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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들(10대)은 자신들의 출구 전략으로 '문화'를 선택한다.문화를 통해서 자신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선생과 부모들에 대해 복수할 것을 결심한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이들이 부모한테 반항하는 패턴은 똑같다.부모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백인 중산층 부모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아이들은 그것을 잘 알았다.'화이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라는 부모 세대들을 대표하는 특성을 부정하면서 모든 종교적 교리를 넘어서는 비백인적 행동, 다시 말해서 음탕한 흑인의 밑바닥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이름이 바로 리듬앤블루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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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앤블루스라는 말의 '리듬'과 '블루스'는 모두 음암과 관련된 말이었다. 하지만 로큰롤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단순히 바위가 구른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록(rock)은 동사로 '부딪히다, 흔들다'의 뜻이고, 롤(roll)은 '구르다, 휘감다'라는 뜻이다. 리듬앤블루스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음탕한 네 개의 동사인 rock, roll, shake, rattle 중 두 개인 록과 롤로 만든 것이 로큰롤이다. 로큰롤은 흑인 은어로 남녀 간의 성교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성교를 뜻하는 은어로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말이 '빠구리"다. 아, 제주도에서는 '빠구리'는 '땡땡이친다'는 뜻이므로 제주도는 여기서 제외한다. 그런데 KBS의 음악 프로그램인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진행자자인 유희열이 새로 음반을 낸 YB를 소개하면서 "우리 YB의 새로운 빠구리 음악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라고 방송 진행을 했다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가 바로 영구 방송 출현 금지에 처해질 것이다. 로큰롤이라는 말 자체가 미국 기성세대의 주류 백인들에게 분노를 자아낼 수밖에 없는 개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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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이 강렬한 기타 연주에 전통 악기를 조합한 <하여가>를 발표할 때 머리를 꼬아서 레게파마를 하고 나온 것은 레게음악을 한다는 상징이었다. 레게파마는 한국식 영어였고, 정확한 단어는 '드레드록'(dreadlock)이다. 드레드록은 "나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을 신종하는 자입니다."라는 뜻이다. 라스타파라아니즘은 흑인왕국주의라는 뜻으로, 흑인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드레드록은 전사의 표식이다. "더 이상 백인의 지배를 거부한다. 나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의 전사, 라스타다"라는 표식이었다. 이렇게 모든 패션에는 다 이유가 있다.


(179)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댄스뮤직이다. - 리하르트 바그너


(197)

여기까지가 바흐가 죽고 난 후 베토벤이 죽고 난 뒤까지 약 79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이 시기 동안 우리가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태어났고 죽었다. 그리고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두 사건인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이때 모두 일어났다. 하루하루 역사가 매일 새롭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격동의 시기에, 모차르트의 짧은 35년간의 삶과 베토벤의 정말 파란만장했던 57년의 삶이 얹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기반 없이 이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시대를 만든 것도 있지만, 결국 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208)

바흐가 남긴 어록 중에서 정말 바흐를 잘 설명하는 한마디 말이 있다.


"누구나 나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나만큼 쓸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만, 바흐는 진심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바흐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는 아니었다.



(226)

요제프 2세는 그 오페라의 초연을 보고는 이렇게 딱 한 줄로 표현했다.


"친애하는 모차르트여, 그대의 작품에는 음이 너무 많은 것 같소."




(235)

하이든은 정말 끔찍이도 모차르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함부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번으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의 화음이 이상하다는 어떤 동료 궁정 음악가의 지적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그렇게 썼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지."



(252)

상황이 이렇게 달랐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창작의 동기도 달랐다. 모차르트의 꿈은 자기 작품을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작품은 630개가 넘는 그의 작품 중 몇 개 되지 않는다. 먹고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귀족들에게 위촉받은 것이나 후원자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반면에, 베토벤은 서양음악사 최초로 누구의 주문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작품을 쓴 작곡아였다. 물론 베토벤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헌정했다. 하지만 모차르트와는 달랐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헌정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곡을 써놓고 난 뒤에 누군가에게 떠맡기듯이 헌정을 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자기 마음대로 헌정을 해놓고는 돈을 달라고 한 적도 있다. 마치 맡겨놓은 돈이라도 있는 것처럼 작품을 헌정하고, 돈을 요구해서 받아낸 것이다.




(266)

"친구들이여, 박수를 쳐라! 연극은 끝났다."


베토벤의 유언이라고 알려진 말이다. 폼 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죽기 하루 전에 한 것이다. 실제로 베토벤은 이런 말을 끝으로 눈을 감는다.


"아깝다, 아까워. 너무 아까워!"


베토벤은 대체 뭘 아까워했던 걸까. 베토벤은 병석에서 와인을 주문했다. 그런데 그 배달이 조금 늦었다. 그는 마지막 와인을 먹지 못하고, 아니 따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와인 도착이 너무 늦었다고 한탄하면서 죽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을 규정하는 말 중에 나는 롤랑 마뉘엘의 이 문장을 가장 좋아한다. 


"베토벤은 음악을 기술에서 의식으로 만든 사람이다."



(270)

모차르트는 죽기 3개월 전 자신의 친구이자 최고의 동료였던 대본 작가 로렌초 다 폰테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썼다.


"쉬는 것보다 작곡하는 것이 덜 힘들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일을 한다."


굉장히 짠한 마음이 드는 말이다.



(272) 

그(모차르트)가 지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 스물두 살의 더벅머리 청년이 이 저주의 도시 빈에 등장했다. 그는 스승 하이든의 인도를 거부했으며, 한 번 밖에, 그것도 잠깐 보았을 뿐인, 모차르트의 오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계했다. 이 청년 베토벤은 모든 제단을 무너뜨리고 오직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권좌를 만들었다. 불손하기 그지없었던 베트벤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할 규범이란 없다."


나는 이 짤막한 한 줄이야말로 베토벤이 서양음악사에서 영원한 챔피온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학적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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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통권 148호 - 2016년 5월~6월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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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또 한번의 선거와 정치혁명]

0.76%.

지난 4월에 있었던 20대 국회의원 녹색당 정당 지지율이다. 내심 3%의 득표율로 원내 진출을 기대했으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성 정당의 높고 높은 벽이 엄청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3%까지는 어렵더라도 1%는 쉽게 넘을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벽이다. 여소야대라는 보기 드문 선거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당의 예상 외의 적은 득표율과 녹색당의 원내 진출 실패로 인해 그리 마음에 드는 결과는 아니다. 기성 정당들은 더욱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선거가 아닐까 생각했다. 대인배처럼 작은 정당의 권리를 알아주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있을까? 다른 나라처럼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원 자리를 주는 제도가 과연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을까? 이번 호에는 녹색당으로 종로에 출마했던 하승수 녹색당 대표가 쓴 정치혁명에 대한이 글이 있었다. 현재 다른 나라의 선거제도를 봤을 때, 그나마 대의제 민주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제도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생각한다.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석을 차지하는 것... 지역구 의원으로 국회의석을 일부 차지하고, 각 정당은 정당 지지율에서 부족한 만큼 비례대표제의 수를 받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정당지지율과 국회의석 수 비율을 맞추는 그런 제도다. 만일 지역구로 당선된 인원수가 정당지지율보다 많게 되면, 그만큼은 보상해 주는 제도. 그래서 간혹 전체 국회의원수가 의원 좌석 수보다 많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상당히 합리적인 제도이지만우리나라에는 그것을 도입하고 있지 않다. 그렇게 되면 손해를 보는 거대 정당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깝다. 그렇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되면, 작은 정당들의 원내 진입하는데 더 쉬워질 텐데

그러면 작은 정당들이 원내 진입하면 뭐가 달라질까? 그것은 뉴질랜드의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처럼 소선거구제를 가지고 있다가 제법 최근인 1990년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했다고 하고, 그 이후 두번째 선거에서 벌써 많은 좋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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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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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화를 보니, 부러우면서도 우리나라도 희망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게 된다. 일부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도 있고, 시민들의 여론이 형성이 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또 쉽게 희망을 품는다. 그렇기 위해서는 이런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정당에 힘을 실어주고, 표를 주어 연동형 비례대표 제도를 대세로 만들면, 결국 바꿀 수밖에 없지 않을까? 희망고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학의 붕괴]

이번 녹색평론의 부제는 '대학의 붕괴'. 언제부터인가 대학은 취업을 위한 학원 같은 곳으로 되어버렸다. 대학의 추구하는 가치관은 무엇일까? 대학의 평가에 취업률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우리나라 대학은 취업을 위한 곳으로 바뀌었고, 그것에 필요 없는 학과는 없어지고, 그것에 필요 없는 강좌는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무한 경쟁을 표방하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이외의 가치는 중요시 하지 않는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대학들은 대학평가 순위의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보다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그렇다고 대학이나 학생들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그 시스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대학의 문제가 우리나라에만 해당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다른 나라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녹색평론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맹주가 된 미국과 일본의 대학 문제점을 적은 글들도 실렸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유명 대학은 강의를 영어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영어로 강의를 하면 대학평가를 좋게 받기 때문이란다. 대학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로 위해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에 대한 단점은 고려되고 있지 않다. 실력은 우수하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하여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으로 교수 자격을 제한하게 되면, 그만큼 인력풀이 축소되는 것이다. 정말 이 한심한 제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음이 답답하다.

그런데, 자존심이 세다고 하는 일본에서도 그렇게 대학 강의를 영어를 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약간은 예상치 못했던 사실이다.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일본의 두 지식인이 토론을 하는데그들도 영어로 대학 강의를 하는 것은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 발췌글처럼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에 대한 부작용을 이야기하는데, 공감이 갔다. 아래 글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일본’을 ‘우리나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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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가 학문연구라는 고도의 의론의 장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일본어도 최첨단의 용어를 갖지 못하고 뒤떨어진 언어로 전락합니다일본어가 그렇게 열화된다면 그것이 또 일본 국민의 우민화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한편으로, 표면상으로 영어를 매끄럽게 말하는 엘리트들도 모어(母語)에 입각한 깊은 사고력이라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우수한 성과를 올릴 수는 없습니다결국, 일본 전체가 우민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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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에 오늘날 대학의 문제점에 대한 글이 많이 실려 있었다. 많은 글들에 공감이 갔다. 아래 발췌글들은 곧 나의 생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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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대학은 운영하는 대학본부는 대학의 운영 목표를 학문 탐구와 지적 성숙을 이끄는 교육에 두지 않는다그들의 관심은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관리하는 것이다따라서 대학의 관리체제는 기업의 관리체제와 같다기업의 경영 결과가 재무제표라는 숫자로 나타나듯이 대학의 운영 결과는 대학의 순위로 나타난다가령 순위평가에서 7위인 대학은 6위인 대학에 비해 좋지 않은 대학으로 자리매김되기 때문에 대학의 모든 노력은 순위를 올리기 위한 것이 되고순위평가에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부문은 대학 운영진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정부 역시 대학을 숫자로 관리하며, 그 숫자에 의해 재정지원 여부와 그 규모를 결정한다대학정보공시라는 제도는 겉으로는 각 대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취지이지만이 정보 공시에 나와 있는 정보는 그 학교에서 무슨 연구를 하며 어떤 교육을 받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대학에 대한 정보든 숫자이다학생의 수, 교수의 수, 논문 편수, 예산 규모, 유학생 수 등이 공시의 내용이며이러한 숫자를 나열하면 대학의 면모를 알리는 것으로 간주된다숫자가 지배하는 대학, 돈이 지배하는 대학에 대학의 본령인 학문과 교육은 없다대학은 이미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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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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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이 급진적 변화란 무엇인가사실상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초,중등교육은 물론 대학에서도 인문학과 예술 교육이 축소되고 있다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쓸모없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붙들린 정책결정자들의 눈에는 인문학이나 예술은 쓸모없는 장식에 불과한 것으로 비쳐지고 있을 뿐이다그리하고 그것들은 학교의 교과과정에서그리고 부모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빠른 속도로 설 자리를 잃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과학과 사회과학이 갖고 있는 인문학적 측면-상상력과 창조성에 관계된 요소 및 엄격한 비판적 사고-도 단기적인 이익추구에 혈안이 된 국가정책 때문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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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세계시민이 되자면 정말 인문학이 필요한가세계시민이 되자면 우선 많은 사실적 지식이 필요하지만그러한 지식은 인문적 교육 없이도 획득할 수 있다그러나 책임 있는 시민이 되자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즉 역사적 증거를 평가하고, 경제적 논리들을 사용하고그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며사회적 공정성 여부를 평가하고, 외국어를 말하며세계의 주요 분쟁지역들의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사실적 부분들에 관한 지식만을 얻는 데는 인문학과 연관된 지적 기술이 없이도 가능하다그러나 그 연관관계들의 어떻게 되는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실적 지식만을 갖는 것은 거의 무지만큼 나쁜 것이다왜냐하면 그런 경우학생들은 정치가들이나 문화적 선도자들이 제공하는 상투적인 것과 진실한 것 사이를진짜와 가짜 사이를 구분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세계 역사나 경제에 관한 이해가 지적으로 총명한 세계시민의 육성에 쓸모 있는 것이 되려면 인문적, 비판적 능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고따라서 종교나 정의에 관한 철학적 이론에 대한 학습과 나란히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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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도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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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글쓰기]

녹색평론 몇 호 전부터 글쓰기에 대한 글이 연재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어서인지, 녹색평론에서도 그것을 기획했던 것 같다. 그 연재가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시인이자 경희대 교수인 이문재라는 분이 쓰신 글인데,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으로 어르신 분들의 글쓰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가면 갈수록 세대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그런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로 글쓰기를 제안하고 있었다. 어르신들이 노년에 글쓰기를 많이 하고, 그 글들을 젊은 세대와 공유하면 세대간 양극화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글쓰기는 모든 세대 많은 사람들이 하면 좋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글들을 공유하고 그런 글들이 여론을 만들어내고그렇게 되면 오늘날 정치가 유권자를 무시하는 행태도 글쓰기를 통해서 여러 사람과 공유하게 되면 그들도 무시 못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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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우리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회를 들여다보는 글쓰기의 저자로 거듭난다면 현실정치가 지금과 같은 파행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현실정치가 유권자를 이토록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자율적 인간, 그리고 자율적 인간이 형성하는 공동체가 가져야 할 기본 능력이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이다재차 강조하지만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글쓰기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분노와 절망을 글로 써내고, 꿈과 희망을 공유해야 한다위에 인용한 글의 저자가 말했듯이 소망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그라민은행을 설립하고 '소셜픽션'을 창안한 무하마드 유누스가 말했다. "꿈은 함께 꿀 때 더 빨리, 더 크게 이뤄진다." 사회적 글쓰기는 함께 꾸는 꿈이다. 집단지성이고 소셜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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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에 실렸던 글쓰기에 대한 연재는 단행본으로도 출간된다고 한다. 나중에 기회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 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 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 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 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 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 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 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 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도, 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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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자본주의의 사란 이 공공재를 특권적인 소수의 강자들이 배타적으로 점유, 사유화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농민이나 하층민들이 삶더와 생계수단을 빼앗기고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거나 임금노예의 삶을 강요당해온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 축적 단계에서 벌어진 이러한 폭력적 사태는, 실은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에 국한된 게 아니라 지금까지 그 본질은 조금도 변함없이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어왔다. 즉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데이비드 하비,<신자유주의 약사>, 2005)은 자본주의의 일관된 작동 기제라 할 수 있다.


(22쪽)

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 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애 없었고, 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 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 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 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86쪽)

대학은 운영하는 대학본부는 대학의 운영 목표를 학문 탐구와 지적 성숙을 이끄는 교육에 두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의 관리체제는 기업의 관리체제와 같다. 기업의 경영 결과가 재무제표라는 숫자로 나타나듯이 대학의 운영 결과는 대학의 순위로 나타난다. 가령 순위평가에서 7위인 대학은 6위인 대학에 비해 좋지 않은 대학으로 자리매김되기 때문에 대학의 모든 노력은 순위를 올리기 위한 것이 되고, 순위평가에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부문은 대학 운영진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정부 역시 대학을 숫자로 관리하며, 그 숫자에 의해 재정지원 여부와 그 규모를 결정한다. 대학정보공시라는 제도는 겉으로는 각 대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취지이지만, 이 정보 공시에 나와 있는 정보는 그 학교에서 무슨 연구를 하며 어떤 교육을 받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학에 대한 정보든 숫자이다. 학생의 수, 교수의 수, 논문 편수, 예산 규모, 유학생 수 등이 공시의 내용이며, 이러한 숫자를 나열하면 대학의 면모를 알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숫자가 지배하는 대학, 돈이 지배하는 대학에 대학의 본령인 학문과 교육은 없다. 대학은 이미 몰락하였다.



(88쪽)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 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 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142쪽)

이 급진적 변화란 무엇인가? 사실상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초,중등교육은 물론 대학에서도 인문학과 예술 교육이 축소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하가 위해서 쓸모없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붙들린 정책결정자들의 눈에는 인문학이나 예술은 쓸모없는 장식에 불과학 것으로 비쳐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고 그것들은 학교의 교과과정에서, 그리고 부모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빠른 속도로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과 사회과학이 갖고 있는 인문학적 측면-상상력과 창조성에 관계된 요소 및 엄격한 비판적 사고-도 단기적인 이익추구에 혈안이 된 국가정책 때문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148쪽)

세계시민이 되자면 정말 인문학이 필요한가? 세계시민이 되자면 우선 많은 사실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인문적 교육 없이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시민이 되자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즉 역사적 증거를 평가하고, 경제적 논리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사회적 공정성 여부를 평가하고, 외국어를 말하며, 세계의 주요 분쟁지역들의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실적 부분들에 관한 지식만을 얻는 데는 인문학과연관된 지적 기술이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연관관계들의 어떻게 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실적 지식만을 갖는 것은 거의 무지만큼 나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학생들은 정치가들이나 문화적 선도자들이 제공하는 상투적인 것과 진실한 것 사이를, 진짜와 가짜 사이를 구분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나 경제에 관한 이해가 지적으로 총명한 세계시민의 육성에 쓸모 있는 것이 되려면 인문적, 비판적 능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고, 따라서 종교나 정의에 관한 철학적 이론에 대한 학습과 나란히 이루어져야 한다 



(149쪽)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 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 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고, 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154쪽)

<일본의 '영어화' 정책, 망국으로 가는길>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두 지식인의 토론 중에서...

일본어가 학문연구라는 고도의 의론의 장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 일본어도 최첨단의 용어를 갖지 못하고 뒤떨어진 언러로 전락합니다. 일본어가 그렇게 열화된다면 그것이 또 일본 국민의 우민화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표면상으로 영어를 매끄럽게 말하는 엘리트들도 모어(母語)에 입각한 깊은 사고력이라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우수한 성과를 올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일본 전체가 우민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179쪽)

우리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회를 들여다보는 글쓰기의 저자로 거듭난다면 현실정치가 지금과 같은 파행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정치가 유권자를 이토록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율적 인간, 그리고 자율적 인간이 형성하는 공동체가 가져야 할 기본 능력이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분노와 절망을 글로 써내고, 꿈과 희망을 공유해야 한다. 위에 인용한 글의 저자가 말했듯이 소망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그라민은행을 설립하고 '소셜픽션'을 창안한 무하마드 유누스가 말했다. "꿈은 함께 꿀 때 더 빨리, 더 크게 이뤄진다." 사회적 글쓰기는 함께 꾸는 꿈이다. 집단지성이고 소셜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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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참고] 스포일러 포함/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법은 정의인가?]

이번에 읽은 책은 여행 길에 읽으려고 집어 든 책이다. 여행길에는 재미있는 소설이 제격이니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은 늘 재미는 보장하니까 말이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 이 소설 또한 재미있었다. 그리고 소설을 읽고 나서는 생각거리를 받았다. 일본의 사회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우리나라에도 똑같은 상황이다. 요즘 밤거리를 다니질 못할 정도로 잔인한 범죄가 많이 일어난다. 특히 묻지마 범죄와 같은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사건들. 더욱이 어린아이나 여자들, , 약자를 노리는 범죄들... 뉴스 보기가 두려울 정도다. 이 잔인한 범죄에 여론은 가해자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지만, 여론의 기대와 달리 법은 너무나 가볍게 판결이 나는 경우가 많아서, 사람들은 또다시 격분하게 된다. 특히 미성년자가 가해자인 경우는 더욱 형벌은 가벼워진다. 이런 판결에 과연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은 고려된 것인가? 사람들은 판사의 가족이 피해자가 되어봐야 한다는 격한 말도 쏟아낸다. 이번에 읽은 <방황하는 칼날>이라는 소설은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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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법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미성년인 경우,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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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피해자는 고려하지 않는 법. 그럼, 그 법은 정의인가? 항상 옳은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법은 늘 바뀌기 때문이다. 그럼, 경찰은? 절대진리가 아닌 늘 변하는 법을 수호하고 있다. 경찰은 법을 지키는 것이 맞는가경찰은 선량한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 복수의 시작]

아내와 사별하고 고등학생인 딸 에마와 단둘이 살아가는 나가미네. 그에게 에마의 살아가는 이유였고, 행복의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날 에마가 친구들과 불꽃축제를 갔다가 집에 오지 않았다. 실종. 앞이 캄캄해진... 나가미네... 그런데, 며칠 뒤 인근 강에서 에마가 시신을 발견되었다. 분노... 돌이킬 수 없는...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고,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딸의 전화로 그에게 누군가 전화를 했다. 목소리를 변조되어 있었지만자신의 딸을 죽인 이는 아쓰야와 가이지라는 10대 소년들이라고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아쓰야의 집에 가면 증거를 찾을 수 있다면서, 집의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나가미네는 경찰에 이야기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혼자 가보았다. 전화 속 목소리가 알려준 곳에 가니 정말 원룸이 있었고, 그가 이야기한대로 숨겨진 열쇠를 찾을 수 있어 그곳을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충격 그 자체. 수많은 성폭행 동영상 속에 에마가 성폭행 당하는 장면이 그대로 녹화되어 있었다. 범인들이 에마에게 마약을 투여하는 장면도 있고그 이후 에마가 정신을 잃는 장면들이 그대로 녹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마의 옷도 발견하였다. 충격보다 분노가 앞섰고, 그는 이미 이성을 잃었다.

그때 아쓰야가 집에 들어왔다. 그 비디오 속 소년이 현실 속에 나타난 거다. 나가미네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아닌 어떤 사람이라도 그랬을 거다. 그는 칼로 아쓰야를 마구 찔렀다. 그리고 아쓰야는 죽기 전에 가이지가 나가노에 있는 별장에 갔다고 이야기했다. 아쓰야를 죽여도 그는 아직 분노를 삭힐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가야지 마저 죽이기로 했다. 그 후에 자수할 계획이었다. 그것만이 이유 없이 죽은 에마의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경찰에게 이야기하면 가이지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감옥에 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는 못하지...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나가미네를 옹호하게 되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예전에 취미 때문에 구입했던 사냥총을 가지고 나가노로 향했다. 아쓰야는 친구에 의해 발견되었고, 아쓰야의 집에는 나가미네의 지문이 잔득 묻어 있어서 경찰은 곧 아쓰야를 죽인 범인 나가미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보자]

나가미네에게 전화를 해서 범인을 알려준 사람은 마코토라는 소년으로 범인들의 친구였다. 그는 아쓰야, 가이지가 에마를 납치하는 현장에 같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코토의 아버지의 차를 이용해서 에마를 납치했었다. 마코토는 그들과 어울리긴 했지만그들이 사람들을 납치하고 성폭행하는 것에 대해 껄끄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도 아빠의 전화를 받고,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며칠 뒤 아쓰야가 당황한 얼굴로 찾아와서 마코토의 아버지의 차를 다시 빌려달라고 했고,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날, 자신들이 납치한 여자애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충격. 마코토는 자신도 공범으로 몰릴까 걱정했지만, 아쓰야가 그에게 협박을 해서 경찰에게 알리지도 못했다.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이 주운 죽은 여자애의 핸드폰에 저장된 그의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그 일이 있고 아쓰야가 죽은 채 발견이 되었고, 그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자신의 아빠에게 모두 이야기했다. 마코토의 아빠는 그를 숨기면서도 자신의 아들이 감방에 가지 않게 하려고, 마코토에게 있었던 일을 그에게 유리하게 윤색시킨 다음 경찰에 자수하도록 시켰다.

이제 경찰은 사전의 내막을 모두 알게 되었다. 아쓰야, 가이지가 아무런 죄 없는 에마를 납치해서 성폭행을 하고마약주사를 투여했는데, 그 약물반응으로 에마가 죽은 것이고, 에마의 아빠 나가미네가 어찌저찌 해서 범인을 알게 되어 아쓰야를 죽였다는 것. 나가미네는 이젠 피해자에서 살인용의자의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경찰 내부에서도 나가미네의 그런 복수극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그리고 법이 미성년자의 가해자에게 어떤 판결을 할 것인지 예상을 하니까이 사건은 큰 이슈가 되어 방송을 타고, 나가미네 얼굴은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소년범죄에 대한 가벼운 형벌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도와야하나, 신고해야 하나]

나가노에 그렇게 팬션이 많은 줄 몰랐다. 나가미네는 가발도 쓰고 수염도 기르고 선글라스를 쓰고, 변장한 상태로 나가노의 팬션들을 돌아다녔다. 그도 그곳에 한 팬션을 얻어서 생활했다. 그곳은 와카코라는 여자와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팬션이었다. 와카코라는 여인도 아픈 과거가 있었다. 자신의 방심으로 세 살 짜리 아들을 사고로 잃었고, 그로 인해 남편과 이혼까지 하게 된 아픈 과거가 있었다. 와카코가 죽은 아들의 사진 보정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나가미네는 자신이 잘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와카코는 나가미네가 바로 뉴스에서 봤던 딸을 죽인 범인을 살해한 용의자란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가 외출했을 때, 그의 방에서 그의 노트북에서 그의 딸이 어떻게 폭행당했는지 생생하게 보았다. 그 이후, 와카코는 갈등에 빠졌다. 신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그녀를 도와주고, 그의 모습을 보면 심성이 착한 사람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식이 죽었을 때의 심정이 어떤지 와카코 또한 잘 아니까 말이다. 와카코는 나가미네와 단둘이 있을 때 이야기했다. 당신이 뉴스에서 본 그 사람이란 걸 안다고.... 하지만 도와주고 싶다고. 나가미네는 와카코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녀를 믿기로 했다. 펜션을 떠난 그에게 은신처도 제공했고, 인근의 펜션의 손님의 사진들을 찍어서 그에게 주기도 하는 등 그를 도와주었다. 나가미네... 좌절을 느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가이지를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의문의 전화가 또 왔다. 가이지가 묵고 있는 펜션을 알려준 것이다. 망하고 폐허가 된 펜션에 묵고 있다고 했다. 나가미네는 준비를 하고 그곳을 향하기로 했다. 근처까지 와카코가 태워주기로 했고사실 와카코는 그곳에 가서 나가미네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만 멈추고, 자수를 하라고... 왠지 자신이 이야기하면 들어줄 것 같았다.

 

[경찰은 법을 지키는가? 시민을 지키는가?] 

경찰도 가이지가 나가노에 숨어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마코토는 더 급해졌다. 가이지가 경찰에 잡히고 나면, 얼마 안 있다 풀려나게 되고... 그러면 자신은 배신당했다고 그에게 어떤 짓을 당할지 몰랐다. 이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나가미네가 가이지를 죽이는 것 뿐이다. 가이지가 마코토에게 전화를 걸어 왔기 때문에 마코토는 가이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마코토는 다시 나가미네에게 전화를 해서 가이지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경찰은 가이지가 묵고 있는 펜션을 알아내고 그곳에 도착했지만, 가이지는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 가이지의 협박으로 같이 있던 소녀만 있었다. 경찰은 마코토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이지의 행적을 알 수 있었다. 가이지는 또 마코토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마코토는 가이지와 지하철 역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경찰은 그곳으로 총출동을 했다. 마코토는 이제 더 시급해졌다. 빨리 나가미네에게 연락을 주어야 하는데, 경찰들이 그의 주변을 계속 감시하고 있어서 방법이 없었다...

한편, 나가미네는 또다시 목소리를 변장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가이지가 나타나는 장소와 시각을 알려줬다. 가이지는 마코토와 약속한 정확한 시간에 나타났다. 그때 총을 꺼내든 나가미네도 출현. 가이지를 향해 조준. 그때…. 나가미네 씨를 부르는 목소리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와카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나가미네는 마지막 순간 흔들렸다. 그때 들린 총성... 경찰이 쏜 총. 나가미네는 그 총을 맞고 죽었고, 가이지는 경찰에 잡혔다. . 또 하나의 살인이 막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나가미네가 딸의 복수를 하지 못해 억울하다고 해야 하나. 어떤 생각을 가져야 맞는가? 혼란스럽다.

아참, 마코토가 어떻게 나가미네에게 가이지의 마지막 약속 장소를 알려주었을까? 사실 그 약속 장소를 알려준 것은 마코토가 아니다. 경찰이었다. 경찰 중에서도 현재의 법이 잘못되었고, 나가미네가 가이지를 죽였으면 바랬던 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경찰은 경찰이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짓밟아도 되느냐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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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절대적으로 옳다면 왜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을까? 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네.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왜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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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 법의 가벼움을 이용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무서운 세상이다. 무엇인가 잘못된 시스템… 누군가는 이 시스템을 고치려고 노력을 하고 있을까?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절대적으로 옳다면 왜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을까? 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네.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왜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

"오히려 법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미성년인 경우,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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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절대적으로 옮다면 왜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을가?

법은 결토 완벽하지 않네.

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왜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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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법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미성년인 경우,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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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러했다. 자기의 생활만 보장되면 

다른 사람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년범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느냐?

문제 해결을 위해서 무슨 노력을 했느냐?

그렇게 물으면 그도 대답을 할 수 없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기 역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공범자라는 사실을.

공범자에게는 죗값을 치러야 할 책임이 똑같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번에 선택된 사람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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