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테슬라 - 신과학 총서 4
마가렛 체니 지음, 이경복 옮김 / 양문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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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들국화의 노래 중에비교는 바보들의 놀이라는 가사가 있단다. 비교는 나 자신만 힘들게 해서 아빠는 될 수 있으면 비교를 하지 않는데, 니콜라 테슬라를 이야기하려면 토마스 에디슨과 비교를 해야 할 것 같구나. 이 비교는 니콜라 테슬라를 더 이해할 수 있는 비교라고 생각해. 어린 시절 위인전에 꼭 빠지지 않았던 토마스 에디슨에 비해 니콜라 테슬라는 어린 시절 읽던 위인전에서 만나기 힘든 인물이었단다. 최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인터넷 서점에서 니콜라 테슬라로 검색을 하면 몇 권 안 나와. 그나마도 어른용이 대부분이고, 어린이용으로 나온 것은 학습만화 한 권뿐이더구나. 그런데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닌가 봐. 이 책의 지은이 마가렛 체니라는 사람도 이 책을 쓰기 전까지 니콜라 테슬라에 대한 책이 거의 없었대. 그리고 자신이 니콜라 테슬라에 대한 책을 쓰려고 했는데, 자료 구하기도 무척 힘들었다고 하더구나. 그 이유를 니콜라 테슬라의 성격이나 생활습관 때문이라고 했어.

테슬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고집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일도 대부분 혼자 했고, 어떤 단체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대. 그런 이유로 그에 대한 정보도 적고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것 같아. 아무튼 에디슨보다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테슬라가 에디슨보다 더 똑똑하고 위대한 발명가라는 것. 그들이 비교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전기 방식을 놓고 직류 시스템과 교류 시스템으로 상반된 방식을 주장해서 그랬을 거야. 그리고 교류 시스템이 우수하고 장점이 많았기 때문에, 니콜라 테슬라가 만든 교류 시스템이 널리 퍼지게 된 거야. 그것은 니콜라 테슬라의 단편적인 업적이란다. 이론으로 바탕으로 한 그의 상상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단다. 그 당시 그는 이미 놀랍게도 스마트폰을 예견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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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그 다음에는 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큼 싸고 간단한 장비가 등장해 전 세계의 소식이나 원하는 정보를 전해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모든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거대한 두뇌로 바뀔 것이다. 수백만 개의 장비들을 100마력짜리 발전소 하나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거의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이것은 정보의 전달이 더욱 싸고 대량으로 이루어지도록 촉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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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쓰여진 것이 1981년이고,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것이 2002년이었단다. 당시에도 스마트폰이라는 말 조차 만들어지기 전이었지. 그런데 그가 이야기했던 그 주머니 속의 장비는 현실이 된 세상이 되었단다. 그야말로 100년을 앞서 살았던 니콜라 테슬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그가 연구는 더욱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그가 한 연구는 기술적인 내용이니, 괜히 이야기했다가 오류 가득할 테니 말이야..

 

1.

1856 7 9일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어. 어렸을 때부터 이것저것 발명하고 실험하는 것을 좋아했다는구나. 우산으로 나는 시험을 했다가 다치기도 했대. 어린 시절을 형을 따르고 좋아했는데, 그 형이 갑작스럽게 죽었는데, 그 이후 악몽에 시달릴 때도 있었고, 나중에 병적인 강박증이나 강박관념이 생긴 것도 어린 시절 겪은 형의 죽음이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하더구나. 테슬라도 어린 시절에 중병을 앓기도 했는데, 아플 때 마크 트웨인의 책들을 읽었다고 하는구나. 그 때부터 마크 트웨인의 책을 좋아했는데, 나중에 25년 뒤에 직접 만나고 마크 트웨인이 죽을 때까지 친분을 유지했다고 하는구나.

1875년 오스트리아에 있는 종합기술학교에 입학한 테슬라는 전기 장치에 푹 빠지게 된단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물리학, 수학, 역학 공부를 열심히 했어. 머리는 좋고, 돈은 없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 좋은 머리로 도박을 하다가 걸려서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에디슨이 차린 회사의 파리지사에서 일하게 되었어. 거기서 테슬라는 이미 교류유도모터를 창안했어. 그 파리지사에 테슬라의 능력을 눈여겨본 에디슨의 지인이 있었어. 그래서 추천서를 써주었고, 테슬라는 추천서를 들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단다. 에디슨을 만나러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였어.

 

2.

미국에 도착한 테슬라는 에디슨을 찾아갔어. 당시 에디슨은 직류시스템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등 여러 가지 전기 장치로 돈을 많이 벌고 있는 발명가이자 사업가였단다. 에디슨은 테슬라를 처음 봤을 때 탐탁지 않게 생각했어. 발전기 수리를 맡겼는데, 아주 깔끔하게 고치는 것을 보고 능력을 인정하기는 했어. 에디슨은 직류시스템으로 전기 공급하기는 했는데, 잦은 고장으로 고생을 하고 있어. 테슬라는 이미 교류시스템에 대한 방안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에디슨에게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사장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지은이의 말에 따르면 에디슨은 테슬라처럼 지적이고, 이론적으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싫어했대. 그래서 테슬라를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았대. 결국 테슬라는 에디슨과 갈등이 고조되어 회사를 그만두었단다.

그러면 전기를 공급하는데 있어 교류시스템이 좋을까? 직류 시스템이 좋을까? 현재 전세계로 일반 전기 전송을 직류로 하는 곳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단다. 전기를 전송하는데 있어 교류시스템이 더 낫단다. 그 이유는 교류시스템은 훨씬 큰 전압을 만들 수 있어서 아주 먼 거리까지 전기를 전송할 수가 있고, 쉽게 직류로 바꿀 수 있어. 그러나 직류시스템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발전소를 많이 만들어야 했어. 하지만, 에디슨은 결국 자신의 주장을 굳히지 않았단다.

 

3.

테슬라는 투자자들의 지원을 받아서 전기조명 회사를 차리긴 했지만, 당시(1886) 미국 경제 침체기이기 때문에 회사 사정도 어려웠어. 그러다가 웨스턴 유니온 전신 회사의 경영자 A.K.브라운을 만나고, 브라운의 도움으로 테슬라 전기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어. 그리고 교류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발전기, 모터, 변압기를 차례로 개발했어. 그는 이런 제품 개발뿐만 아니라 학자로서 강의도 했었대. 테슬라에게 그런 강의에 대한 소질도 꽤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가 했던 강의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유명해지게 되었고, 당시 미국의 유력한 사업가인 웨스팅하우스가 그를 찾아왔어.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교류를 이용한 전기 공급을 시작했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에디슨의 직류와 웨스팅하우스/테슬라의 교류가 맞닥뜨린 거야. 에디슨은 교류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려고 코끼리 등도 죽이는 시범을 보였다고 하는구나. 알을 품어 병아리를 부화시키려고 했던 그 에디슨이 맞나 쉽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류 시스템의 장점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대. 그러니 에디슨의 입장에서 보면 테슬라가 얼마나 미웠겠니.

테슬라의 아이디어는 당대에는 황당하게 생각되는 것도 많았대.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는 이미 무선통신을 생각하고 있었고, 번개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기상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대. 그리고 지구 대기권에 있는 전리층을 이용하여 지구 전체를 밝게 빛나게 할 수도 있다고 했어. 이 책의 지은이는 테슬라의 꿈은 유토피아라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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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테슬라의 꿈은 한마디로 유토피아였다. 지구를 굶주림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계 곳곳으로 통신을 가능하게 하며, 기상을 조절하고,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꺼지지 않는 빛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다른 행성에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생명체와 연락하는 것 등이 바로 테슬라가 실현시키고자 했던 이상이었다. 테슬라는 통계적으로 확실히 화성인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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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구현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것들도 있지만, 테슬라 이후에 테슬라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된 것이 꽤 많다고 하는구나. 그는 라디오 방송 원리에 대한 강연을 이미 1893년에 했고, 무선 통신 시범을 보이기도 했대. 박람회에서는 교류시스템 등 자신의 발명품을 전시해서 큰 인기를 끄기도 했어.

이렇게 유명해지다 보니 상류사회의 모임도 자연히 참석하게 되었어. 하지만 평생 독신이었던 테슬라는 진실로 사랑한 여인은 없었대. 그래서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대. 친구의 아내 캐더린의 적극적인 대쉬가 있기도 했지만, 테슬라는 끝까지 선을 지켰단다. 어쩌면 안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 테슬라에게는 오직 전기에 대한 연구가 삶의 이유였던 것 같아. 어렸을 때부터가 그가 가지고 있던 꿈이 있었는데 그걸 드디어 이루게 되었단다. 그것은 바로 나이아가라 폭포에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었어. 그것도 모두 교류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란다. 이제 온 세계 언론이 테슬라를 극찬하고 있었어..

 

4.

그는 사업가 기질은 없었던 것 같아. 그는 성공은 했지만, 돈은 많이 모으지 못했단다. 뉴욕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연구와 실험만 했단다. 테슬라의 기준으로 봤을 때 행복한 시절이었지. 그런데 안 좋은 일도 생겼어. 실험실 자재를 보관하던 6층 건물이 무너져서 무선 통신 장비, 무선 에너지 전송에 관한 그의 장비들이 모두 망가지고 말았단다. 이 일은 심적 상태에 큰 상처를 주었고, 재정적으로도 파산 상태까지 가게 했어. 다행히 아담스라는 사람이 지원을 해주어 다시 무선통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어. 뿐만 아니라 X레이를 연구하고, 방사능에 대한 위험한 실험들도 했다고 하는구나. 그가 한 연구들을 보면 과연 100년 전에 한 연구들인가 싶기도 하더구나. 앞서 이야기했던 무선 통신 뿐만 아니라, 무선 리모트컨트롤에 대한 특허를 냈고, 무선 전력 송신을 연구했어. 무선 전력 송신이 가능해지면 전선 없이 전기를 전달하게 되는 거겠지. 그는 아마 전봇대의 전선을 보면서, 돈도 많이 들고, 미관상에도 안 좋으니 무선으로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겠지. 무선 통신을 이용하면 화성과 통신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어. 그는 로봇도 만들었어. 무선 원격 장치를 이용하여 잠수함도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실제로 작은 기계를 만들어 무선으로 움직이는 것을 시범을 보였대. 그가 무선 통신을 하고 무선 에너지를 전송하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가 발명한 교류시스템에서 발견한 고주파를 이용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고주파와 교류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서 테슬라 코일을 만들기도 했단다. 그 테슬라 코일을 기반으로 무선 에너지 전송을 위한 공진 변압기를 만들었어. 이 실험을 위해 그는 콜로라도에서 실험을 했는데, 그가 만든 고전압을 만들어내는 발전기 때문에 스프링스 발전소에 불이 나기도 했대. 그가 하는 실험과 연구는 당대에는 필요 없어 보이는 것들도 있었어. 그렇다 보니 실험으로 돈을 탕진하고, 투자자는 없고, 어려운 삶을 살았어. 그래도 특허를 많이 썼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는 특허를 헐값에 주변 사람들한테 넘겼대. 재정이 어려워서 그의 회사에서 일하던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어.

그가 특허를 많이 내다 보니 주변 과학자들과 특허 분쟁도 많았다고 하는구나. 유명한 것이 무선 통신에 대한 특허분쟁이었어. 무선통신을 처음 한 사람이 마르코니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란다. 무선통신의 시작은 테슬라였어. 당시에도 논란이 있어서 오랜 무선통신특허분쟁으로 이어졌대. 결국 테슬라가 먼저였다고 판결이 났단다.

 

5.

그가 전기와 우리 삶에 대한 기대한 공을 세워서인지 테슬라에게 노벨상 수상자라는 소문이 날아왔어. 그런데 혼자가 아니고 에디슨과 공동수상이라는 소문이었어. 언론에서는 이미 노벨상이 정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테슬라에게 인터뷰도 했단다. 그런데 정작 수상자는 다른 사람이었고, 노벨상 주최측에 소문의 진상을 물어보니 묵묵부답이었대. 에디슨이 앙숙인 테슬라와 같이 받느니 안받겠다고 하면서 테슬라도 못 받게 힘을 썼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테슬라도 노벨상에 크게 마음에 두진 않았대.

그는 나이가 들어도 아이디어는 쉬지 않았어. 레이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서 해군에게 제안을 했지만, 해군은 받아들이지 않았어.. 미해군은 그 후 15년 뒤에 레이더를 개발했다고 하는구나. 노년에 들어선 테슬라는 호텔에서 홀로 생활을 하면서, 공원의 비둘기들과 친하게 지냈대. 병든 비둘기를 호텔로 데리고 와서 치료를 해주기도 했대. 가족이 없던 그도 노년이 되니 외로움을 느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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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테슬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마치 두 사람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얘기를 계속했다.

“그렇소. 그것은 환영이 아니라 진짜 빛이었소. 내가 실험실에서 만든 어떤 램프보다도 환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빛이었소. 그 비둘기가 죽자 내 삶에서 뭔가가 빠져나건 것 같았소. 그때까지는 아무리 거창한 계획이더라도 내가 그 일을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소. 하지만 뭔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부터는 내가 할 일도 이제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렇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수천 마리의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어 왔소. 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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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과학으로 최적화된 두뇌를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성 인권 신장에 대해서도 진보적은 의견을 내놓았다는 것이 신선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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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일한 정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고 동일한 성취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왔으며, 여러 세대가 지나가면서 그 능력은 점점 더 크게 확대될 전망이다. 앞으로는 보통여성들이 보통남성들만큼 교육을 받을 것이고, 나중에는 오히려 남자들보다 더 높은 교육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여성들의 뇌가 수세기 동안 휴식을 취해 와서 잠재된 능력을 자극하면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여성들이 지금까지 있었던 전례를 무시하고 크게 발전함으로써 문명 사회를 깜짝 놀라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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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도 꾸준히 연구하고 공상하던 테슬라는가끔씩 사회 활동도 했지만, 주로 호텔에서만 생활을 했고, 1943 1 7일 쓸쓸히 죽고 말았단다.

 

6.

테슬라가 죽고 난 다음 그의 논문과 연구자료가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대. 지은이가 추적한 바로는 테슬라 논문의 사라진 행방의 배후에는 FBI가 있었다네. 테슬라의 자료들이 적국에 넘어가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FBI가 테슬라의 행적을 늘 감시했고, 그가 죽고 난 후에는 그의 자료들을 가져갔다는 것이야. 그리고 지은이가 확인한 바로는 국방연구 기관에서 테슬라의 논문을 보관하고 있는데, 정보기관요원만이 열람이 가능하다고 하는구나.

이 책의 지은이가 이 책을 처음 쓴 것이 1981년이란다. 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지나갔단다. 그 이후에 테슬라에 대한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났을 것 같구나. 인터넷 서점을 뒤져봤더니 2013년도에 출간된 니콜라 테슬라 평전이 있더구나. 그 책도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읽고 싶은 책목록에 적어두어야겠다.

아참, 과학자들이 테슬라의 공적을 기리는 뜻에서 자기장의 세기의 단위를 그의 이름을 따서 T(테슬라)라 정했다는구나.

 


(298)
"그 다음에는 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큼 싸고 간단한 장비가 등장해 전 세계의 소식이나 원하는 정보를 전해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모든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거대한 두뇌로 바뀔 것이다. 수백만 개의 장비들을 100마력짜리 발전소 하나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거의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이것은 정보의 전달이 더욱 싸고 대량으로 이루어지도록 촉진할 것이다."

(199)
테슬라의 꿈은 한마디로 유토피아였다. 지구를 굶주림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세계 곳곳으로 통신을 가능하게 하며, 기상을 조절하고,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꺼지지 않는 빛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다른 행성에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생명체와 연락하는 것 등이 바로 테슬라가 실현시키고자 했던 이상이었다. 테슬라는 통계적으로 확실히 화성인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376)
테슬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마치 두 사람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얘기를 계속했다.
"그렇소. 그것은 환영이 아니라 진짜 빛이었소. 내가 실험실에서 만든 어떤 램프보다도 환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빛이었소. 그 비둘기가 죽자 내 삶에서 뭔가가 빠져나건 것 같았소. 그때까지는 아무리 거창한 계획이더라도 내가 그 일을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소. 하지만 뭔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부터는 내가 할 일도 이제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렇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수천 마리의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어 왔소. 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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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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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어렸을 때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고 했잖아. 중학교 때던가, 숙제로 한국 문학을 읽는 게 있었어. 당시 책에 대해 안내를 받을 만한 곳도 없고, 그렇다고 아빠가 책을 고를 능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었던 이상의 "날개"라는 책을 집어 들어 읽었던 적이 있단다. 이상의 단편 모음집이었는데, 이상의 대표작인 "날개"를 책제목으로 뽑았던 것 같아. 읽기 전에는 재미있겠지? 그러니까 유명해진 거겠지? 하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첫 장부터 집중해서 읽어나가기 어려웠고, 수십 장 이어지던 이야기가 끝났을 때, , 이건 뭐지? 하는 생각... 전혀 지은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뿐. 당시 아빠에게는 큰 충격이었단다. 그리고 한국 문학에 대한 선입견도 생겼던 것 같아. 읽어내기 어렵다라는.... 그래서 이후 책을 더 멀리 했던 것 같기도 해.

어른이 되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상이 활약했던 시대의 한국문학도 하나 둘 읽었단다. 그런데 아직 중학교 때 시절의 충격 때문인지, 이상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어. 이번에 읽은 김연수의 <굳빠이, 이상>이라는 책은 제목은 알고 있던 책이었단다. 얼마 전 알라딘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둘러보다가 이 책을 보게 되었단다. 중학교 때 이상의 소설을 읽었을 때의 기억과 함께...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구매했단다. 지은이 김연수. 이 분은 많은 히트작을 내셨는데, 아빠는 이번 소설이 첫 번째란다. 아빠가 읽은 것은 2016년에 나온 개정판이고, 이 책의 초판은 2001년이라고 하는구나.

 

1.

이상. 그에 대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본명은 김해경이고, 1910년에 태어나 1937년에 죽었다고 하는구나. 우리 나이로 스물여덟의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그의 삶과 죽음, 작품은 많은 의문을 남긴 것 같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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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세 살 때 큰아버지한테 입양되었고, 큰어머니한테 학대를 받으면서 자랐다고 하더구나. 이런 불우한 어린 시절이 그의 삶과 작품에 오롯이 녹아 있는 것 같구나. 아빠는 이상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이 책에 따르면 이상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그의 삶과 죽음에 물음표가 많아서인지, 그의 유고라면서 나오는 경우가 많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진위논란도 많고실제로 1960년에도 그의 유고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진위논란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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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화라는 잡지사 기자가 있는데, 그에게 어느날 자신을정씨라고만 밝힌 사람으로부터 한 전화를 받는단다. ‘서씨’라는 사람이 전화를 해서 이상의 유고라면서 발견했다고 이야기를 할 텐데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니 믿지 말라는 전화였단다. 그런데 정말 며칠 뒤 서혁수라는 사람이 전화해서 자신이 이상의 유고뿐만 아니라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가지고 있다고 했어. 데드마스크는 죽은 사람의 얼굴을 석고로 뜬 것인데, 이상의 데드마스크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대. 이상이 죽고 나서, 임종을 지켰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이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만들었다는 소문이야. 그런 소문들이 난 이유는 이상의 임종을 지킨 이들이 대부분 일찍 죽거나 납북되거나 월북을 해서 정확한 증언을 해줄 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김연화는 며칠 전 정씨로부터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기자의 본분으로 서혁수의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서혁수가 알려준 인사동의 식당으로 갔어. 그곳에는 서혁수뿐만 아니라 이상에 전문가로 알려진 최창수 교수도 있었고 이 관장님(어디 관장님이었더라?)도 있었단다. 서혁수는 자신의 형 서혁민이 남긴 수기와 함께 데드마스크를 보여주었어. 이 관장님은 거액을 주고 데드마스크를 전해 받았단다. 김연화는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단다. 김연화가 서혁민의 수기를 읽어 보았어데드마스크를 떴을 것으로 소문이 돌았던 조우식이나 길진섭이 아닌, 서혁민 본인이 데드마스크를 떴다는 내용과 함께서혁민 본인이 평생 이상과 이상의 작품을 추적한 내용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어. 김연화 기자는 고심 끝에 기사를 썼단다. 이상의 데드마스크가 발견되었다고

그런데 그 기사가 나간 직후, 서혁수는 사라졌어. 그리고 서혁수와 함께 있던 최창수 교수는 가짜였고, 그 가짜 교수도 사라졌어. 완전 사기극이었던 것이지. 데드마스크를 산 이 관장님은 서혁수를 고소하였고, 김연화 기자까지 공범이라고 같이 고소했어. 김연화는 검찰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더 이상 기자생활을 할 수 없었어. 그렇게 가짜 데드마스크의 헤프닝 사건은 끝이 났단다.

 

2.

김연화 기자가 건네 받았다고 하는 서혁민의 수기 전편이잃어버린 꽃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단다. 읽어보니 김연화 기자가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인사동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의 아마추어 고서 수집가 와타나베가 일본 작가의 유품 중에 이상의 글을 봤다고 해서, 서혁민은 일흔다섯의 노구를 이끌고 이상의 자취를 찾으려고 일본으로 향했단다. 와타나베가 본 이상의 작품은 유실된 소설 <백병>과 오감도의 미발표 작품 16호라고 했어.

오감도. 이상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오감도. 제목은 들어보았지만, 어떤 작품인지는 아빠도 몰랐어. 이상의 오감도는 1호부터 15호까지만 발표가 된 것으로 되어 있어. 이상이 원래는 30호까지 계획했지만, 15호까지만 발표를 했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1934 7 24일부터 8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는데, 독자들이 내용을 알 수 없다는 항의가 있어서 15호까지만 연재되고 중단되었다고 하는구나. 이런 사연이 있어서 오감도의 나머지 15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들 하는구나. 그런데 그 중에 한편이 발견되었다고 한 거야. 서혁민은 일본에 갈 때 그냥 비행기 타고 휙 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에 그 옛날 일본에 유학을 갈 때 갔던 코스를 따라 갔단다.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을 해서 도쿄로 향했어. 이상이 처음에 도쿄를 싫어했다가 나중에 좋다고 했다는구나. 이상이 도쿄에서 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살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대. 서혁민은 본인도 이 여행의 최종 종착지는 이상과 같은 선택으로 작심하고 극약도 가지고 왔어. 그의 이번 생의 마지막 여행.

그의 수기에는 이상을 사랑했던 여인들도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어. 사랑 이야기는 그냥 넘어갈 수 없잖니..^^ 이상의 아내 변동림과 이상을 사랑했던 권순옥이라는 여인변동림은 이상이 죽은 다음에 뉴욕으로 갔고,. 그곳에서 화가 김환기와 결혼을 했고, 변동림은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어 수필도 쓰고, 서양화가로 등단하기도 했고,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구나.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이 소설의 초판본이 나온 2001년에는 생존해 계셨지만, 2004년에 삶을 마감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권순옥그녀는 당시 인텔리 여성으로 이상을 사랑했었고, 이상의 친구였던 정인택이 권순옥을 사랑하면서 삼각관계에 빠지기도 했대. 결국 정인택과 결혼을 한 권순옥은 남편 따라 북으로 갔대. 정인택이 죽고, 이상과 정인택의 친구였던 박태원과 재혼을 했어. 박태원은 아빠도 좋아하는 작가란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천변풍경>의 지은이. 그리고 권순옥은 박태원이 장님이 된 후 쓴 <갑오농장전쟁>의 구술을 받아 적었다고 하는구나. 박태원이 북으로 가서 노환으로 눈이 멀고 구술로 <갑오농장전쟁>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때 구술을 받아 적은 이가 권순옥이었던 거구나. 한때 경성 모던보이로 불렀던 세 친구 이상, 박태원, 정인택과 모두 인연을 맺었던 권순옥. 그녀의 삶 또한 기구하구나. 그리고 이상을 사랑했던 또 다른 여인과 전혀 다른 삶의 궤도를 그린 것 또한…. 운명이란 무엇인지

다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지만, 그들의 삶을 생각하고 있자니짠해지는구나.

다시 서혁민의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서혁민은 와타나베를 만나게 되는데, 뜻밖에 소식을 듣는구나. 와타나베가 이상의 유고를 태워버렸다고 했어. 그는 그것이 이상의 문학을 영원히 지켜주는 것이라고 했어. 서혁민은 화를 냈어평생 이상과 이상의 작품을 쫓아다닌 그였는데진정을 하고 다시 생각해보니 와타나베의 말도 맞는 것 같았어. 와타나베와 헤어진 서혁민은 삶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 이상이 죽은 병원으로 향했단다.

  

3.

2000년 이상 탄생 90주년을 맞이하여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단다. 피터 주. 그는 재미동포로써 미국에서 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뿌리를 찾겠다면서, 한국 현대 문학, 그 중에 이상을 연구한 이상 전문가 중에 한 사람이었어. 지금은 한국에 와서 연구를 하고 있으면서, 이 학술 심포지엄에서 이상의 작품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어. 오감도 15편 이후 발표하지 않은 15편의 내용에 대한 연구였어. 그런데 피터 다음으로 권진희라는 사람이 그의 발표와 상충되는 발표를 했단다. 오감도 16호를 발견하여 그 자리에서 발표한 것이야. 피터 주가 그 직전에 발표되지 않은 오감도 15편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곧바로 그 15편 중에 한 편을 발견했다며 발표를 했으니, 피터 주는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했어.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인데, 김태익이라는 자가 와서 피터 주의 논문에 대해 꼬투리를 잡으면서 질문을 했어. 피터는 심포지엄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날의 창피함으로 미국으로 곧바로 돌아갈 생각까지 했어.

그런데, 그때 김연화로부터 연락이 와서 만났어. 김연화. 가짜 데드마스크 사건으로 망신을 당하고 잡지사도 못 다니게 된 그 사람. 김연화는 심포지엄에서 피터 주를 보고, 연락을 했다고 했어. 서혁민의 수기를 주면서 그 수기 안에 오감도 16호가 들어있다고그런데 그 수기 속에 들어 있는 오감도 16호는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오감도 16호와 내용이 다르다고자신은 서혁민의 수기에 있는 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모르겠다고 했어. 그러면서 피터 주에게 판단하라며 수기를 넘겨 주었단다.

피터 주는 그 수기를 읽어보고 어쩌면 데드마스크와 수기 속의 오감도 16호가 진짜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더욱이 오감도 16호야말로 정말 이상의 글다웠어. 그가 생각하기에 오히려 이상의 작품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어. 피터 주는 기사에 공개하기로 했어. 이내 심포지엄에서 공개한 권진희의 오감도 16호와 피터 주가 기사에 공개한 오감도 16호 중에 어떤 것이 진짜이냐며 논란이 일었어. 하지만 이내 피터 주에게 시련이 찾아왔단다. 심포지엄에서 만났던 김태익이라는 사람이 피터 주를 찾아왔어. 그리고 피터 주가 공개한 오감도 16호가 가짜라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어. 피터 주가 공개한 오감도 16호는이상의 오감도 15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들을 차례대로 배열한 것에 불과했던 거야. 피터 주는 크게 좌절했고, 심포지엄 때 받은 당혹과 창피함에는 비교할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어. 이상의 전문가라 하면서 가짜임을 밝혀내지 못하다니그러면서 자신의 정체성까지 끌어들여 자책했어.

사실 그는 미국계 한국인이 아니었어. 자신은 미국계 한국인인줄 알고 살았는데, 성인이 된 후 우연히 자신이 한국인부부에게 입양된 타이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거야. 이미 한국 현대 문학과 이상에 푹 빠져 있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야. 자신은 타이완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미국 사람인지 몰랐어. 정체성을 잃고 살던 그에게 이상에 대한 연구는 그래도 한국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해왔는데, 이 오감도 16호 사건으로 그는 심하게 좌절하고 심한 상처를 받았단다.

그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어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행동 직전에 깨달았어. 진짜라고 믿는 자에게 그 세계는 진짜처럼 보이고, 가짜라고 믿는 자에게 그 세계는 가짜처럼 보인다고 말이야. 진짜와 가짜는 별 차이 없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라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받은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갔어. 그리고 우연히 피터 주는 권진희가 발표한 오감도 16도도 가짜라는 증거를 발견하게 돼. 하지만, 퍼터 주는 반박하지 않았어. 어차피 진짜라고 믿으면 진짜이고, 가짜라고 믿으면 가짜이니까 말이야….

..

그렇게 소설이 끝이 났단다. 아빠가 이상에 대한 사전 시식이 없어서, 쉽게 읽을 수는 없었단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고 말이야. 김연수라는 작가. 아빠는 이번이 처음인데, 이런 소설을 쓴 것을 보니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상에 대한 연구를 보통 해서는 나올 수 없는 작품.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 같더구나. 그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단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의 다른 소설도 읽어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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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 이제 때려치울 거야!” 하고 물러나면 나의 한계가 거기까지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버티는 자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그날까지 버텨야겠어요. 팝가수 켈리 클락슨도 노래하잖아요.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41)

짧은 순가, 머릿속에서는 하루 쉬자는 쪽과 비가 내려도 무조건 가자는 쪽이 설전을 벌였습니다. ‘온종일 비가 오면 어쩌려고!’ ‘우비 입고 다니지?’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럼 그때 가서 쉬지?’ 고민 끝에 결국 가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폭포에 도착해서 잠시 우산 쓰고 걷다 보니 날이 개었습니다. 포기하자는 유혹에 졌다면 숙소에서 맑게 갠 하늘 보며 땅을 칠 뻔했어요. 역시 인생은 끝까지 가보기 전에는 모릅니다.

 

(76)

무언가 배울 때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이 정도는 알고 있지라고 자신하는 순간, 새로운 것을 배울 기회가 사라집니다. 대부분이 기초 회화는 안다고 자신하지요. 하지만 책을 읽어 이해하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문장을 보지 않고도 말이 나와야 언어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기초 회화부터 새로 외워야 합니다.

 

(127)

예전에 책에서 읽은 수식을 소개합니다.

“1.01 365승은 37.8

0.99 365승은 0.026

향상심이 강한 사람이 전날보다 매일 1퍼센트씩 자신의 행동을 개선하여 그것을 1 365일 지속해간다. 그리고 그것을 1.01 365승이라고 생각하면 1이 약 38이 된다. 한편, 어찌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 전날보다 매일 1 퍼센트씩 행동이 절하된 상태로 1 365일을 이어나가면 0.026이 된다. 20, 30년이라는 시간 간격으로 샐러리맨을 보고 있으며, 이 수식이 무척이나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18년이나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후회한 12가지>(와다 이치로 지음)”

 

(177)

결국 세상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소설 <왕좌의 게임>에서 읽은 영어 대사를 노트에 적어놓고 다시 소리 내어 읽어봅니다.

“Never forget what you are, for surely the world will not. Make it your strength. Then it can never be your weakness. Armor yourself in it, and it will never be used to hurt you.”

영어 공부를 겸해 원서를 읽는다면 좋은 문장을 수첩에 모아보세요. 나만의 영어 명언집이 완성됩니다. 배낭여행을 갔을 때 미국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 얘기가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때 나는 말이야, 타이리온 라니스터의 그 대사가 참 좋아하고 소리 내어 외워보는 겁니다. 영어 공부도 되고, 인생 공부도 되고, 친구도 사귈 수 있는 좋은 길이 여기 있어요.

 

(256)

저는 어려서부터 유시민 씨가 쓴 책을 좋아했어요. 유시민 씨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말과 글이 다 유창하지요. 그는 대학 졸업하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독일로 유학 가서, 그때 처음 독일어로 정식으로 배웠다고 해요. 그렇지만 독일어로 박사 논문을 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답니다.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논리를 만들고 다른 이들에게 설득하는 일인데 그 바탕이 바로 모국어 실력이라는 것이지요.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보면 모국어가 중요하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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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핵 - 포스트 후쿠시마와 에너지 전환 시대의 논리
김명진 외 지음,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기획 / 이매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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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탈핵에 관심을 둔 이후, 가끔씩 인터넷 서점에서 ‘탈핵’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곤 한단다. 이 책은 그렇게 알게 된 책이란다. 이 책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핵발전소의 진실과 탈핵에 관하여 에너기기후정책연구소에 기획하여 탈핵 전문가 여섯 명이 공동 집필한 책이란다. 추천사를 녹색평론 편집자인 김종철 님이 쓰셔서 반갑더구나. 아빠가 <녹색평론>과 탈핵 관련된 책들을 통해서 알게 된 내용들을 잘 정리해 놓은 책 같더구나. 책 두께도 200 페이지가 채 안되어 얇은 책이라서, 탈핵에 관련해서 알고 싶은 사람들이 보면 좋은탈핵 입문서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구나. 특히최근에 문재인 정부가 탈핵 선언을 했잖아. 그런데핵마피아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핵발전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잖아. 그들이 주장하는 의견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책이란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이야기한 것처럼 탈핵을 해도 되는지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구나. 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핵발전과 탈핵에 대해서 간략하게 잘 나와 있단다.

 

1.

핵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군사적인 요구로 시작되었단다. 중성자를 원자번호 92번 우라늄의 원자핵에 쏘아 넣으면 원자번호 56번 바륨과 원자번호 36번 크립톤이 생겨나는 것을 발견했어. 그런데그 때 막대한 에너지도 같이 방출되었단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예견한, 물질 속 압축에너지를 방출시킬 수 있는 물리 반응을 발견하게 된 거야. 이 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어느 정도냐 하면, 우라늄 1그램으로 대략 TNT 2만 톤의 위력을 낼 수 있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미국은 이것을 이용한 원자탄 개발 계획을 착수했는데, (1941) 그것이 그 유명한 맨하튼 프로젝트란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프로젝트는 성공하게 된단다. 1945 7 16.. 실험에 성공하고, 1945 8월에 리틀보이와 팻맨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되었단다. 이 두 발의 핵폭탄으로 일본은 항복을 하고 세계대전은 끝이 났어. 당시 핵폭탄이 없어도 일본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까지 내면서 핵폭탄을 사용했어야 했느냐 윤리적인 문제가 논의되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그냥 실행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이것은 시작이었어. 핵무기를 만드는 것으로 그리 어렵지 않았어. 곧바로 다른 나라도 핵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단다. 1949년 소련은 핵실험을 성공했고, 이에 미국은 수소폭탄개발로 대응했어. 당시는 냉전시대로 소련과 미국의 적대 관계였는데, 두 나라가 경쟁하듯 핵무기를 만들었으니, 전세계가 핵무기의 위협 속에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단다. 이후 전세계적으로 핵 반대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러셀과 아인슈타인은 공동 선언을 통해 핵전쟁회피를 호소하는 등 유명인들도 동참했단다.

그러면서 나온 것이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모순된 말이었단다. 핵무기가 아닌 다른 곳에 쓸 수 있다면서…. 핵에너지를 추진체로 하는 핵추진 잠수함이 개발되었고, 소련은 핵에너지를 민간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발했어. 미국도 서둘러 개발을 하게 되었고, 1954 9월 첫 번째 핵발전소를 건설하였단다. 이 때부터 핵발전소는 정부의 지원을 받고 엄청나게 늘었단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핵발전소의 호황시대였어.

 

2.

핵발전소의 장미빛도 오래가지 못했단다. 1970년대 핵발전소 처지에서 보면 3가지 악재가 발생하면서 사실상 종말을 걷게 되었어. 핵의 위험성으로 인해 전세계에서 반핵 운동이 일었고, 오일쇼크가 있었고, 쓰리마일에서 대형 핵발전소가 일어났단다. 그래서 이런 일로 미국에서는 1979년 이후 신규 핵발전소가 건설되지 않았단다. 그리고 1986년 그 유명한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로 인해 핵발전의 위험성에 대해 다시 한번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서, 유럽의 여러 나라가 탈핵 선언을 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2011년 다시 한번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대형사고가 난 것이야. 보통 이웃나라에서 이런 대형 사고가 나면, 우리도 그런 사고가 날 수 있으니 그런 시설물 가동을 중지하는 것이 맞을진대, 2011년 후쿠시마 사고 당시 우리나라가 보인 태도는 이해불가의 태도였단다. 이미 1980년대 이후 전세계에서는 핵발전소 건설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는데, 한국과 일본 등 일부 나라에서만 반대로 핵발전소를 경쟁하듯 짓고 있었단다. 그런데 그런 나라 중에 일본에서 대형 사고가 났으면, 이건 그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만두었어야 하는데, 이것이 기회라도 더 짓겠다고 하는 머릿속은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구나.

..

우리나라는 1978년 고리 1호기를 시작으로 핵발전소를 시작했고, 핵발전소의 침체기를 걷고 있는 1980년대 이후 20년간 15개를 추가 건설했고, 그 이후에도 추가로 짓고 있었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동이 걸렸지만 말이야. 아빠가 예전에 녹색평론을 읽고 이야기해 준 거처럼, 핵발전소는 안전하지도 않고깨끗하지도 않고싸지도 않단다. 건설 비용 엄청 들고이때 화석연료가 엄청 들어가게 되고, 운영 중에는 한번 대형사고가 나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엄청 위험하고, 수명이 다한 발전소와 핵폐기물은 처지 곤란으로 인류의 역사보다 오래할 것이란다. 이런 핵발전소는 폐지가 정답이란다. 그리고 핵발전소의 원료가 되는 우라늄도 수십 년이 지나면 바닥이 난다고 하는구나. 이런 것이 핵발전소의 진실이야. 아빠가 이미 녹색평론과 다른 탈핵 관련된 책을 통해서 여러 번 이야기해서 오늘은 짧게 이야기할게.

핵심은 핵발전소는 무조건 안 된다. 재생에너지로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이 탈핵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서 시민들도 예전보다 더 많이 탈핵과 재생에너지에 관심이 많아진 것 같더구나. 이번이 탈핵을 할 수 있는 기회인 것 같구나. 꼭 우리나라도 탈핵국가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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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불쌍하다. 대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논문을 써야 하는데, 논문을 쓰자면 연구를 해야 하고, 연구를 하자면 대학원생이 있어야 하고, 대학원생을 두자면 연구비를 받아야 하고, 연구비를 받자면 연구과제를 따야 한다. 4대강사업과 관련이 있는 환경, 토목 분야 연구비는 대부분 4대강사업을 찬성해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대운하 반대 교수모임에 들어온 교수들을 보면, 관련 분야인 토목, 환경 분야 교수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극소수이고 대부분 이와 관련 없는 분야의 교수들이었다.

 

(13)

이명박 정보가 굳이 댐을 보라고 부르는 이유는 보와 댐의 설계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는 적당히 아무 데나 세워도 되지만, 댐은 물이 새거나 지반이 내려앉지 않고 물을 안전하게 담아둘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저수 지역의 지표지질 조사를 해야 하고, 또 댐 구조물이 들어설 자리에 댐을 안전하게 앉힐 수 있는 암반이 있는지 정밀 지반 조사를 해야 한다. 그러나 4대강에 들어선 댐들은 수위 6m를 맞추기 위해서 설치 위치를 잡았을 뿐, 댐 설계기준을 따르지 않았다. 지금껏 댐의 물이 새고 강바닥이 파이고 끊임없이 콘크리트를 쏟아부으면서 보강 공사를 하는 이유가, 댐들을 모래 위에 짓고 옆구리를 흙더미에 걸쳐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댐들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 1996년과 1999년에 두 번이나 무너진 연천댐도 흙더미에 걸쳐놓은 옆구리가 터져서 무너졌다.(이 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만든 댐인데, 무너지면 보상해주겠다고 각서에 도장을 콱 찍었지만 보상을 해주지 않아서 주민들이 소송을 하는 데 무려 9년이나 걸렸다.)

 

(33)

처벌을 보복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일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보복은 민주사회에서 절대로 행해져서는 안된다. 처벌과 보복은 같은 편이 아니다. 사적인 보복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처벌이 필수적이다. 만화 <26>은 공적인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에서 사적인 보복의 정당성이라는 심각한 철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권문제, 특히 국가범죄에는 시효가 있을 수 없다. 독일에서는 2016년 초에도 아우슈비츠에 근무했던 94세의 나치 친위대원 라인홀트 한닝을 기소하여 5년형이 선고되었다. 독일은 종전 70년을 넘겨서도 나치 인권탄압의 말단에 섰던 사람들까지도 단죄하는데, 한국은 불과 30년 전의 인권탄압도, 광주에서의 발포명령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는 구속되자마자 사면 얘기가 나오고 있다.

 

(86)

오늘날 가정이 자본주의체제의 가치에 삼켜질 위험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가정이 전통적으로 담당하던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가정의 대부분의 시간이 직접적인 생산과 직접적인 활동 대신, 돈을 벌고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일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섬김에서 나옵니다. 국가와 기업이 우리를 위해 해주는 일이 많아질수록 국가와 기업의 힘은 강력해시고 가정의 힘은 축소되고 무력해집니다. 우리가 그동안 친숙하게 상품과 서비스 형태로 소비했던 것들을 직접적인 활동과 사랑의 수고로 바꾸어낸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경험되는 영토는 그만큼 넓어지겠지요. 우리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수고를 자발적 사랑으로 감당하고, 그러한 가정들의 인격적인 사랑의 역량과 지혜가 모인다면, 언젠가 함께 가정다운 학교를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119)

유럽 같으면 혁명과 소련에 대한 긍정적 관심은, 아인슈타인과 비트겐슈타인, 벤야민 그리고 로맹 롤링이나 리온 포이히트방거 등의 기라성 같은 비판적 지성인들의 공통분모였다. 아인슈타인 같은 당대의 양식과 양심의 화신은, 볼셰비티들의 반대파에 대한 탄압책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도 레닌에 대해서는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그와 같은 사람들은 확실히 인류 양심을 수호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공산주의와 관계없는 인도주의자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의 10월혁명에 대한 긍정적 시각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공산주의의 폭력성에 대해 명확히 비판적이었던 간디는 왜 레닌과 볼세비키들의 숭고한 자기희생정신을 흠모했을까? 인도주의적 세계주의자인 타고르는 왜 1930년 소련 방문 이후 소련을 이 세상에서 비길 바 없이 흠모할 나라라고 규정했을까?

 

(125)

완벽한 정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궁극적으로는 바로 10월혁명의 복합적 성격이 혁명이 만든 사회의 민주성을 제한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이면서도, 10월혁명은 동시에 아직도 근대적 공업국가나 대중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던 러시아에서 산업화 등의 종합적 근대화 과제까지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근대화 담지 기관으로서의 신생국가가 대대적인 인민 총동원, 철저한 명령과 복종 위주의 서열체계를 요구하며, 그 성질상 소비에트 민주주의 발전의 장애가 된 셈이었다. 소비에트 개발국가의 가시적인 성과들이 특히 제3세계 지식인 지도자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영감을 주곤 했지만, 구미권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실질적 참정권, 즉 사회운영에서늬 참여 권한이 사실상 제한된 소련 노동자들의 입장은 꼭 부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개발이 얻어진 반면에 민초의 자율성과 민주성이 상실된 것은 1917 10월혁명 후속 과정의 가장 큰 한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134)

1917년의 상황에서 후진적이고 반()봉건적이며 민중의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러시아사회는 혁명을 통해서 현대적이고 발전된 경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소련의 과학자는 세계 전체 과학자 중 4분의 1을 차지하고, 건강 및 교육 제도는 서구 국가들의 그것에 필적하거나 우월한 것이 되고, 소련은 우주공간에 최초로 위성을 발사하고 최초로 인간을 내보낸 나라가 되었다. 1980년대에 소련에는 미국, 일본, 영국, 독일의 과학자들을 합친 것보다 많은 과학자들이 존재했다. 오직 최근에 와서야 서구세계는 소련의 우주계획이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구 국가들이 여전히 우주공간으로 남자와 여자들을 내보내기 위해서 러시아 로켓들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 점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되고 있다.

 

(135)

10월혁명은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기록했다. 그 이전 차르 치하에서는 여성들은 가정의 단순한 부속물로 간주되었다. 차르의 법률은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허용했다. 몇몇 시골지역에서는 여성들을 베일을 쓰도록 강요받았고, 글을 읽는 법도 쓰는 법도 배우는 게 금지되었다. 1917년에서 1927년 사이에 여성들이 남성들과 공식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한 일련의 법률들이 통과되었다. 1919년에 작성된 공산당의 한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대담하게 선포했다. “여성들의 형식적인 평등에 국한하지 않고, ()은 여성들을 낡은 가사(家事)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공동주택, 공공식당, 중앙세탁소, 보육소 등등을 제공하도록 노력한다.”

 

(142)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부활할 가능성, 그리고 그에 따른 여파를 트로츠키는 놀랄 정도의 선견지명으로 1936년에 이미 내다보았다.

 

소비에트체제의 붕괴는 필연적으로 계획경제의 붕괴, 그리하여 국유재산의 철폐로 이어질 것이다. 트러스트들과 공장들 사이에 유대는 무너질 것이다. 보다 성공적인 기업들은 독립의 길에 나설 것이다. 그들은 주식회사로 변모하거나 그 밖의 다른 전환기적 형태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이윤을 분점하는 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집단농장들은 훨씬 더 쉽게 해체될 것이다. 현재의 관료제적 독재가 새로운 사회주의권력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부활로 이어지고, 그에 따라 산업과 문화는 파국적 쇠퇴에 직면할 것이다.”

 

(167)

그래서 내가 찾아낸 한 가지 교훈은, 책이라는 것은 좋은 책/나쁜 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맞는 책과 내게 맞지 않는 책이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사실 내가 알고 싶어 하고 내가 궁금해 하는 내용을 내가 아는 용어로 전해주는 책이 내게 맞는 책인데, 이러한 책들이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이러한 책들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찾아내기만 하면 커다란 도움을 얻었던 것이 또한 사실이다.

 

(230)

이명박 전 대통령의 뻔뻔함’, ‘명랑함의 캐릭터 분석은 압권이다. 조금의 회한적인 얼굴빛도 없이 “5년간 행복한 대통령이었다는 그에게는 염려, 성찰, 자책 등 지도자의 필수 덕목은 없었다. 그는 대통령 역할에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캐릭터의 소유자이다(<행복한 권력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은 그 자체로 그를 안하무인의 정치이탈자, 타인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가진 자로 정의할 근거가 된다.(<유체 이탈, 정치 이탈>) 뻔뻔함과 안하무인, 너무도 부적격한 전직 리더들의 캐릭터는 희극적이고 절망적이다. 사과도, 미안함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절대 불감증의 두 사람이 통치했던 기간의 불행을 슬프도록 절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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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6 0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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