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파인 씨, 유감스럽지만 당신 따님의 점심 도시락까지 싸줄 시간과 여유가 내겐 없군요. 우리의 뇌를 일깨우고 가족을 단합시키고 미래를 결정하도록 도와주는 촉매제가 음식이라는 점은 모두가 아는 바죠. 그런데……”


(21-22)

엘리자베스가 앞치마를 두르고 촬영장에 들어간 첫날부터 그녀에겐 뭔가가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뭔가는 뭐라 말하기 어려우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질이었다. 또한 그녀는 아주 실용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고, 헛소리라고는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다들 이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다른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사람 좋아 보이는 요리사들이 셰리주를 꿀꺽꿀꺽 마시며 방송을 유쾌하게 진행했지만, 엘리자베스 조트는 진지했다. 좀처럼 미소도 짓지 않았다. 농담하는 법도 결코 없었다. 그녀의 요리는 그녀만큼이나 있는 그대로였고, 아주 현실적이었다.


(75)

캘빈, 내가 배운 게 하나 있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복잡한 문제를 풀 때 언제나 간단한 해결책을 간절히 바란다는 점이야.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걸 믿는 편이 훨씬 쉽거든. 실제로 보이고 만져지고 설명할 수 있는 걸 믿기는 오히려 어려워. 말하자면 실재하는 자기 자신을 믿기가 어렵다는 말이지.”


(137-138)

물론 화학자이니만큼 캘빈은 징크스에 집착하는 행위가 전혀 과학적이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미신일 뿐이다. , 그렇다면 좋겠지. 하지만 인생이란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험할 수 있는 가설이 아니었다. 무언가는 반드시 폭발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캘빈은 엘리자베스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게 뭔지 항상 경계해왔다. 오늘 아침에도 그녀는 조정을 하다가 죽을 뻔했다.


(226)

좀 이따가 메이슨 박사님 진료 예약이 있어. 그 전에 이 책을 반납하려고. 네가 <모비 딕>을 좋아할 것 같아. 인간이 어떻게 다른 생명체를 계속해서 과소평가하는지 알려주는 이야기거든. 위험을 무릅써가면서 말이야.”


(339-340)

하지만 우리는 대개 일 때문에 낮잠을 생략하죠. 그러니까 제 말은 미국인이 그렇다는 뜻이에요. 멕시코 사람들은 이런 문제가 없어요. 프랑스나 이탈리아나 다른 어느 나라를 가도 점심시간에 우리보다 술을 훨씬 많이 마시고요. 인간의 생산성이 자연적으로 오후에 떨어진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에요. TV 업계에서는 이걸 가리켜 오후의 저기압대라고 부르죠. 뭔가 의미 있는 걸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인데, 그렇다고 집에 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에요. 주부나 4학년 어린애나 벽돌공이나 사업가나 전부 마찬가지죠. 나른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오후 1 31분부터 4 45분까지는 소위 말해 생산적인 삶이라는 게 사라져버려요. 이 시간은 사실상 죽음의 시간대란 말입니다.”


(341-342)

저녁 식사를 만드는 거죠. 바로 거기서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당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4 30분에 시작해요. 시청자들이 오후의 저기압대에서 슬슬 나오기 시작할 때죠.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의 가정주부가 이 시간대에 가장 심한 압박을 느낀다더라구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걸 해내야 하거든요. 저녁도 짓고 상도 차리고 애들도 데려오고 등 일은 끝이 없다고요. 하지만 여전히 기진맥진하고 우울한 시간이죠. 그래서 이 특정 시간대의 책임이 막중한 거랍니다. 누가 나와서 무슨 말을 하든 반드시 기운을 북돋워줘야 해요. 당신이 시청자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에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사람들을 다시 일상으로 끌어내줘요. 엘리자베스.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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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프렌즈 1 - 노희경 원작 소설
이성숙.노을 소설구성, 노희경 원작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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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몇 년 전에 재미있다고 소문난 드라마 한 편이 있었단다. 아빠는 안 본 드라마인데 찾아보니 16부작이라서, 그 드라마를 보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구나. 그렇게 알게 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우연히 인터넷 서점에서 제목이 같은 소설을 보았단다. , 이게 원작 소설이 있는 드라마였나? 싶어 책 소개를 읽어봤더니 그건 아니고 드라마가 먼저고, 드라마 시나리오를 소설로 재구성해서 책으로 낸 것이라고 하는구나. 그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는 유명한 노희경 님이고, 소설로 재구성한 분, 아니 분들은 이성숙 님과 노을 님이라는 분들이란다.

소설은 두 권이니까 드라마 16부작을 다 보는 것보다는 시간이 적게 걸리겠네. 이런 생각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단다.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을 확인해 보고, 소설을 읽을 때 소설 속 인물들과 배우들을 머릿속에서 매칭하면서 읽었더니, 머릿속에서 각 배우들이 연기하는 장면이 떠오르더구나. 대화하는 부분은 목소리까지 들리는 듯했어. 원래 드라마와 시나리오가 어땠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소설로도 잘 구성되어 있었단다. 원작이 소설이었다고 해도 될 만큼 자연스러웠단다. 예상했던 것처럼 책장도 금방금방 넘어갔고 말이야. 소설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은 그 중 1권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게.


1.

이 소설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그들을 엉키지 않게 잘 소개해야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구나. 천천히 소개해볼게. 주인공 박완. 작가와 번역일을 하고 있어. 3년 전까지 슬로베니아에서 여인 서연하와 함께 있었는데, 서연하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장애인이 된 이후에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왔단다. 애인이 사고 당하고 장애인이 되었다고 도망치듯 한국으로 온 것을 보면 참 못된 사람인 것 같지만, 엄마가 장애인하고는 절대 결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한국에 온 것 같았어. 하지만 여전히 서연하와 연락을 주고 받고 지내고 있단다. 서연하도 박완을 잊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이 장애인이라서 박완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한편, 박완은 힘들 때 의지하려고 만나는 남자가 있으니, 대학 때 잠깐 사귀었던 한동진이라는 선배란다. 그런데 한동진이라는 사람이 아내와 아이들은 외국에 있는 기러기 아빠라는 것.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막장 드라마인가 싶은데 중요한 것은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이들이 아니란다. 소설의 첫 문장에 나와 있듯이 주인공들은 박완의 엄마와 그의 친구들, 선후배들이란다.

...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의 주인공들을 소개할게.

장난희. 박완의 엄마. 인기 좋은 중국집을 운영하고 남편은 이미 세상을 등진 과부였어. 남편이 죽었지만 여전히 30년 전 남편이 바람 핀 일로 남편을 흉보며, 그 어떤 일보다 바람 피는 일이 가장 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란다.

오쌍분. 박완의 외할머니이자 장난희의 엄마. 네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치매인 남편, 장애인인 아들을 보살피고 있단다.

희자 이모. 난희의 선배. 얼마 전 남편 잃고 혼자 살고 있음. 아들만 셋이 있는데 그 중에 막내 민호가 가끔 보살펴주러 옴.

정아 이모. 역시 난희의 선배이자 희자 이모의 절친. 남편인 석균 아저씨와 세계일주 가는 것을 평생 꿈으로 안고 사는 사람.

충남 이모. 난희의 친구. 평생 솔로로 지냄.

영원 이모. 난희의 친구. 난희 남편이 바람 피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 해서 난희가 아직도 싫어함. 다행히 나중에 오해를 풀게 된단다. 영원 이모는 유명한 배우이지만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고 지금은 혼자 지내고 암까지 걸렸음.

, 대충 등장인물들을 다 소개한 것 같구나.


2.

이런 등장인물들이 나오니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얼마나 재미있겠니. 이 드라마, 아니 소설은 노년층을 주인공을 삼았다는 데 다른 드라마들과 다른 것 같았어. 그들도 여전히 사랑도 하고, 우정은 더 깊고, 삶을 대하는 방식도 진지하면서 즐길 줄 아는 그런 분들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소설이었단다. 그런 어르신들 사이에서 박완은 그들을 뒤치다꺼리를 하기도 하면서 불만을 쏟아내지만 그들의 일이라면 가장 먼저 앞장서고, 또 그들로부터 위안도 받고 조언도 받고 알게 모르게 삶을 배우기도 했단다.

그들 사이에는 보이는 않지만 따뜻함이 가득 느껴졌단다. 그들 사이에 우정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랑도 있었단다. 어렸을 때 희자 이모를 짝사랑했던 이성재 아저씨라는 사람이 있었어. 변호사이면서 겸손하고 멋진 분으로 나오는데, 아내를 잃고 혼자된 다음 희자 이모에게 데이트를 신청을 했단다. 그런데 충남 이모가 어렸을 때부터 성재 아저씨를 좋아했어. 삼각관계라면 삼각관계였지. 그런데 희자 이모에게 충남 이모가 더 중요했어. 그래서 데이트 신청하는 성재 아저씨를 외면하고 그랬어. 충남 이모도 성재 아저씨와 희자 이모의 관계를 알게 되고 쿨하게 양보를 하려고 했어. 그들의 귀여운(?) 삼각관계에서 애틋함이 느껴지는구나.

….

이 소설에서 가장 꼴불견인 캐릭터는 정아 이모의 남편인 석균 아저씨란다. 아내를 하인 부리듯 하고 여자를 무시하고 고집불통인 사람이었어. 정아 이모와 석균 아저씨에는 딸이 셋이 있는데, 첫째 딸은 입양한 딸이었어. 오래 전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입양을 했는데 그 이후 딸들을 낳게 된 거지. 다행히 대학 교수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었어. 아니, 잘 살고 있는 줄 알았지. 그런데 첫째 딸 순영이 남편한테 오랫동안 구타당하고 있었던 거야. 정원 이모가 이 사실을 먼저 알게 되고 정아 이모에게 이야기하고 순영은 이혼을 하고 미국으로 가기로 했단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석균 아저씨는 변호사인 성재 아저씨를 데리고 순영의 남편을 찾아가 기질을 발휘하여 5억을 뜯어내어 딸 순영에게 보내주었단다. 그 일을 하고 얼마나 자신을 뿌듯해 하는지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아내한테는 못된 남편이었지. 약속했던 세계일주도 안 가겠다고 했어. 결국 정아 이모는 남편과 따로 살겠다면서 집을 알아보러 다녔어. 정아 이모의 결정을 지지한 친구들이 같이 집을 알아보러 다녔단다.

….

박완은 엄마 난희와 사이가 좋았다 안 좋았다 했어. 박완 나이 정도 되었으면 엄마와 싸우는 것은 좀 줄어들 만 할 텐데, 여전히 소리 지르면서 엄마와 싸우고 자존심 긁는 소리도 하더구나. 어느 날은 말다툼하다가 30년 넘게 비밀로 간직했던 말까지 꺼냈어. 30년 전 왜 자신을 농약 먹여 죽이려 했냐고 물어봤어. 그 말에 난희는 충격을 받았지. 박완이 어렸기 때문에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사실 앞서 이야기한 남편의 불륜 때문에 딸과 동반자살하려고 했던 거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딸을 다시 살려냈지만 말이야. 그렇게 딸과 엄마는 숨겨둔 아픈 기억을 끄집어 내어 갈등의 최고조에 다다르게 된단다.

대충 1권의 중요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했는데, 그 밖에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단다. 어르신들의 생활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그런 소설인 것 같았어. 부모님들께 잘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전화를 하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로구나.

오늘은 이상 1권까지의 이야기를 하고 2권의 이야기는 조만간 할게.


PS:

책의 첫 문장: 내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쓰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책의 끝 문장: 나는 오늘 그날의 엄마 그림자를 그녀 앞에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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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 지음, 장영은 엮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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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나혜석.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화가이자 독립 운동가로만 알고 있다가 작년에 <방구석 미술관 2>라는 책에서 좀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래서 나혜석이라는 분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책을 알아보던 중 아빠가 예전에 사두었던 책 한 권을 책장에서 발견하였는데, 그 책이 바로 이번에 읽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라는 책이란다.

앞서 이야기한 <방구석 미술관 2>를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단편적으로 만났던 나혜석.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나혜석 님이 직접 쓰신 글들을 통해서 좀더 많이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구나. 그리고 그렇게 글을 시원시원하게 쓰셨을 거라 생각 못했는데, 그의 사라진 글들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구나. 이 책을 엮은 장영은 님이 쓰신 서문에 따르면 나혜석은 이혼 후에도 많은 글들을 쓰셨다고 하는구나. 아무래도 이혼이라는 경력 때문인지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그 글들은 한국전쟁이 나면서 없어졌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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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나혜석의 조카 나영균의 회고에 따르면, 나혜석은 이혼 이후의 수기를 어느 잡지에 연재할 생각으로 계속 글을 썼다. 다만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었다. 원고를 쌓은 높이가 적어도 50센티미터는되었지만, “원고더미가 다락에 쌓여만 있다가 6.25 전쟁이 나면서 난리 통에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그녀 자신도 새로운 글을 발표하는 것만이 사회적 재기의 방법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가능성은 차단되었고, 그녀는 조금씩 세상에서 잊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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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라진 나혜석 님의 글들을 읽지 못함이 아쉽구나. 그런데 위의 글을 보면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싶구나. 위의 글을 보면 난리 통에 없어졌다고 했지, 불 같은 것에 완전 소멸되었다는 표현은 아니구나. 그러니까 혹시 누군가 그것을 가져가서 보관하고 있다가 그 후손들이 보관을 하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단다. 어느날 그 글들이 짜잔, 공개되는 상상을 해보았단다.


1.

이 책에는 나혜석 님이 쓰신 열일곱 편의 글들이 실려 있단다. 그 유명한 <이혼 고백장>을 비롯하여 단편 소설들, 에세이들, 평론들이 실려 있었단다. 나혜석 님이 소설도 썼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단다. 나혜석 님이 살아온 길은 <방구석 미술관 2>를 읽고 쓴 독서편지에서 이야기를 했으니 오늘을 생략할게. 아빠도 기억이 잘 안 나서 그 내용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너희들도 혹시 기억이 잘 안 난다면, <방구석 미술관 2> 독서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렴.

나혜석 님의 소설 중이 <경희>라는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은 주인공 이름이 경희라고 되어 있지만, 나혜석 님의 경험과 거의 유사한 자전적 소설이란다. 일본 유학을 갔다가 방학 때 집에 왔는데, 부모님을 비롯한 친척 어르신들이 공부는 이제 그만 하고 결혼하라는 소리에 질려버린 주인공 경희의 이야기를 하고 있단다. 그렇다고 무조건 반항하는 것은 아니고, 자신의 유학을 다녀왔지만, 여전에 부모님께 예의 바르고, 하인들에게 친구처럼 잘 대해주고, 잘난 척 하지 않으면서 지냈단다. 단 하나 지금 당장 결혼할 생각, 그것도 부모님이 짝지어주는 사람과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야. 학교도 아직 다 안 끝났으니 마저 공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계속되는 아버지의 성화에 경희는 당차게 자신의 이야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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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아버지가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 하실 때에 그것은 옛날 말이에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에요.” 하던 생각을 하며, 아버지가 담뱃대를 드시고 뭐 어쩌고 어째, 네까짓 계집애가 하긴 무얼 해. 일본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아니 하고 귀한 돈 없애고 그까짓 엉뚱한 소리만 배워가지고 왔어?” 하시던 무서운 눈을 생각하며 몸을 흠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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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는 한 때 사랑 없이 결혼한 여자들을 불쌍히 여기기만 했는데, 그들을 경외심으로 바라보기도 했단다. 그래서 살짝 갈등을 하기도 했단다. 부모님의 뜻대로 결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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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2)

경희는 이제까지 비녀 쪽 찐 부인들을 보면 매우 불쌍히 생각하였다. ‘저것이 무엇을 알고 저렇게 어른이 되었나. 남편에게 대한 사랑도 모르고 기계같이 본능적으로 저렇게 금수와 같이 살아가는구나. 자식을 귀애하는 것은 밥이나 많이 먹이고 고기나 많이 먹일 줄만 알았지 좋은 학문을 가르칠 줄은 모르는구나. 저것도 사람인가.’ 하는 교만한 눈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늘은 그 부인네들이 모두 장하게 보인다. 설거지하는 시월이 머리에도 비녀가 꽂힌 것이 저보다 훨씬 나은 것도 같이 보인다. 담 사이로 농민의 자식들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저보다 훨씬 나은 딴 세상 같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저는 저 같은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고, 제 몸으로는 저와 같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저와 같이 이렇게 가기 어려운 시집을 어쩌면 그렇게들 많이 갔고, 저와 같이 이렇게 어렵게 자식의 교육을 이리저리 궁구하는 것을 저렇게 쉽게 잘들 살아가누.’ 생각을 한즉, 저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부인들은 자기보다 몇십 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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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딸>이라는 짧은 소설도 나혜석 님의 경험에서 나온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단다. 공부를 할 만큼 한 딸이 결혼할 생각은 없고, 어머니는 진작에 혼수자리를 봐두었고, 이로 인해 둘 간의 갈등을 그린 짧은 소설이란다. 딸은 어머니가 엄청 신뢰하는 김선생에게 부탁을 해서, 딸이 더 공부를 할 수 있게 중재하는 것으로 해피엔딩이었단다. 나혜석도 실제로 그렇게 여주에서 선생님으로 일하기도 했단다. 여주에서 선생님으로 지낸 경험담도 이 책에 실려 있단다.

<독신 여성의 정조론>이란 글은 여성도 독신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실제 독신으로 살고 있는 여성의 시각으로 글을 그렸고, <부처(夫妻)간의 문답>이란 글은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처가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남편과 나눈 대화를 희곡 형식으로 실었단다. 그러면서 조선 남자들은 생각과 행동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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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126)

다른 나라 남자들은 그러할지 모르거니와 굴레를 벗지 못하는 조선 남자들에게 진보가 있으면 몇 푼어치가 있겠소? 그중에도 되지 못한 것일수록 제 앞 하나 꾸리지 못하는 것이 언필칭(말을 할 때마다 이르기를) 여자가 어머니 어떠니 하는 것을 보면 참 아니꼬와. 3년 전에 먹은 오례송편이 다 나올 듯하지. 실상 학식 있고 인격 있는 남자들이야 다 자기 앞을 꾸려 가려기에 어느 여가에 여자 타령할 여유가 있답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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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신을 쫓아다니던 김우영과 결혼한 나혜석은 아이도 낳게 되었단다. 화가이면서 사회활동을 하는 나혜석은 자신이 엄마 노릇을 잘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된단다. 첫 번째 아이를 임신한 세상 모든 초보 엄마들의 고민이 아닐까 싶구나. 그런데 당시 다른 초보 엄마들과 달리 나혜석은 그런 자신의 감정을 글로 표현했다는 것이야. 힘들어도 숨기고 남들 하는 대로 그대로 하는 그런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솔직히 표현할 줄 아는 멋진 신여성이었던 거야.

아래 글을 읽어보면 엄마 노릇에 대한 고민과 아이 때문에 자신의 발전에 방해가 될 것 같다는 고민의 글들이 너무 솔직하구나. 당시 여자로써 아이가 자기의 발전에 방해가 될 것 같다고 솔직히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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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나는 분만기에 닥쳐올수록 이러한 생각이 났다. ‘내가 사람의 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러나 있기에 자식이 생기는 것이지.’하며 아무리 이리저리 있을 듯한 것을 끌어 보니 생리상 구조의 자격 외에는 겸사가 아니라 정신상으로는 아무 자격이 없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품이 조급하여 조금조금씩 자라 가는 것을 기다릴 수 없을 듯도 싶고, 과민한 신경이 늘 고독한 것을 찾기 때문에 무시로 빽빽 우는 소리를 참을 만한 인내성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무지몰각하니 무엇으로 그 아이에게 숨어 있는 천분과 재능을 틀림없이 열어 인도할 수 있으며, 또 만일 먹여 주는 남편에게 불행이 있다 하면 나와 그의 두 몸의 생명을 어찌 보존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의 그림은 점점 불충실해지고 독서는 시간을 얻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 자신을 교양하여 사람답고 여성답게, 그리고 개성적으로 살 만한 내용을 준비하려면 썩 침착한 사색과 공부와 실행을 위한 허다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생기고 보면 그러한 여유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내게는 군일 같았고, 내 개인적 발전상에는 큰 방해물이 생긴 것 같았다. 이해와 자유의 행복된 생활을 두 사람 사이에 하게 되고, 다시 얻을 수 없는 사랑의 창조요 구체화요 해답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행복과 환락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어찌나 슬펐는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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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아이를 만나기 전 이야기이고, 아이를 만나면 모든 것은 아이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엄마 아닐까 싶구나. 나혜석도 마찬가지였어. 아이가 태어나서 뭘 안다고 젖꼭지를 물려고 할 때, 이젠 너 다 가지라고 하는 나혜석 님의 글에서 웃음이 나오면서도 엄마로써 사랑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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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그리하여 저 소유자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으레 제 물건 찾듯 이 불문곡직하고 찾는구나. 나는 웃음이 나왔다. “세상 일이 이다지 허황된다……” 하고. 그리고 에라 가져가거라.”하는 퉁명스러운 생각으로 지금까지 맡아 두었던 두 젖을 그 쪼그만 소유자에게 바쳤다. 그리고 그 하회를 기다리고 앉았었다. 그 쪼끄만 주인은 아주 예사롭게 젖꼭지를 덥석 물더니 쉴 새 없이 마음껏 힘껏 빨고 있다. 내 큰 몸뚱이는 그 쪼그마한 입을 향하여 쏠리고 마치 허다한 임의의 점과 점을 연결하면 초점을 달하듯 내 전신 각 부분의 혈맥을 그 쪼그마한 입술의 초점으로 모아드는 듯싶었다. 이와 같이 벌써 모()된 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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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중에 이혼을 하고 나서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이들이었단다. <이혼고백장>을 잡지에 투고할 만큼 자기 주장이 뚜렷했던 나혜석도 이혼에 앞서 가장 큰 걱정은 아이들이었단다. 살을 에이고 뼈를 긁는 듯한 고통이라고 썼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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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207)

이혼 사건 이후 나는 조선에 있지 못할 사람으로 자타 간에 공인하는 바이었고, 사오 년간 있는 동안에도 실상 고통스러웠나니, 1, 사회상으로 배척을 받을 뿐 아니라 나의 이력이 고급인 관계상 그림을 팔아먹기 어렵고 취직하기 어려워 생활 안정이 잡히지 못하였고, 2, 형제 친척이 가까이 있어 나를 보기 싫어하고, 불쌍히 여기고, 애처로이 생각하는 것이요, 3, 친우 지인들이 내 행동을 유심히 보고 내 태도를 눈여겨보는 것이다. 아니다, 이 모든 조건쯤이야 내가 먼저 있기만 하면 이겨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보다 내 살을 에이는 듯 내 뼈를 긁어 내는 듯한 고통이 있었나니 그는 종종 우편배달부가 전해 주는 딸 아들의 편지이다. ‘어머니 보고 싶어하는 말이다. 환경이란 우습고도 무서운 것이다. 환경이 일변하는 동시에 과거의 공적은 공()이 되고 과거의 사실만 무겁게 처져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따라다니는 과거를 껴안고 공에서 생()의 목록을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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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책에는 나혜석 님의 좋은 글들이 많이 실려 있어서 너희들에게 많이 소개해주고 싶구나. 오스카 와일드의 글을 인용하면서 동양사람들은 나이를 생각하기 때문에 쉬 늙는다고 했는데, 나혜석 님이 이 이야기를 한 지 10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그 말에 공감이 가는구나. 아빠도 나이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 놈의 관념 때문에ㅎㅎ 앞으로 더욱 나이는 신경 쓰지 말아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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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아니지, 몸이 늙어 갈수록 마음은 젊어 가는 것이야. 오스카 와일드의 시에도 몸이 늙어 가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젊어 가는 것이 슬프다고 했어, 그러기에 서양 사람은 나이 관념이 없이 언제까지든지 젊은 기분으로 살 수 있고, 동양 사람은 늘 나이를 생각하기 때문에 쉬 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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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관계의 변화에 대해서 삼단계로 정리한 글이 있는데, 그 글도 오늘날 부부에게도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공감이 갔단다. 배우자에 대해 좀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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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164)

부부간에 어떻게 하면 화합하게 살 수 있을까. 일 개성과 타 개성이 합한 이상 자기만 고집할 수 없는 것이외다. 다만 극기를 잊지 마는 것이 요점입니다. 그리고 부부 생활에는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사외다. 1, 연애 시기의 때에는 상대자의 결점이 보일 여가 없이 장처(長處, 장점)만 보입니다. 다 선화(善化) 미화(美化)할 따름입니다. 2, 권태 시기, 결혼하여 3, 4년이 되도록 자녀가 생()하여 권태를 잊게 아니 한다면 권태증이 심하여집니다. 상대자의 결점이 눈에 띄고 싫증이 나기 시작됩니다. 통계를 보면 이 때 이혼 수가 가장 많습니다. 3, 이해 시기, 이미 부()나 처()가 피차에 결점을 알고 장처도 아는 동안 정의(情誼)가 깊어지고 새로운 사랑이 생겨 그 결점을 눈감아 내리고 그 장처를 조장하고 싶을 것이외다. 부부 사이가 이쯤 되면 무슨 장애물이 있든지 떠날 수 없게 될 것이외다. 이에 비로소 미와 선이 나타나는 것이요, 부부 생활의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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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소개하고 마칠게. 사회적으로 활동을 많이 하고, 자신의 좋지 않은 사생활에 대해서도 다 공개하는 그런 자세 때문인데 나혜석 님에 대해 나쁜 평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나 봐. 그런 평들을 향해 시원하게 내놓은 글이 있는데, 명문이로구나. 나혜석 님에게 나쁜 평을 했던 사람이 이 글을 읽고 반론을 하지 못했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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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271)

최후로 씨게 요망하는 바는 나도 신여자로 자처한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신인이라고 해 주는 것을 별로 영광으로 알지 않는다 함이외다. 나는 사상가도 아니요, 교육가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종교가도 아니외다. 다만 사람의 탈을 썼고, 여성으로 태어났으며, 사랑으로 살아갈 도리만 찾을 뿐이외다. 혹 다른 때 인연을 맺게 되더라도 명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씨여 사상적 방황이란 그다지 못한 일이오니까? 방황해야만 할 때 방황치 말라는 것은 못된 일이 아니오니까? 그다지 조바심을 하여 걱정할 것이야 무엇 있으리까? 방황도 아니 하고 고정부터 하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화석의 그림자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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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님의 글들 몇 편 소개하는 것으로 짧게 쓰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이 글도 보여 주고 싶고, 저 글도 보여 주고 싶다 보니 글이 길어졌구나. 나중에 커서 너희들이 이 책을 읽고, 나혜석 님의 당당함과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921 3 19일 나혜석의 전시회가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열렸다.

책의 끝 문장: 또 사회에서는 문학자이면 문예 애호자들끼리, 음악 애호가는 음악 애호자들끼리 모아 자유로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하는 자리를 많이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먹고 입고만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알아야 사람이에요. 당신 댁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가 시집가서 시앗(첩)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여편네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하고 싶었다. - P30

아버지가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 하실 때에 "그것은 옛날 말이에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에요." 하던 생각을 하며, 아버지가 담뱃대를 드시고 "뭐 어쩌고 어째, 네까짓 계집애가 하긴 무얼 해. 일본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아니 하고 귀한 돈 없애고 그까짓 엉뚱한 소리만 배워가지고 왔어?" 하시던 무서운 눈을 생각하며 몸을 흠찔했다. - P59

얼마 있지 않은 동안에 어찌 알겠소마는 몇 번 활동사진에서 보니까 한번 마음에만 들면 비록 유부녀 유처자라도 목숨을 바쳐 가며 끈기 있게 사랑을 할 줄 알며, 한 번 틀리는 일이 있으면 언제 알았더냐시피 씩 돌아서면 고만이고 대담스러운 단념심이 구비하였습니다. 묘년(妙年, 스무살 안팎의) 여자를 유혹해 내는 수단도 용하거니와 미남자의 꾀에 빠지지 아니하는 피신 수단도 또한 용합니다. 그만치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남녀 교제라도 재미있을 것이요, 의미가 있고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을 것입니다. - P129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 동양 사람이 서양을 동경하고 서양인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반면에 서양을 가 보면 그들은 동양을 동경하고, 동양 사람의 생활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자기 생활에 만족하는 자는 없사외다. 오직 그 마음 하나 먹기에 달린 것뿐이외다. 돈을 많이 벌고 지식을 많이 쌓고 사업을 많이 하는 중에 요령을 획득하여 그 마음에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외다. 즉 사람과 사물 사이에 신(神)의 왕래를 볼 때뿐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외다. - P163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이 어찌 될지 모릅니다. 속 마디를 지은 운명이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쇠사슬이외다. 그러나 너무 비참한 운명은 왕왕 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케 합니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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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나의 글들 속에 담겨 있는 가장 훌륭한 모든 것들에 영감을 주고 부분적으로는 그것들의 저자이기도 한 그녀, 진리와 정의에 대한 높은 식견으로 내게 늘 아주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주었고, 그의 칭찬이 내게 최고의 보상이 되었던 나의 친구이자 아내였던 나의 사랑하는 그녀를 기억하고 비통해하며 이 책을 그녀에게 헌정한다.


(32-33)

자유권력의 갈등한 인류 역사 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아주 오래된 것들,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와 로마와 영국의 역사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하지만 옛적에는 그러한 갈등은 신민들, 또는 신민들 중 몇몇 계급들과 정부 간에 존재했기 때문에, 자유라는 것은 정치적인 지배자들의 폭정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했다. 지배자들은 필연적으로 피지배자들에 대해 적대적인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그리스의 몇몇 대중 정부들을 제외하면). 지배자들은 한 사람의 지배자일 수도 있었고, 한 지배 부족이나 계급일 수도 있었다. 그들의 권력은 세습 또는 정복으로부터 생겨났다. 그 권력은 어떤 경우에도 피지배자의 이익을 위해서 행사되는 일은 없었다. 그 권력의 압제적인 행사를 방지하기 위한 사전조치들이 취해질 수 있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 절대적인 권력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처음부터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38)

따라서 공권력의 폭정을 막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적인 여론이나 정서의 폭정도 막아야 한다. 또한 사회가 공적인 처벌 이외의 다른 수단들을 사용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념들과 실천들을 그들의 행위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방식과 부합하지 않은 개성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형성되는 것조차 차단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인격을 사회가 정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도록 강제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집단의 의사가 개개인의 독립성에 합법적으로 간섭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규정해서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독재를 막는 것만큼이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적절한 여건을 조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50)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만이 아니라 하지 않음으로써도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둘 중의 어느 경우이든 자신이 깨친 해악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하지만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후자의 경우에는 전자보다 훨씬 더 큰 신중함이 요구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 경우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해악을 미연에 끼친 경우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해악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가 아니라 예외적으로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방지를 못한 책임이 너무나 중대해서 예외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충분히 명백한 경우가 많이 있다.


(54-55)

이러한 사상가들의 개별적인 신념과 주장을 차치하고라도, 오늘날의 세계 도처에서는 사회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여론의 힘을 통해서, 그리고 심지어 법의 힘을 빌려서 개개인을 부당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경향이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다. 사회의 권력을 강화시켜서 개개인의 힘을 약화시키고 잠식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변화들과 경향성은 그대로 놓아두면 저절로 사라질 해악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정반대로 점점 더 힘을 얻어서 가공할 만한 일이 되어갈 해악이다. 권력자의 자격으로서든, 아니면 동료 시민의 자격으로서든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행위규범으로 강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성향은 인간 본성에 수반되는 몇몇 가장 좋은 감정들과 가장 나쁜 감정들에 의해서 아주 강력하게 밑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권력을 빼앗는 것 이외의 방법으로는 거의 통제하기가 불가능하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재앙을 막아줄 수 있는 강력한 도덕적 신념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 권력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현재의 상황이 지속되는 경우에는 사회의 권력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59)

하지만 한 개인의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것이 심각한 해악이 되는 이유는 그런 행위는 현재의 세대만이 아니라 미래의 세대들까지, 그리고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찬성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인류 전체에게서 중요한 것을 빼앗아버리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 견해서 옳은 경우에는, 인류는 오류를 진리로 대체할 기회를 빼앗긴 것이다. 그 견해가 틀린 경우에는, 오류와의 충돌을 통해서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고 더욱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유익한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65)

인간은 토론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경험만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고, 반드시 토론이 있어야 한다. 토론은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틀린 의견들과 실천들은 사실과 근거에 의해 점차 밀려난다. 하지만 사실들과 근거들이 인간의 지성에 어떤 효과를 미치기 위해서는 지성 앞에 호출되어야 한다. 사실들이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말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실들이 지난 의미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이 필요하다.


(91)

어떤 결론이 도출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지성이 이끄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사상가의 첫 번째 의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위대한 사상가가 될 없다. 진리와 관련해서 인류가 점점 더 발전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이미 옳다는 것이 증명된 의견들을 늘 좋아가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갖춘 후에 스스로 사고해 나가다가 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들을 범하는 사람들이다.


(108)

기독교가 18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 그 세력을 더 이상 확장해 나가지를 못하고서, 여전히 거의 유럽인들과 유럽인들의 후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주된 이유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보여주었던 그런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기독교의 교리들을 일반 신자들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믿고, 그 교리들 중 많은 것들에 상당히 큰 의미를 부여하여 엄격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지성 속에서 그런 식으로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여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교설은 칼뱅이나 녹스, 또는 그들 자신의 품성이나 성향과 비슷한 점이 많은 어떤 인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설일 뿐이다. 반면에, 그리도소의 교훈들은 그들의 지성 속에 수동적으로 공존해서, 아주 기분좋고 상쾌한 말들을 들었을 때 같은 효과만을 낼 뿐이고, 그 이상의 효과를 그들에게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109-110)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데에는 토론의 기회가 없었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들도 있다. 진리들 중에는 사람이 직접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될 때까지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에 그런 진리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면, 사람들은 그 진리들이 지닌 진정한 의미에 대해 훨씬 더 깊이 각인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심도 제기되지 않게 되는 경우에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을 그만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르는 잘못들 중 절반은 그들의 그런 경향에서 비롯된다. 우리 시대의 한 작가가 확정된 결론이 불러오는 깊은 잠이라고 말한 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115)

지금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이 먼 미래의 일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인류의 지성이 아주 높은 수준에 진입할 때까지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토론이 벌어지는 것이 유익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이 유익한 주된 이유들 중 오직 두 가지 경우에 대해서만 고찰해왔고, 나머지한 경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언급하지 않았다. ,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경우 중 하나는 기존의 정설이 틀리고, 어떤 다른 의견이 옳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였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정설이 옳을 때, 반대자들의 틀린 반론들이 기존의 정성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더욱 명료하게 알게 해주고 우리의 지성 속에 더욱 깊이 각인될 수 있게 해주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는 경우였다.


(126-127)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가 불신자들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게 하고자 한다면, 그들 스스로 불신자들을 정당하게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덕적으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소중한 가르침을 설파하는 상당수의 저작들이 기독교 신앙을 알지 못했거나, 또는 알면서도 배척했던 사람들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에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진실과 진리를 추구한다고 할 수 없다.


(170)

하지만 지금은 이 사회가 사람들을 강제해서 동질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가 완성되지 않아서, 아직은 빈 구석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개성의 가치와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일깨우는 일을 하기에 적절한 때는 바로 지금이다. 모든 것은 초기에 바로잡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비슷해져야 한다는 이 사회의 요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모든 사람의 삶이 하나의 정해진 형태로 획일화된 후에, 거기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그 획일적인 삶의 형태로부터 벗어난 모든 것들은 불경스럽고 비도덕적이며, 심지어 본성을 거스르는 기괴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다양성을 보지 않은 채로 한동안 살아가다보면, 아주 신속하게 다양성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218-219)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직 한 개인 본인에게만 직접적인 해악이 돌아가는 많은 행동들을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규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 중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경우에는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행동들의 범주에 속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행동들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정당하다. 예의범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이 그 예다. 그 문제는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개인이 사적인 공간에서 행했을 때에는 그 자체로 그 어떤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행동들 중에도, 공공연하게 행해진 경우에는 사회에 의해 규제를 받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231-232)

모든 사람에게는 오직 자신과만 관련된 일들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행할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일이 곧 자기 일이라는 미명 아래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할 때에 자기 마음대로 행할 자유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오직 한 개인에게만 관련이 있는 일들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소유하고 있는 권한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하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행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사람의 다른 모든 관계들을 다 합한 것보다 더 중요한 가족 관계에서는 국가의 그러한 의무가 거의 완전히 방기되어 있다.


(234-235)

국민에 대한 교육의 전부 또는 상당 부분이 국가의 수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것에는 반대한다. 개개인의 개성, 그리고 의견과 행동방식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내가 지금까지 말해온 모든 것 속에는, 교육의 다양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이미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 국민을 대성으로 한 획일적인 국가 교육이라는 것은 국민을 하나의 틀에서 서로 똑 같은 사람들로 찍어내고자 하는 술책이다. 그리고 국가를 장악하고 있는 지배 권력이 왕이든, 성직자이든, 귀족 계급이든, 다수의 기성세대이든, 그 틀은 지배 권력이 자신의 뜻대로 결정한다. 따라서 국가 교육이 효과적이고 성공을 거두는 정도에 비례해서, 국민의 정신은 지배권력에 의해 장악되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신체도 장악당하게 된다.


(243)

이런 일들에서 정부의 개입이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들 중에서 세 번째이자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정부의 권력을 불필요하게 키워주는 것은 큰 해악이 된다는 것이다.  정부가 이미 하고 있는 기능들에 또 하나의 기능이 추가될 때마다, 시민들의 희망과 두려움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은 점점 더 확대되고, 시민 중에서 적극적이고 야심이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정부나 집권여당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당에 목을 매는 자들로 변질되어갈 수밖에 없다.


(252-253)

정부가 개인의 노력과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고 촉진시키는 활동이라고 해도, 그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 정부가 개개인과 집단들의 활동과 역량을 이끌어내는 대신에, 그들이 해야 할 활동들을 정부 자신이 하고, 정보를 제공하고 조언해주며 때로는 경고를 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잘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대신에, 그들에게 족쇄를 채워서 그런 상태에서 일하게 하거나, 그들을 옆에 세워두고서 그들의 일을 직접 나서서 할 때, 폐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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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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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엄마가 우리 집에 <아노말리>란 책이 있냐고 물어봤어.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책 제목이라서 없다고 했지. 그리고는 무슨 책인가 검색해봤단다.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이더구나. 이 역대 공쿠르상 수상작 중에 가장 많은 판매를 기록한 책이기도 했대. 평점들도 좋고그래서 잽싸게 구해서 아빠가 먼저 읽어보았단다.

소설 제목 <아노말리>는 이상, 변칙, 모순이라는 프랑스 말이란다. 이 책을 읽을 때 책 소개도 안 보고, 리뷰도 안보고 읽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책을 다 읽고 책 뒷면에 책소개을 읽어보니 그 책소개도 읽어보지 않고 책을 읽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만큼 책에 대한 내용을 최대한 모른 상태에서 읽은 것이 재미를 더한 것 같구나. 이 정도 이야기하면 너희들도 무슨 큰 반전이 있는가 보다 하겠구나. 반전이라기 보다는 중간에 예상치 못한 설정이 나와서 책장 넘기는 속도는 더 빨라지게 되더구나.

이 책의 지은이는 에르베 르 텔리에라는 사람인데, 아빠의 기억력으로 지은이의 이름을 오랫동안 외우기는 쉽지 않겠구나. 소설 제목도 낯선 외국어라서 기억하기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아무튼 아빠는 참 재미있게 읽었단다. 아빠의 취향에 잘 맞았다고 할 수 있지.


1.

소설의 시작은 블레이크라고 하는 사이코패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단다. 그래서 범죄스릴러 소설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기 시작했어. 블레이크라는 이름은 본명을 아니고, 스릴러 소설가 이름에서 따온 가명이었어. 그는 청부 살인을 하기 시작했는데, 사전에 철저한 준비로 늘 완전 범죄였단다. 블레이크는 그렇게 청부 살인을 하지만, 겉으로는 평범한 가정을 가진 사람이란다. 그의 본명은 조. 주변 사람이나 가족들은 그를 평범하지만 성공한 사업가로 알고 있단다. 플로라라는 아내가 있고, 아이도 둘이 있단다. 처음에는 블레이크라는 가명을 썼지만, 청부 살인이 늘어나면서 20개가 넘는 가명을 만들었단다. 얼마 전 청부 살인을 위해 파리발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가 난기류로 고생한 적이 있었단다.

빅토르 미젤이라는 별로 안 유명한 작가가 있단다. 자신의 작품은 별로 없고, 번역으로 근근이 먹고 살고 있는 50대 남자란다. 몇 년 전 첫눈에 반한 여인을 잊지 못하고 있는 순정남이기도 해. 그런데 그 여인을 어떤 모임에서 스쳐 지나듯 만난 거라서 이름도 모르고 이젠 얼굴도 가물가물해. 빅토르는 얼마 전 미국에서 번역상을 받게 되어 뉴욕행 비행기를 탄 적이 있단다. 그 비행기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낄 만한 난기류를 경험했어. 빅토르는 파리로 돌아와서 번뜩 떠오른 영감으로 소설 <아노말리>를 썼단다. 하지만 당시 빅토르는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고, 소설을 다 쓰자마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단다. 그런데 그 소설이 대박이 났어.

뤼시라는 영화 편집자가 있단다. 미녀이고 아이가 있는 미혼모였어. 뤼시를 따라다니는 앙드레라는 사람이 있었어. 뤼시도 앙드레에게 아주 마음이 없는 건 아니라서 데이트도 했단다. 데이트한 장소 중에 한국 식당도 있더구나. 굳이 한국 식당에서 데이트를요즘 전세계적으로 한식이 유행이라고 하더니 거짓말은 아닌가 보구나. 이런 소설에서도 한국식당이 등장하는 걸 보니앙드레가 미국 출장을 갈 일이 있어서 뤼시도 함께 갔었는데, 그때 엄청난 난기류를 만나서 고생했단다.

아빠가 등장인물을 한 명씩 소개해주고 있는데, 마지막은 거의 비슷하구나. 엄청난 난기류를 만났다. 너희들도 예상했겠지만, 등장인물들은 모두 같은 비행기를 탔던 거야. 파리발 뉴욕행 비행기.

그 비행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뤼시는 얼마 후 경찰이 찾아오기까지 했단다.


2.

뉴욕에 살고 있는 데이비드는 몸이 안 좋아서 의사인 형을 찾아가 검사를 받았단다. 검사 결과는 최악이었단다. 췌장암 4. 너무 늦게 발견되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급격하게 악화되어 죽고 말았단다. , 이 사람도 그 비행기를 탔던 사람인가?

클라크라는 미국 군인이 있었어. 아내는 에이프릴이고 리엄과 소피아라는 아이들이 있었어. 클라크는 무척 엄하면서 무서운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단다. 그들은 파리로 가족 여행을 갔다가, 클라크를 제외한 에이프릴, 리엄, 소피아만 비행기로 뉴욕으로 돌아왔단다. 바로 그 난기류가 엄청났던 비행기. 얼마 후 FBI가 그들을 찾아와 그들을 데리고 갔단다. 조애나라는 젊은 변화사도 그 비행기를 탔었는데 마찬가지로 FBI가 찾아왔단다. 슬림보이라고 하는 나이지리아 출신 R&B 가수도 그 난기류 심한 비행기를 탔었어. 슬림보이는 최근에 엄청난 인기를 얻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단다. 그도 FBI가 찾아와서 데리고 갔어.

….

지금까지는 비행기 탑승자들 중 일부를 이야기 주었는데, 이번에는 비행기를 타지 않은 사람이 나온단다. 에이드리언이라고 하는 MIT 교수이자 확률전문가였어. 대학원 다닐 때 그가 내세운 가설 때문에 비행기 사고 관련 정부 비밀 요원이라는 직함도 있었는데, FBI의 호출을 받았어. 그가 오랫동안 비밀 요원으로 있으면서 호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단다. 그만큼 긴급 상황이라는 거지. 에이드리언이 간 곳에서는 FBI뿐만 아니라 정보 모든 주요 부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단다.

비밀 공군기지에 파리에서 온 보잉787기 비상 착륙해 있다고 했어. 그런데 비행기에 탄 사람들, 그러니까 기장, 부기장, 승객들 모두가 이미 세 달 전에 동일한 비행기를 타고 착륙했었다는 거야. 그리고 그들은 오늘 날짜를 세 달 전인 3 10일로 알고 있다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갑자기 소설은 SF로 점프를 했단다. 똑같은 비행기가 똑같은 승객을 태우고 3달 뒤에 또 나타났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 정보와 FBI는 이런 일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할지 모르고 일단 사람들은 감금시켜 놓았단다. 그리고 3개월 전에 탑승했던 사람들을 찾아 불러보았던 거야. 그런데 이 비행기의 기장인 데이비드는 이미 죽었다고 했어. 앞서 아빠가 등장인물 소개할 때 췌장암 말기 환자인 데이비드를 소개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 비행기의 기장이었어.

승객들을 모두 격리하고 있었는데, 한 명이 빠져 나갔단다. 가짜 여권을 가지고 있던 블레이크. 아마 자신의 신분이 들통났다고 생각했겠지. 그는 그곳에서 빠져 나와 다시 다른 가짜 여권으로 파리로 돌아왔단다. 자신의 집에서 그는 무엇을 봤을까. 그래 3개월 정도 더 늙은 자신을 봤지그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아볼 생각도 없이 또 다른 자신을 죽여버렸단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갔단다. 연쇄살인마의 사이코패스가 무엇을 이야기하겠니.


3.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각계 각층 전문가와 종교인들이 모두 모였지만, 뾰족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단다. 그나마 설명 가능한 것이 소설이나 영화 속에만 이야기되었던, 이 세상이 프로그램화된 것이었어. 프로그램이 오류가 생겨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이야. 미국 정부는 더 이상 이 사실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공개하는 것을 준비했어. 먼저 당사자인 프랑스 정부에 이 소식을 알리고, 중국 정부에도 알렸단다. 그런데 중국 정부도 깜짝 놀랐어. 사실은 자신들도 두 달 전에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고, 여전히 그 진실을 숨기고 두 달 째 사람들을 감금하고 있었거든. 역시 중국답구나.

미국과 프랑스 정부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함께 일반인들에게 공개를 하기로 하고, 당사자들끼리도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단다. 그러니까 이 이상한 현상에 대해서 적응을 하자는 것이었지. 나랑 똑 같은 사람을 거울이 아닌 실물로 만나는 것은 기분이 정말 이상할 것 같구나. 어떤 이는 함께 협력하려고 하는 이도 있지만, 적대적으로 대하는 경우도 있었단다. 가족 구성원은 한 명씩인데 나만 두 명? 기분이 이상할 것 같구나. 아빠가 그런 상황이라면 멀리 떠나서 혼자 지낼 것 같구나.

그런데 그 세 달 사이에 자살을 한 빅토르 같은 이에게는 또 한번의 기회가 온 거야. 그리고 췌장암 4기인 빅토르는 어땠을까? 이번에는 한두 달 일찍 치료를 일찍 시작하였단다.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면 끔찍한 경험을 가족들에게 두 번 주게 될까?

….

소설은 그렇게 새로운 아노말리에 대해서 적응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이 났단다. 그리고 마지막은 예상 가능한 일이 하나 더 벌어지는 것과 함께….

독특한 설정의 소설이었고, 지은이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좋았단다. 이 세계는 정말 프로그램된 세상일까? 아빠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해 본 적이 있는데,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만 지구의 생태계를 프로그램 하는데 굳이 이 광활한 우주를 만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야. 지은이 에르베 르 텔리에의 작품 중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은 이 책이 유일한데, 나중에 출간되는 책이 있다면 또 읽어보고 싶구나.


PS:

책의 첫 문장: 누군가를 죽이는 것,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책의 끝 문장: “어 내 생도프 소 속 의 한 처 리 한 느 성과 반 많 자에 ㅇ ㅣ  ㅎㅑㅇ ㅁ1 ㅇ ㅏ ㅁ ㅇ ㅅ ㄹ ㄲ ㅡ 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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