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다리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8
천선란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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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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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최근에 좋아하게 된 작가 천선란 님의 이전 작품을 찾아보다가 알게 된 책, <무너진 다리>를 읽었단다. 천선란 님은 SF 소설에 감성적인 요소를 자연스럽게 녹여 소설을 쓰셔서 SF 소설이지만 늘 따뜻한 느낌이 난단다. 그래서 좋아하게 되었단다. 이번에 읽은 <무너진 다리>는 다른 작품들보다 좀더 정통적인 SF 소설이라고 할까, 먼 미래에 우주와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단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소설의 이야기를 해줄게.

때는 2087. 아빠가 앞서 먼 미래라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리 먼 미래는 아니구나.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후 정도니까 말이야. 아무튼 그 때 지구는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곳으로 바뀐 것 같아. 요즘 지구 이상 기후 현상을 보면 소설 속 모습이 완전 허구 같지 않아 가슴 아프구나. 어쩌면 소설보다 더 빠른 시기에 지구는 인간이 살지 못하는 곳이 될 수도 있어.

주인공 이아인. 아인의 엄마는 임해인이라는 아주 유명한 과학자였어. 인공지능을 가진 안드로이드 개발자인데, 휴론이라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안드로이드를 개발한 사람이야. 하지만, 임해인은 췌장암에 걸려 일찍 죽고 말았구나. 아인의 아빠는 그보다 한참 전인 휴론이 나오기 2년 전에 의문의 살인 사건으로 돌아가셨어. 그리고 아인에게는 동생 아라가 있었어. 이름이 아인, 아라다 보니 자매인 것 같지만, 그들은 형제였단다. 아라는 유명한 수영선수였는데, 교통사고 이후 하반신을 못쓰게 되었어. 그러니까 수영을 다시는 할 수 없었지. 그래도 그때는 의료 기술이 발달하여 하반신을 휴론으로 대체할 수 있었어. 그런데 휴론의 하반신으로 대체하기로 한 날 하루 전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단다. 이렇게 아인의 식구들은 모두 불우한 삶을 살았구나.

아인은 우주비행사였어. ‘펄서라는 우주선을 타고, 지구 대체 행성인 가이아행성을 찾으러 탐험을 나섰지. 지구에서 사람들이 살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행성을 찾아 나선 거야. 그런데 가이아 행성에 도착을 해서 착륙을 얼마 앞 둔 시점에 유성과 부딪치고 사고로 정신을 잃고 말았어. 함께 탐사에 나섰던 휴론들에 의해 아인은 지구로 보내지게 된단다. 그렇게 정신을 잃었던 지구에 와서도 10여 년이 흐른 뒤에 눈을 떴어.

그런데 그렇게 눈을 뜬 아인은 이전의 아인이 아니었단다. 유성과 충돌 사고로 아인은 몸의 대부분이 망가졌고, 뇌조직만 간신히 살고 있었어. 그런 아인의 뇌를 휴론에 이식시키는 수술을 하게 되었어. 그런 아인이 의식을 찾은 거야. 그러니까 아인은 뇌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기관은 모두 휴론이었어. 이 존재를 아인이라고 할 수 있나, 하는 철학적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구나. 아인이 다시 눈 뜬 지구의 모습은 자신이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단다.

 

1.

아메리카 대륙이 파멸되었어. 무슨 일이 있었냐면, 중국과 러시아에서는 가이아 행성에 2차 우주선을 보내기로 했고, 그 우주선의 추진체로 핵로켓을 사용했어. 그런데 그 우주선을 쏘아 올리다가 잘못되어, 아메리카 텍사스 지역에 떨어지고 말았단다. 뜻밖의 사고로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사람들은 피할 겨를도 없이 모두 죽고 말았어.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생명체들 대부분이 죽었지.

죽음의 대륙이 된 아메리카 대륙에 사람들을 보냈지만,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없었어. 그런 와중에 아인이 지구로 귀환했고, 아인의 뇌를 휴론으로 이식을 한 수술이 성공을 한 거야. 아인에게 한 가지 임무가 제안되었단다. 아메리카 대략을 탐사하는 일. 그렇게 아인은 죽음의 대륙이 된 아메리카 대륙에 홀로 가게 된단다. 아메리카 대륙에 살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단다. 사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아인은 그곳에서 어떤 할머니를 만나기도 했어. 다음날 돌아가시긴 했지만 말이야.

그런 폐허가 된 아메리카 대륙에 버려진 휴론들만 있었단다. 아인은 몇몇 휴론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어떤 한 휴론을 이야기했어. 그 휴론의 이름은 카인. 그 카인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고뇌하는 등 독특한 휴론이었는데, 카인은 버려진 800여 기의 휴론들의 리더였지. 휴론들도 진화를 했어. 단순한 안드로이드가 아닌 하나의 인격을 가진 개체가 되었단다.

아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라와 비슷하게 생긴 휴론을 만나게 되는데, 그 휴론은 아벨이라는 휴론이고, 아라의 배양세포로 만들어진 휴론이었어. 앞서 이야기했던 아라의 다리를 이식 받기 위해 만들어졌던 그 휴론이었어. 아인은 아벨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라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서 전해 들었단다. 수술 하루 전날 휴론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이야기. 이제서야 아라가 왜 자살이라는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어. 자신이 다리를 얻게 되면 아벨이 사라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지.

사실 아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온 이유는 우주선의 핵 로켓 엔진을 찾기 위해서였단다. 앞서 이야기했던 아메리카 대륙을 추락한 우주선의 로켓. 그 로켓이 있어야 다시 가이아 행성으로 가는 우주선을 만들 수 있었거든예전의 아인이라면 그런 일에 선뜻 동조하지 않았을 텐데, 휴론의 몸을 갖게 되면서, 그의 기억을 일부 조작을 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아인은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 아인은 휴론의 리더 카인을 만나고 카인과 휴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어. 그들도 하나의 개체로 살고자 했어. 그리고 아인이 찾으려고 했던 우주선의 핵 로켓 엔진을 그들이 잘 보관하고 있었어.

아메리카 탐사를 마치고 아인은 각국 정상들과 함께 휴론과 공존하는 방법을 제안했단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살릴 수 방법도 논의해 보기로 하고 말이야. 그래, 가이아 행성으로 떠날 것이 아니라, 지구를 다시 살려봐야지소설 속에 생명체가 못살게 된 지구는 오늘날 우리의 책임일 수 있어. 지금도 많이 늦었지만, 인류를 비롯한 다시 많은 생명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지구를 만들기 위해 모든 인류가 힘을 합쳐 노력을 해야 되는데 그런 노력들이 적은 것 같구나. 우리 지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 소설의 줄거리를 아빠가 아인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는데, 그 외에 반란군들의 이야기도 있고, 아인의 엄마 해인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도 있고, 다양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었단다. 그러니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되었지. 그 많은 이야기들을 서로 연결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낸 지은이 천선란 님은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 같구나. 이 소설은 더욱 천선란 님의 팬이 되게 한 작품이었단다.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이번에 2초나 단축했어요.

책의 끝 문장: 아프도록, 그 고름이 전부 나오도록.


인간은 원래 물에서 살았대, 아주 먼 옛날에는 말이야. 쇄골은 아가미가 있던 흔적이고 갈비뼈는 지느러미가 떨어지고 생긴 무덤이야. 그런데 인간은 결국 어떤 이유로 퇴출당한 거야. 육지는 해상의 유배지였던 셈이지. 그래서 물에 사는 것들은 육지에서 걸을 수 없지만 육지에 사는 것들은 유전자가 가진 태초의 기억으로 수영을 할 수 있어. 물로 몸을 씻어내는 것도 육지의 죄를 닦아내는 행위에서 비롯된 거야. - P41

인간의 치아는 음식을 씹어 삼키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내장은 피부보다 연약해 씹히지 못한 덩어리를 소화시킬 능력이 없었으므로, 어쩌면 ‘인간의 창조주’가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걸 다 집어넣지 못하도록 해놓은 장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 씹을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왜 치아를 만들었을까. 눈을 보호할 필요가 없는 진에게 속눈썹과 눈꺼풀은 왜 필요한가. 손등의 미세한 털과 귓바퀴의 굴곡, 복사뼈까지도. 그렇다면 이 모든 걸 같은데 인간은 쉽게 죽고 자신은 쉽게 죽지 않는 이유가 무석인가. 그 모든 질문의 끝에 진은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싶었다. ‘자신은 왜 이 질문을 하고 있는가.’ - P251

사랑은 이제 끊임없이 생명에게 기생해 수 세기를 살아남은 질긴 바이러스다. 그것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버려지지 않는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생명의 생각을 조종하는 것이다. 뇌를 커다랗게 감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막을 만들어 때에 맞춰 심장을 뛰게 하고 체온을 높이고 시각을 둔화시켜 현실의 객관성을 잃게 만든다. 상대방이 없을 때에는 기관지의 크기를 줄여 답답함을 느끼게 하고 잠들지 못하게 생각을 깨우며 상대방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최악의 망상을 반복해 함께 있음에도 갈증을 느끼게 만든다. - P329

개인의 비극은 행성을 파괴할 수 있는 슬픔을 가지고 있다. 섞이거나 나눌 수 없다. 인간은 개인이 하나의 행성이므로, 각자의 비극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결국 그 파괴의 에너지가 은하수 전체에 퍼질 테니. 연쇄적 비극은 언젠가 모든 것을 태초의 상태로 돌릴 것이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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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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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가끔씩 읽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이 시리즈는 유명한 작가들의 책뿐만 아니라, 잘 모르는(아빠만 모를 수도 있지만) 작가들의 작품들도 출간을 한단다. 그래서 이 시리즈를 통해서 새로 알게 되는 세계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있었어. 이번에 읽은 저메이카 킨케이드라는 분의 <루시>라는 책도 처음 알게 된 작가의 처음 들어본 책 제목이란다.

저메이카 킨케이드라는 작가는 앤티가섬이란 곳에서 태어났대. 앤티가 섬은 카리브해에 있는데 영국 연방 소속이라고 하는구나. 저메이카는 어렸을 때 뉴욕에 와서 입주 보모 생활을 했는데 그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 바로 <루시>라는 소설이란다. 저메이카는 주로 피식민지, 여성, 흑인, 이주민 등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래. 그렇게 소수자들과 약자들을 대변하는 작가이다 보니 해마다 노벨상 후보로 언급된다고 하는구나. 올해는 안타깝게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네.

 

1.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목과 같은 루시(루시 조세핀 포터)이고, 지은이 저메이카처럼 십대 후반의 나이에 오페어(입주 보모)로 일하게 된 장면부터 시작한단다. 루시가 일하게 된 집은 변호사 루이스와 가정 주부 머라이어 부부와 네 자녀가 있는 집이었어. 머라이어는 루시에게 친구처럼 잘 대해주었단다. 나중에는 루시가 머라이어를 엄마처럼 생각하기도 했어. 네 자녀도 말썽 피우지 않고 잘 지냈어. 그렇게 잘 지내다가도 루시 자신은 그들과 섞일 수 없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닫곤 했지. 루시에게도 꿈이 있어서 오페어로 일하면서 야간학교도 다녔단다.

그렇게 일도 하고 학교도 다니곤 하지만, 루시는 여전히 10대 소녀였어. 친구들과 만나 놀기도 하고,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한단다. 머라이어가 잘 해주지만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혼자 사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고향을 떠난 것은 루시 자신의 선택이었단다. 루시는 엄마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는 아들만 챙기고 자신을 홀대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었거든. 그리고 아버지는 바람만 피우고 집안일 돌보지 않는 완전 불량 가장이었단다. 엄마가 가장 잘못한 것이 아빠와 결혼한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런 집안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거지. 하지만 엄마의 마음은 또 그런 것이 아니지. 딸을 멀리 보낸 루시의 엄마는 자주 루시에게 편지를 보냈단다. 하지만, 루시는 답장은커녕 한 통도 뜯어보지 않았단다. 심지어 겉봉투에 긴급이라고 써 있는 편지도 열어 보지 않았어.

한달 뒤 루시의 엄마는 인편으로 소식을 전했어.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집안은 빈털터리가 되었다고그러니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말이야. 루시는 돈만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어. 자신은 자신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의지가 그만큼 강했어. 이런 장면을 지켜보던 머라이어는 루시에게 엄마를 용서해 주라고 조언을 했단다.

….

행복하게만 보였던 머라이어의 가족. 남편 루이스가 머라이어의 친구와 바람을 피고 이혼을 하게 되면서, 겉으로만 보던 게 전부는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단다. 머라이어는 이혼에 담담한 모습이었어. 루시는 1년 동안 한 보모 생활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아파트에 살기로 했단다. 자아를 찾아가기 위한 한 발자국을 더 나아간 것이라 생각해. 그리고 남자친구의 소개로 작은 회사에 다니기도 시작했어. 그렇게 그 큰 도시에 조금씩 조금씩 더 적응해가고 있었단다.

머라이어의 집을 떠났지만, 친구로 계속 연락했고, 몇 달 뒤에는 다시 만나기도 했단다. 둘의 우정은 계속 이어질 듯 하구나. 그리고 루시도 자신의 길을 잘 찾아갈 것 같고 말이야. 루시가 보모생활을 착한 머라이어의 집에서 한 것이 참 다행인 것 같구나. 물론 머라이어게도 루시 같은 보모가 와서 다행이었고 말이야.

책이 얇은 만큼 소설을 이렇게 끝이 났단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많구나. 이 책이 피식민지 유색 인종의 주인공이 백인의 주류 사회 들어와서 성장해 가는 모습 그런 소설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아빠는 루시와 머라이어의 우정이 더 기억에 남는구나.

, 오늘은 소설이 짧은 만큼 독서편지도 짧게 끝낼게.

 

PS:

책의 첫 문장: 첫째 날.

책의 끝 문장: 그 문장을 보자 수치스러움이 집채만한 파도처럼 나를 휩쓸어 난 하염없이 울었고, 공책에 떨어진 눈물로 잉크가 더 번져 글자들은 하나의 커다란 얼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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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철학자 강신주 생각과 말들 EBS 인생문답
강신주.지승호 지음 / EBS 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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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어려워하지만 동경하는 분야 중에 하나가 철학이란다. 그렇게 어려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그런 철학자들 중에 아빠가 좋아하는 강신주 님의 책을 읽었단다. 인터뷰어 지승호 님과 강신주 님이 나눈 대담을 책으로 엮은 것이니까 공저라고 해야겠구나.

책 제목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책 제목을 보면 이소라 님의 <바람이 분다>라는 노래가 자꾸 생각이 나더구나. 이 노래도 좋아했었는데 말이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강신주 님과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의 제목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철학자이자 시인인 폴 발레리(1871~1945) <해변의 묘지>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강신주 님 본인도 바람을 좋아하신다고 했어. 특히 산에서 느끼는 바람, 산에서 느끼는 바람은 아빠도 참 좋아하는데그런데 산에서 느끼는 바람을 싫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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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330)

저도 바람을 좋아해요. 제가 왜 산에 가냐면 산에서 느끼는 바람은 다르거든요. 더 정확히 말하면, 산에서는 수많은 바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산에 오르면서 몸이 뜨거워지고 땀도 나니까, 작은 바람도 쉽게 느껴지죠. 그래서 계곡으로 올라가지 않고 능선을 타요. 순간순간 바람이 불고, 비바람이 치고 이런 게 너무 좋아요. 그리고 산등성이에서 갑자기 구름 생기는 것 못 봤죠? 비 오는 날 산에 가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습한 날은 바람이 조금만 불면 등성이에 구름이 생겼다 없어졌다 생겼다 없어졌다 그래요. 그런 광경이 너무 예뻐요. 그게 정서적으로 저랑 맞는 것 같아요. 타르코프스키하고 미야자키하고 모네하고 정서적으로 맞아요. 바람을 모티프로 자기 얘기를 드러내는 것, 바람과 멀리 있는 문명과 바람과도 같은 자연, 우주적인 것들에 감수성이 있는 것 같아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폴 발레리(1871~1945) <해변의 묘지>라는 시 마지막 구절이에요. 시가 아주 철학적이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는 이 구절이 자막으로 올라가면서 시작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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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강신주 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몇 번 이야기한 것 같긴 한데, 그의 세상 바라보는 시각이 마음에 들고,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진정한 자유주의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아빠의 자유는 무엇인가 틀이 있는 자유라고 하면, 강신주 님의 자유는 사방이 뻥 뚫려 있는 자유 같았어. 그런 뻥 뚫린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말과 생각들은 시원함을 주었단다. 마치 산에서 부는 바람처럼 말이야.

작년에 강신주 님의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을 읽으면서 살이 쪽 빠진 모습에 건강을 걱정했었는데, 역시나 한동안 아프셨다고 하더구나. 구체적으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한 마디로 너무 무리를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이제는 마음이 아닌 몸이 걷고 싶을 걷고, 몸이 쉬고 싶을 때 쉬겠다고 하더구나. 아직 건강이 다 회복되신 것 같지 않은데, 얼른 회복하셨으면 좋겠구나. 아빠도 가끔 몸은 쉬고 싶어하는데, 머리가 시켜서 몸이 일을 하거나 책을 쓰거나 지금처럼 독후감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건강을 생각해서 좀 자제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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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몸의 시간은 정신보다 느리고 조심스럽고 그만큼 안정적이다. 아픈 몸도 마찬가지다. 아주 작은 벌레가 가는 듯 마는 듯 걷는 것 같아, 언제나 몸이 좋아질까 감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건강한 몸이 아파지는 것도 그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얼마나 집중도 높게 집필 작업을 했는지, 얼마나 정열적으로 강연을 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내가 몸을 힘들게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 말을 할 수 없는 몸이 퍼져버린 것이다. ‘너 이제 혼자 가. 나는 더 이상 못 가겠어.’ 몸은 몸으로 그리 표현했던 셈이다. 이제는 몸의 시간이었다. 몸의 마음에, 몸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어야 했다. 지금까지 나의 말을 묵묵하게 들어주었던 몸 아닌가. 이제는 내가 몸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어야 할 때였다. 몸이 걷고 싶을 때 걸을 것이고 몸이 쉬고 싶을 때 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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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터뷰어 지승호 님과 강신주 님이 열한 번을 만나 나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꿰뚫는 한가지 주제가 있어 보였단다. 자본주의 비판. 자본주의가 주류가 된 시점과 지구가 망가지기 시작한 시점이 똑 같은 것만 봐도 자본주의 시스템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란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시스템으로 발전하면서 그것이 지구를 망치고 있어도 버리지 못하는 시스템이 되어 버렸단다. 자본주의의 욕망이 모두 담긴 것이 바로 스마트폰이라고 이야기하셨단다. 편리하면서도 늪이 되어버린 스마트폰. 자본주의 시스템은 그 스마트폰을 우리보다 더 영리하게 사용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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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자본주의는 공동체에서 쪼개진 개개인들이 생계를 걸고 참여하는 게임 같은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보고요. 누군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필요를 만들 수 있는지를 분석해서 신제품을 만드는 것이 자본의 논리니까요. 그래서 빅데이터가 중요한 거예요. 노동자는 그 정보를 계속 빼앗기고 있고, 자본은 계속 그 정보를 축적하고 있단 말이에요. 플랫폼 기업들이 나보다 나를 더 잘 하는 사회가 됐어요. 내가 모르는 내 습관까지 알고 있어요. 내 나이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취미는 뭐고 관심사는 뭔지, 내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머물렀는지, 방문했던 사이트에서 무엇을 검색하고 구매했는지…… 내 흔적들이 당신이 좋아할 만한 책과 영화, 상품으로 광고 창에 뜨잖아요. 내가 남긴 소비의 흔적들이 플랫폼 기업의 자본이 되는 거죠. 소비자, 곧 노동계급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도록 강요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핵심 팽창 전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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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스마트폰은 나이 든 사람의 노련함과 경험을 빼앗아 갔단다. 예전에는 나이 든 사람으로부터 지혜를 얻는다곤 했는데, 요즘에는 스마트폰에서 검색만 하면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말이야. 이젠 나이 어린 손주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세상이 되었단다. 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풍경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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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자본주의사회는 나이 든 사람이 권력이나 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배울 게 없는 존재로 만들어놨어요. 기계 조작도 서툴고, 데이터 분석 같은 일들은 젊은 직원이 대신 해줘야 돼요. 권력이 있기 때문에 해주는 거예요. 사실 기계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가장 잘 다뤄요. 할머니 할아버지 스마트폰은 손주들이 다 세팅을 해주잖아요. 이 순간 손주들이 우외에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열등한 위치에 있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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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님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노동자를 노예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이야기를 하신단다. 하지만 그래도 노예보다는 낫지, 아빠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어지는 그의 글에서 노동자를 출퇴근 노예라고 부르고, 노예는 출퇴근이 불가능한 노동자라 이야기하시는 것에 빵 터졌단다. 그래 인정해 주자 ㅎㅎ. 난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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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거대 문명이 탄생한 기원전 3000년 이래로 지금까지 인류는 복종의 시대에서 5000~6000년 정도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분업 체제에 진입을 해서 이 사회 시스템을 벗어나서는 먹고살 수 없을 정도로 분업의 강도사 세졌어요. 자동차 바퀴만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생태운동을 할 수 있나요? 자동차가 존재해야 자기가 사는데, 산업화된 시스템에서 하나의 나사가 되지 않으면 생계의 위험에 빠지는 사회인 거예요. 타율적 복종에서 자발적 복종으로 바뀐 것뿐인데, 체제는 타율자율만 강조해서 자본주의사회가 왕조시대보다 더 발달했다고 얘기를 해요.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복종에 방점을 찍어야 돼요. 노동자를 정확하게 출퇴근 노예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면 노예는 이렇게 정의 내리면 되죠. ‘출퇴근이 불가능한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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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희들도 이제 학교 교육의 한 가운데에 있다 보니, 교육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더구나. 자본주의 체제하에 교육이라는 것이, 결국은 일 잘하는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틀에서 너희들을 끄집어낼 수 있는 용기도 없더구나.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살아가다 보면 순응하는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안타까워하면서 말이야. 스트레스 받지 않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데, 그게 가능할 지 모르겠구나.

강신주 님은 좋은 교육이라는 말은 모순적인 것이라면서, 교육 대신 성장이라는 말을 쓰자고 하더구나.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돕자는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해진 교과서가 아닌, 좋아하는 책을 읽게 하라고... 그런데 성장이라고 말을 바꿔도 성장이라는 것 또한 비교하기, 경쟁하기 딱 좋은 말처럼 들리는구나. 남들보다 더 성장해야 하고, 곧게 성장해야 한다면서 말이야. 교육이든 성장이든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은 쉽지 않은 숙제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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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철학적으로 말해서 좋은 교육은 모순적인 표현이에요. 교육은 나쁜 거예요. 기성세대든 억압세대든 자신의 말을 잘 듣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니까요. 더군다나 교육이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의미라면, 교육은 인문주의자가 목숨을 걸고 없애야 할 대상일 거예요. 교육이라는 말을 없애고 차라리 성장이란 말을 써야 할 것 같아요. 정확히는 성장을 돕는 거죠.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책과 교재는 다른 거예요. 교재 즉 교과서는 아이들을 졸게 만들죠. 반면 그 교과서 밑에 몰래 숨겨놓고 읽는 책은 그렇지 않잖아요. 선생님이나 부모가 읽으라는 교재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은 이렇게 차이가 있어요. 앞에서 저는 자신이 원하는 걸 하는 사람이 주인이고, 반대로 타인의 권위에 눌려 타인이 원하는 걸 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말했어요. 결국 교재는 노예의 문자고, 책은 주인의 문자였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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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즐겁게 하면서, 노예 같은 노동자가 아닌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옳은 말인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아빠도 자본주의 시스템에 푹 빠져 살다 보니 생각마저 굳어버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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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결국 아이들이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찾아주는 일,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만 한다면, 아이들은 이제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살아낼 수 있는 길에 들어선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리고 노력 없이 주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예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만, 그걸로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폭력 수단과 정치 수단을 독점했기에 국가는, 그리고 생산수간을 독점한 채 국가의 비호를 받기에 자본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찾은 아이들은 이미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아요. 그러니 국가나 자본이 땅에서 살기를 요구해도, 그들은 가급적 물을 떠나지 않으려 할 거예요. 한편으로는 자신을 노예로 만들려는 경향과 맞서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우리 아이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두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갈 거예요. 여기에 바로 인류의 희망과 미래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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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앞서 아빠가 이야기한 것처럼 강신주 님은 진정한 자유주의자란다. 강신주 님은 자유와 사랑을 동급으로 놓고 이야기를 하시곤 했어. 그래서 강신주 님의 이야기에 사랑이 또 빠질 수 없단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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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꿈꾸는 것을 이루려 한다면 억압체제에 저항하게 돼요. 왜냐하면 체제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요. 사랑과 자유는 항상 같이 가는 거예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과 자유가 아니면 뭐겠어요. 그 두 가지 내용을 가진 것이 인문주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예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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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자유를 하나로 생각하다 보니, 사랑이라는 정의도 자유와 엮어서 내리는데 옳은 말씀이란다. 그가 내린 사랑의 정의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를 사랑하는 것. 그야말로 자유주의자의 끝판왕이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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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를 사랑하는 거예요. 나를 좋아할 수도 있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는 온전히 주어졌을 때, 그때 나를 좋아해줘야 기쁘고 희열이 있죠. 스토킹은 그 사람의 자유를 제거한 상태에서 나만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자유를 제거하는 방법은 그 사람을 죽이는 데서 정점에 이르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는 타인의 쾌락과 즐거움은 중요하지 않고, 나의 쾌락과 즐거움만 있는 거죠. 개인주의적 자아는 자기 안에 갇혀서 쾌와 불쾌만을 따진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사람의 자유를 사랑한다는 말과 같아요.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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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좋은 말씀들도 많았는데, 오늘은 아빠가 몇몇 발췌해 놓은 글들을 소개해 보았단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칠까?


PS:

책의 첫 문장: 이 책의 머리말을 쓰기 위해 2013년에 발간되었던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프롤로그를 읽어보았습니다.

책의 끝 문장: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온다…… 글을 써야겠다!” 잘 돌보지 못해 미안한 내 몸이 너그럽게 허락한다면.


노예사회, 농노사회, 노동자사회, 본질적으로 진보한 것이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이들 다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만들지 못해요. 지금 노동자들이 아무리 농노보다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생산이 아니라 특정 소수, 부르주아들이 원하는 생산을 하고 있잖아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을 주인이라고 하고, 남이 원하는 것을 사람들을 노예라고 불러요. 고전적 정의예요. 질적으로 보면 아직도 억압사회인 거죠. ‘소비사회’라는 논리로 자본주의가 발달해야 되기 때문에 노동계급한테 소비자의 위상을 주는 거예요. 월급을 주고 물건 만들고, 또 그 돈으로 소비하고, 이 과정이 계속 돌면서 계속 월급쟁이 생활을 하지만, 과거 농노보다는 경제 사정이 좋죠.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예요. - P33

젊은 친구들을 만나서 즐거운 것은 놀랍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하고 얘기할 때 빵빵 터지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선순위에서 밀어놓은 것은 손주는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니까요. (웃음) 이상한 상상력을 가진, 새로움을 접하니까요. 젊다는 것은 새롭고 낯설다는 거예요. 어린아이들끼리는 서로 차별도 하지 않아요. 어린아이가 피부색이 다르다고 인종차별을 할까요? 그러지 않잖아요. 차별은 위계질서가 굳어지고 우선순위가 매겨진 기존 사회에서 물려받은 거예요.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그런 거죠. 새롭고 낯설게 생각하는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현실은 굉장히 슬픈 일인 것 같아요. - P65

간혹 가다가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살지도 않는 집을 하나 더 가지고 있으면서 임대료를 얻어서 생활을 한다고 해요. 그러고선 다들 그렇게 산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노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수익이 생긴다면, 그건 다른 누군가의 노동을 착취한 거예요. 임대료의 경우는 물론 주거가 불안한 사람들로부터 착취한 거죠. 작은 자본가고 작은 지주인 거예요. 그래서 속상하고 이런 사람들하고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큰 집에서 사는 건 상관이 없지만, 대신 집으로 임대료를 받으면 안 돼요. 그런데요, 집이 없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간혹 월세 등을 받아서 노후를 유지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죠. 이 경우는 조금 난감해요. 가족공동체가 와해되어서 돌봄이 필요한 분들이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니까요. 이런 서글픈 경우가 아니라면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 등으로 이윤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돼요. - P152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희망도 버려야 해요. 또 세상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비관도 버려야 하고요. 자본과 국가라는 구조적 악은 여전히 강력하게 거대한 요새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있어요. 이 요새의 문은 개개인의 노력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죠. 그렇지만,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문을 밀어붙어야 해요. 열리지 않더라도 그 문 앞에서 외쳐야 돼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저랑 함께 이 문을 밀어 열어젖힐 분 없나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 P256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는 구시대의 혁명을 주정해요.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는데, "구시대의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상전’의 교체가 아니라 ‘상전’이 없어지는 것, 개인의 자유와 정의로운 공동체를 스스로 주인이 돼서 만드는 것이 혁명이라는 얘기예요. 신채호가 간디보다 수천 배 위대한 이유죠. 상전의 자리에 일본인이 들어오든, 아니면 한국인이 들어오든 마찬가지예요. 상전의 자리에 어떤 권력자가 들어오든 마찬가지죠. 상전의 자리, 형식, 혹은 제도 자체를 없애지 않으면 안 돼요. 결국 신채호의 시선에서 촛불집회는 혁명일 수 없어요. 여전히 수많은 상전의 형식이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채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상전인 회사의 CEO가 있고, 자본가가 있고, 국가는 명령을 내리고 있고, 입법으로 그것을 강제하고 있잖아요.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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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08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bookholic 2022-12-09 00:03   좋아요 2 | URL
늘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막 금요일이 시작되었는데요, 즐거운 금요일 되시기 바랍니다~~^^
 















(68)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는 된다. 아버지는 잘 못 참는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 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봉건잔재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했다. 물론 두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얼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은, 굶어 죽을 뻔한 고통은,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은 동료들이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신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내려와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현실 인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102)

또 그놈의 오죽하면 타령이었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오죽해서 아버지를 찾는 마음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는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138)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 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148)

결과적으로 옳았든 틀렸든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 나는 불편한 모든 현실에서 몇발짝 물러나 노상 투덜댔을 뿐이다. 그런 내가 아버지를 비아냥거릴 자격이나 있었던 것인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미안했다. 들어오는 순간부처 나를 불편하게 한 아버지의 동지들은 목청 높여 아버지와 인연을, 조국통일에의 열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동지들의 장례식에 갈 때마다 참석한 동지들이 한둘씩 줄고, 십년쯤 지나면 누군가의 부고가 들린다 해도 갈 수 없는 몸이 될 사람들이었다.

 

(181)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

 

(184)

아버지는 죽음 앞에서 담담했을까? 인간의 시원은 먼지, 누구라도 언젠가는 그 시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불변의 과학이라 생각하는 사람답게 담담하게 맞이했을 것도 같고, 아는 것은 머리요, 정작 죽음이 닥쳤을 때는 머리만 바위 밑으로 디밀었다는 김일성대 출신의 엘리트처럼 공포에 떨었을 것도 같았다. 뇌출혈이었으니 죽음을 두려워할 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31)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 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 내 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48-249)

오십년 가까이 살아온 어머니도 아버지의 사정을, 남자의 사정을, 이제야 이해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잠이 더 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가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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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집필실에 앉았노라면 내가 채웠다가 비운 집필실들이 떠오른다. 진해와 논산과 대전과 파주와 서울의 그 방들은 잘 있을까. 작품에 따라 책상을 비롯한 가구 배치가 바뀌었고, 책장에 꽂힌 책들도 물론 달랐으며, 벽에 붙인 지도와 사진도 새롭게 얽혀들었다.

내 몸의 일부처럼 만든 집필실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곳을 비울 땐 허허롭기 그지없었다. 몸통이 빠져나간 뱀 껍질 같다고나 할까.


(48)

올해는 책을 두 배 적게 읽으려 한다. 예년의 절반만 읽겠다고 답하기보다 두 배 적게 읽겠다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양적인 팽창이 어느 순간에 이르면 질적인 변화를 동반하듯이, 양적인 수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는 것만큼이나 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간단한 걷어냄이 아니라 간신히 줄임을 감당하는! 인생에서 모처럼 두 배에게 가 닿았다. 나는 아직 이렇게 어리석다.


(72)

장편 작가는 미래를 사는 사람이다. 단편이라면 올해 쓰고 올해 발표할 수도 있지만 장편은 불가능하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최소한 3년은 걸리고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5년이나 10년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기에 장편은 이 계절의 유행이 아니라 삶의 본질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 치명적인 매력이자 기꺼이 감수하는 한계다.


(84)

농부는 흙을 믿기에 시금치를 솎는다. 시금치를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상의 쾌감을 열 배는 더 독자에게 주고 싶다. 그 상상이 엷어지고 저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엔 선입견과 오만이 깔려 있다.

솎아낸 시금치와 봄나물로 점심을 먹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시금치 중에서 맛과 향이 가장 진했다.


(108)

나무와 하늘이 반반인 세상에서 살고 싶다.


(117)

도돌이표처럼 들려온다. 평생 듣고 또 들어야 한다.

쉰 살 이쪽저쪽이니 어디에서든 폼 잡고 행세할 나이지. 1987년의 민주주의와 2002년 노무현 현상을 만든 자부심으로 가득한 이도 적지 않아. 하지만 2014년 우린 우리들의 흉측한 민낯을 봤어. 우린 자식들을 수장시킨 세대로 역사에 기록될 거야. 이 끔찍한 잘못을 등에 진 채 어떻게 남은 생을 속죄하며 살까 고민해야 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158)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직면하면 절망하거나 꿈꾼다고 한다. 나는 이 문장을 살짝 바꾸고 싶다. 절망과 꿈꾸기는 양분하여 택일되기도 하지만, 절망의 두께만큼 꿈을 꾸며 도약하는 이도 있다고. 도약과 성공은 절망이란 거름을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171)

물고기를 물살이로 바꿔 부르자고 내게 처음 제안한 이는 김한민 작가다. 그 제안은 나를 엉뚱한 상상으로 이끌었다. 인류가 육상에 살지 않고 강이든 바다든 수중생활을 한다면, ‘물고기란 이름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대신 육상 생물들을 통칭하여 육지고기혹은 땅고기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수중생활들은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도 제각각이지만, 단체행동과 함께 사생활도 즐기지만, 땅고기들은 수십 마리의 들소든 수백 마리의 갈매기든 외모도 똑같고 개성 따윈 있지도 않다면서! 용궁에 모여 이런 주장을 펼치는 장면을 판소리로 만들어볼까.


(252)

사체 곁에서, 이 도로에서 목숨이 끊긴 동물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을 생각한다. 그들이 이 길을 건너려는 이유는 다양하다. 먹이를 찾아서일 수도 있고 목이 말라서일 수도 있고 어미나 형제와 함께 가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예전에 무사히 지나갔던 길일 수도 있고 처음 가던 길일 수도 있다. 확실한 사실은 죽으려고 그 길을 건넌 동물은 한 마리도 없다.


(291)

농부는 빛이 그리울 땐 고개를 숙인다. 벼도 빛나고 보리도 빛나고 상추도 빛나므로. 햇볕에 반사된 빛이라고 간주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햇볕을 받으며 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식물들의 빛이 모두 해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벼와 보리와 상추가 자라며 뿜어낸 빛이 농부에게 닿은 것이다. 점점 넓어지고 밝아지는 식물들의 그 빛을 한 번이라도 쐰 사람은, 해와 달과 별을 찾아 고개를 들기보다, 아무리 희미하고 작은 빛의 기미라도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땅에 댄 채 고개 숙인다. 벼와 보리와 상추가 만든 빛과 어둠의 이야기를 품는다. 내가 사랑하는 그는 그런 사람이다.


(359)

쓴다는 것은 물러선다는 것이다. 책상에 바짝 다가앉으려고만 들던 때도 있었지만, 이젠 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뒤로 한참을 가 보곤 한다. 퇴보자처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도 말했다. ‘퇴보자는 자신의 캔버스를 바라보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다가 작업하는 동료들과 부딪치는 사람이라고.


(403)

이곳 섬진강 들녘은 사람이 매우 적은 대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생물들이 아주 많다. 소멸하고 있는 곳은 사람만 득실대는 서울이다. 만인에서 만물로 시선을 돌리면, 곡성을 비롯한 소위 소멸예정지역들이 달리 보인다.

인가 증가 대책만 세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제외한 생물들을 어떻게 잘 지켜낼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들지 말고, 만물을 위해 무엇도 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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