강을 거쳐 한강을 거쳐 서해 바다까지 긴 여행을 하는구나. 영월에서 본 강물을 서울에서
다시 봤을 수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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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한강은
태백산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 도도한 강줄기를 이루며 서울을 가로질러 서해로 흘러드는 한반도의 젖줄이다. 그중 한강의 본류는 남한강인데,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서해에
이르는 물길은 약 500킬로미터에 이른다.
남한강에는
수많은 지류가 실핏줄처럼 퍼져 있어 상류로 올라가 각 고장을 지날 때마다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남한강의
상류는 크게 두 줄기로 흘러내려 영월에서 만난다. 그것이 영월의 동강과 서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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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의 상류를 설명하면서, 영월의 문화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주천강 요선정, 마애불, 법흥사, 김삿갓 묘, 그리고 청령포까지… 우리가
작년에 청령포에 간 적이 있었잖아. 거기 가기 전에 이 책을 읽고 갔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희들한테 좀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고 말이야.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멀리 청령포까지 쫓겨왔다가 결국 어린 나이에
죽음까지 당한 단종… 이 청령포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생각만 하면 단종이 너무 불쌍하고, 그 이후에 환생해서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구나. 단종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도 다루었는데 친일파로 변절한 이광수가 변절하기 전에 쓴 <단종애사>를 유홍준 님께서 소개를 해주셨단다. 이 책이 일제 시대 독립투사, 친일파, 일제를 비유해서 썼다고 하는구나. 끝까지 그가 변절하지 않았다면 더 명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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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01)
이렇게
쓰인 그의 <단종애사>는 당시 독자들이 식민지
현실에 빗대어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은 일제의 이등박문을, 삼촌 손에 억울하게 폐위당하고 죽은 단종은 고종 순종을, 사육신
생육신은 독립투사를, 수양대군과 한패가 된 정인지 한명회는 이완용 조병준 등의 매국노를 연상시키는 뚜렷한
작중인물 설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춘원 이광수는 “과연
춘원이로다”라는 찬사를 받았다는데 나는 그의 명작을 이 이상 소개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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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한강 줄기를 따라 이번에는 단양, 제천, 충주의 비경과 문화 유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이 곳도
예전에 우리가 몇 번 여행을 해서 익숙하구나. 충주호에서 유람선을 타면서 비경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단다. 너희들이 어려서 기억을 못할 수도 있지만, 너희들도 충주호 유람선을
탔었거든. 아빠도 와, 그냥 멋있다고 했었는데, 알면 보인다고… 이 책을 읽었으니 기억력에서 사라지기 전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구나. 책의 내용을 까먹으면 가기 전에 다시 한번 읽어보고 가도 좋고…
이 지방에 관련된 사람들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는데, 그 중에 조선
중종 때 단양군수를 했던 황준량이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싶더구나. 피폐해진 고을을 살리기 위해 쓴 상소문의
내용이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글이었어. 오늘날 지방단체장들이 한번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이 지역에는 노래로 유명한 박달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곳이 조선말 황사영 백서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이 은거하면서, 백서를 쓴 곳도 이곳이라고 하는구나.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아빠가 좋아하는 정약용도
유배를 가게 된 사실만 알았는데, 황사영 백서가 엄청 작은 글씨로 엄청 많은 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단다. 흰 비단에 붓으로 썼다고 하는데 그 크기가 정말 작았고, 한자로 된 글자수가 무려 1만
3311자라고 하니 대단하구나. 실제 사이즈의 글자 크기로 책에 실려 있는데, 정말 대단한 정성이 담겨 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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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황사영 백서’는 길이 62센티미터, 너비 38센티미터의 흰 비단에 극세필 붓을 사용하여 먹으로 쓴 깨알 같은 글씨 1만 3,311자로 이루어진 장문의 편지이다. 누구든 이 편지를 보면 내용을
둘째 치고 그 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울산 대곡박물관에서는 ‘천주교의 큰 빛, 언양’이라는
기획전을 하면서 이 황사영 백서의 정밀 복제본을 전시했는데 박미연 학예사의 말에 의하면 천주교인들은 그 내용보다 깨알 같은 글씨는 보면서 울먹이며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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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단양 8경 중에 도담삼봉이라는 곳이 있단다. 세 개의 바위섬인데, 아빠도 정도전의 호가 이 도담삼봉에서 유래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고 하더구나. 단양 분들이 들으면 별로 안 좋아하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 가치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덧붙이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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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삼봉집>에는 이외에도 삼봉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 위치를 보면 삼각산이 맞다고 했다. 이런 논증은 단양 사람들에게 서운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오서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허구를 사실로 끼워맞추다보면 더 큰 허구만 낳는다. ‘한때 정도전의 삼봉이 도담삼봉으로 알려졌다.’고 한 걸음만 양보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런다고 도담삼봉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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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시 남한강을 따라 와서 원주와 여주 지역을 이야기해주었단다. 충주에서
원주에 오는 길에는 여러 폐사지를 답사를 했는데, 거돈사터, 법천사터, 흥법사터, 청룡사터, 고달사터를
이야기해주었단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보니 그리 유명하지 않아서 그 이름들이 낯설었단다. 그렇게 폐사지 답사를 하고 마지막 여정으로 여주 신륵사를 소개했단다.
여주 신륵사는 많이 유명한 절이고, 아빠도 참 좋아하는 절이란다. 절도 절이지만, 신륵사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의 경치가 좋기 때문이다. 아빠가 처음 갔을 때 남한강 건너편에 백사장이 있어 무척 좋았단다. 유홍준
님께서 말씀하신 그 경치가 아빠의 옛 기억과 함께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졌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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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신륵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강변 사찰이다. 절집이라면 대개 깊은 산중이나 시내에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남한강변의 높직한 절벽 위에 자리잡은 신륵사는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내려다보며
여봐란듯이 가슴을 젖히고 있다. 강물은 쪽빛으로 흐르고 강 건너 은모래 백사장은 눈부시게 빛난다. 그들이 말하는 신륵사의 아름다움이란 곧 신륵사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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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어떤 나쁜 사람이 강을 살린다 뭣 한다 하여 다 없어지고
말았단다. 참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천벌 받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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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
신륵사
절집 자체도 주변의 번잡함에 오염되었는지 절집의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일주문을 거대하게 세우고 단청도 요란하게 하면서 고찰의 모습을 잃어간 것이
너무도 아쉽다. 게다가 4대강 사업이 강행되면서 신륵사는
두 가지를 잃었다. 강월헌 건너편 은모래 백사장이 이제는 사라졌다. 그
아름다운 강마을을 대신한 고수부지식 석축엔 자전거길이 휑하니 뚫려 있을 뿐이다. 아, 그것은 너무도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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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남한강 줄기를 따라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강 특집으로 엮은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좋았단다.
그리고 책의 시작에서 강은 국토의 핏줄이라고 비유한 것도 참 좋았어. 남한강 말고도 우리나라에
큰 강들이 많은데, 그런 강들도 답사하면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내주셨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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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국토를
인체에 비유하면 산맥은 뼈, 들판은 살, 강은 핏줄이다. 산과 들은 국토의 골격을 이루고 강물은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강은
언제나 그렇듯이 유유히 흐르면서 국토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며 흐르는 강물은 여기에 살던 사람들의 애환을 침묵 속에 증언한다. 그리하여 강은 그 이름만 불러보아도 국토의 향기와 역사의 고동이 일어난다.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 한강, 금강, 낙동강,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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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국토를 인체에 비유하면 산맥은 뼈, 들판은 살, 강은 핏줄이다.
책의 끝 문장: 그러므로 장차 그 이름이 영원히 빛나며, 석종 탑비도 신륵사와 더불어
시종을 같이할 뿐만 아니라 이 여강과 저 달과 더불어 무궁할 것이다.
나는 최언위의 일생을 통해 통일신라가 왜 망했고 고려가 어떻게 새 왕조를 세웠는가를 생각해본다. 통일신라는 끝내 골품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지식인들을 여전히 6두품에 두어 아찬(阿飡) 이상 올라갈 수 없게 했다. 최치원이 제시한 ‘시무십조(時務十條)’라는 개혁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득권을 갖고 있던 보수적인 귀족들이 개혁은커녕 자신들의 보호막을 더욱더 두껍게 두르다가 종국엔 멸망의 길로 들어갔던 것이다. - P55
한국문화에 대하여 줄곧 애정 있는 충고를 해온 프랑스의 석학인 기소르망이 올해(2015) 6월 초, 한국외국어대에서 열린 특강에서 ‘한 국가의 문화적 이미지는 경제와 산업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가’며 이제 한국은 문화적 정당성을 인지하고 그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를 정해보라고 한다면 백자 달항아리를 심벌로 삼겠다고 했다. 기소르망은 모나리자에 견줄 수 있는 달항아리의 미적 가치를 왜 한국이 이미지 메이킹에 활용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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