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쪽)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제대로 순환해야 건강하다.

순환이 원할치 못하면 병에 걸리고, 멈추면 죽는다.

38억 년 동안 살아온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개체의 삶은 짧아도 개체들이 모인 종의 수명은 길듯,

종들이 어우러진 생태계의 수명은 더욱 긴데,

순환되는 생태계는 38억 년 동안 지구를 건강하게 이끌고 있다.

영국의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라고 주장한다.

진화와 멸종을 반복하면서 표면의 수많은 생명체들이 숨 쉬고 먹고 배설한 이래,

지구는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면서 대기를 구성하는 원소의 균형을 변함없이 유지해 왔다며

그는 지구를 '대지의 여신', 즉 '가이아'라고 찬미했다.



(41쪽)

어떤 곤충을 해충이라 배척한다면 익충이라 반기는 곤충도 있을 테지.

그런 곤충들에게 사람은 어떻게 인식될까?

광대무변의 탐욕을 가진 생물은 아닐까?

지구촌에서 가장 늦게 동참해 생태계를 제멋대로 교란한 인간은 편견도 참 많다.

가치중립을 외치는 점잖은 곤충도감도 바퀴를 해충이라고

몰아붙이는데 뒤지지 않지만,

생태계에 잡초가 없듯이 해충도 있을 수 없다.

다 나름대로 질서를 가진 존재의 이유와 가치가 있다.

파리와 모기, 그리고 바퀴가 사람에게 질병을 옮긴다지만

사실 사람에게 질병을 옮기고 싶을 리 없다.



(60쪽)

겨울철새는 단순히 운이 나빴던 걸까?

앞서 내려앉은 철새들이 평화롭게 내려갔을 뿐인데.

내려와 보기 웬 구더기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허기진 철새에게 구더기는 반가운 영양식임에 틀림없으니 허겁지겁 먹었을테고,

이윽고 구더기는 보툴리눔 균을 겨울철새에 전파시킬 수밖에 없었을 터.

정신은 멀쩡한데 슬그머니 온몸은 마비되더니 날 수가 없다.

공포에 질려 물에 떠 있을 수밖에 다른 방법도 없는데

창공에서 그 모습을 본 철새들이 연이어 내려온다.

그리고 구더기를 허겁지겁 훑어 먹는다.

구더기들은 유수지에 맥없이 떠 있는 철새의 옆구리를 뚫고 꾸물꾸물 연실 빠져나온다.



(88쪽)

개중에 미꾸리도 있었을 테지만 

우리는 암갈색에 거무튀튀한 무늬가 지저분하게 배열된 녀석들을 통틀어 미꾸라지라 했다.

미꾸리는 분류학적으로 미꾸라지와 매우 가까울 뿐 아니라

사는 곳도 같아 전문가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구별하기 어렵다.

입주변 5쌍의 수염이 미꾸라지보다 짧고 비늘도 작고

몸도 날씬한 편이라지만 그 정도로는 구분하기 어렵다.

성능 좋은 돋보기로 옆줄의 비늘을 세어 150개가 넘으면 미꾸리,

모자라면 미꾸라지라고 전문가는 판정할 것이다.

미꾸라지와 미꾸리는 창자 호흡을 한다.

그래서 항문으로 공기방울을 내놓기도 하는데,

그것을 보고 '밑이 구리다'했고, 그래서 미꾸리가 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인데,

미꾸리가 미꾸라지보다 창자 호흡에 많이 의존하는 모양이다.



(152쪽)

대부분의 민물고기가 그렇듯, 강물이 따뜻해지는 5월마다 짝짓기에 들어가는 누치는

겨울이 유난히 길었던 2010년이 더욱 불안했을 터.

지구온난화 탓으로 번식 시기가 앞당겨지는데 얼음이 늦게 녹지 않았나.

봄이 짧아지리란 걸 직감해 모래와 자갈 바닥을 선점하려 애썼을 텐데, 아뿔싸!

어느 날 다가온 삽차 떼가 모래를 마구 퍼올리며 흙탕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수온이 찬 계절이라면 호흡량이 작아 견딜 만했는데,

따뜻해지면서 숨이 막혀왔을 것이다.

겨울밤에도 쉬지 않는 삽차들이 시멘트 가루가 따뜻해진 하천으로

독극물처럼 스며들자 그만 목숨을 내놓아야 했을지 모른다.



(181쪽)

한겨울 동해의 북쪽, 검푸른 바다에서 올라오던 '명태'는 

함경도 명천군의 태가 성을 가진 어부가 잡았다 하여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명태는 상태에 따라 이름도 다양하다.

꽁꽁 얼렸다 얇게 떠 전으로 부쳐먹는

'동태'와 소비자 손에 넘어갈 때까지 얼리지 않아

살이 부들부들한 '생태', 

햇빛이 강한 영하의 덕장에서 40일간 얼다 녹기를 반복하여 부드러운 황색으로 말린 황태와 

고성 해안에 다짜고짜 두 달 동안 바싹 말려 단단해진 '북어'만이 아니다.

어린 녀석을 비쩍 말린 '노가리'와 

노가리보다 조금 큰 '코다리'도 무시하면 안 된다.

주머니가 얇은 주당의 안주로 그만이 아닌다.

그토록 우리 삶에 밀착된 명태, 

민속학자 주강현은 조기와 함께 제사상에 올라간다는 걸 상기한다.

인간에게 절 받는 지체 높은 생선이라는 것이다. 

요즘 명태는 '금태'다.

금처럼 귀하다는 뜻일 게다.



(227쪽)

법적으로 허가된 외래동물이라도 입양하려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단순히 호기심이나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들여놓았다가 귀찮아 방치하거나 버리는 태도는

생명에 대한 폭력이고 외래동물의 개성을 무시하는 결례다.

유리상자 안에 꼼짝 못하고 던져주는 먹이만 받아먹는 외래 개구리,

몸 돌리기 비좁은 응접 테이블에 갇힌 악어,

에어컨 켜 놓은 거실 한 구석에 웅크린 채

투명한 상자를 두드리는 사람을 외면하는 카멜레온, 이구아나와 목도리도마뱀은

죽지 못해 살아갈 따름이다.

처지를 바꿔 그들의 복지를 생각해 보라.



(272쪽)

인간이 그은 국경에 관심이 없는 봉순이는 하필 봉하마을에 내렸다. 우연일까?

유기농업으로 자리를 잡은 지역답게 주변 화포천은 

주민들의 정화작업으로 깨끗해졌고,

생태계가 살아나면서 황새의 먹이가 될 생물이 충분히 늘어났다는 걸

감지한 능력 덕분이겠지.

사람이 던져주는 먹이만 먹던 미호에게 봉순이와 같은 능력이 있을까?

있어도 발휘되기 일렀을지 모르는데,

봉순이와 잠시 떨어진 사이 쓰러진 미호는 자칫 못 일어날 뻔했다.

엉뚱한 지역의 하천에서 농약에 오염된 먹이를 먹었다는 게 아닌다.

하지만 미호도 덩치가 큰 만큼 잘 이겨냈고,

그 사건은 소중한 경험이 되었겠지.



(330쪽)

바다 중에서 생태적 가치가 가장 높은 곳은 대륙붕이고,

대륙붕 중에서 단연 갯벌이다.

세계의 해양학자들은 면적으로는 5번째지만

생태적 가치로 볼 때는 최고라고 우리나라 갯벌의 가치를 평가했단다.

그도 그럴 게, 조수간만의 차가 큰 만큼 조간대가 드넓지 않은가.

서해안 갯벌은 해안에서 수 킬로미터로 펼쳐졌다.

그 넓은 조간대에 날아드는 도요새와 물떼새,

오리와 기러기 종류의 종 다양성은 철새를 연구하는 조류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우리 갯벌은 반드시 보전해 주기를 국제사회가 권고하는

'람사 국제 보호 습지'에 해당하는 '세계 3대 철새 이동통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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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돈이 많고 적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의 크기,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삶의 철학과 가치'에 따라 달라지므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기본적인 자립은 의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실제 많고 적음, 크고 작음도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음, 많고 적음과 같이 두 종류만이 존재하고,

그 두 가지를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제 잣대로 삼아 휘둘려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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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육 철학은 미국의 경쟁 문화와 일본의 식민지 교육의 열기를 혼합한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고,

좋은 직업은 좋은 보수를 받고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등식이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지돼 왔다.

또한 오랫동안 문명은 비문명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며,

가난은 벗어야 할 것으로 선전하면서, 

가난을 벗어나려면 '도시에서 받는 문명 교육'이 필요하다고 계몽해 왔따.

그리고 이러한 문명과 교육은 한 궤를 달리면서 

자본주의 사상과 문화를 전 세계적 단일 경제시장으로 형성하는 데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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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이란 우리 삶을 관통하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사회와 국가에 바라는 것이 많았다.

국가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움직여 줄 것이라는 환상이 있었기네,

바라는 것만큼 현존 사회가 국가를 개조하기 위한 투쟁을 했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우리 개인의 행복을 위해 싸워온 적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내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흙이나 자연 속에서 지내는 것이 나의 본연의 행복을

찾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흙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수치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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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은 귀하고 무엇은 천하다고 여기면 마음이 불편하다.

무엇이든 귀하다고 여기든지, 아니면 무엇이든 다 천하다고 여기게 되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귀천의 분별로 마음을 태울 일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비는 이기고 지는 결말을 노린다.

이기면 옳은 것이고 지면 그른 것이라는 비참한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그래서 시비는 사람을 강박하게 하고 잔인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의 시비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말고,

그저 자신이 입맛대로 살아가되

다른 이의 입맛을 배타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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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전 -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성철.법정 지음 / 책읽는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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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있음.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이 책은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책 전용 SNS인 북플이라는 곳에서 알게 된 책이다. 법정 스님을 좋아해서 책에 눈이 바로 갔다. 법정 스님이 떠나신 봄이 벌써 여섯 해 전이다세월이 참 빠르다. 그는 떠났지만, 여전히 마음 속에는 그가 늘 자리잡고 있다. 그런 법정 스님이 성철 스님과 나눈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설전>이라는 책이다. 부제가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라고 되어 있다.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라는 말씀으로 유명하신데, 나는 성철 스님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성철 스님이 입적하신 것이 1993년이었다고 하니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책과 담을 쌓고 지내던 시절이라서, 그 분의 책을 접하지 못한 듯성철 스님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책을 통해서 그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어 좋았다. 이 책은 부제에서 말한 것처럼 법정 스님이 묻고, 성철 스님이 답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법정 스님보다 성철 스님의 생각이 더욱 많이 드러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으로 치면 대담이나 토크콘서트를 책으로 엮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묻고 답하는 경우, 답하는 사람이 주인공인 것이 맞지만, 좋은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좋은 질문이다. 이 책은 책의 뒷표지에 적힌 것처럼 현문과 현답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다. 그리고 책에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자연의 사진들이 많이 들어있다. 그래서 금방 읽을 수 있지만, 그 적은 양이 담고 있는 슬기와 교양은 깊은 심금을 울린다.

 

[눈싸움]

책 제목 설전. 설전이라고 하면 말로 옳고 그름을 다툰다는 설전(舌戰)이 바로 생각이 난다. <썰전>이라는 TV 프로그램도 생각이 나고그런데 책 제목에 옆에 적혀 있는 한자를 보니 눈 설(), 싸울 전(). 이라고 써있다. 우리말로 해석해보면 눈싸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눈이 온 겨울이면 눈을 뭉쳐서 던지면서 놀던 그 눈싸움. 책제목을 왜 그렇게 지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후반부의 대화 주에 두 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많은 시주들 앞에서 이루어진 대화가 있다. 다른 제자들은 성철 스님 앞에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는데, 법정 스님은 성철 스님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꼬치꼬치 캐묻기도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좀더 진면목의 답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이렇듯 두 분이 서로 주고 받는 말씀이 마치 즐거운 눈싸움 같았기 때문에 제목을 눈싸움이라는 뜻의 <설전(雪戰)>이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나중에 책 뒷날개를 보니 아래와 같이 책제목이 <설전(雪戰)>인 이유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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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냉철하면서도 부드러운 수도자의 자세를 눈이라는 매개로 형상화 하는 한편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웃게 만드는 유일한 다툼인 

'눈싸움'의 이미지를 통해 설전과 법정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구도의 문답과 인연을 표현하고자 했다

=====================================

 

[삶과 불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불교에 관한 이야기. "불교란 무엇입니까?", "타 종교와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등 처음 불교를 접하는 사람들이 가질 만한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질문들도 있고, 중도 이론이나 중국 선종에 관한 질문 등 비교적 불교를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선 질문과 답변도 오가곤 했다. 아무래도 두 분이 불교 신도들 앞에서 나눈 대화들도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예전에 불교에 관련된 책들을 좀 접해서 그리 낯설지 않게 읽으면서, 오랜만에 불교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새기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그런데 이 책을 법정 스님이 생전에 쓰신 수필집처럼 생각하고 책을 편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의 대화의 또 다른 주제는 우리네 삶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한 질문들도 오가곤 했다. 많은 대화 중에 요즘 우리나라 언론이 새겨들었으면 하는 내용과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특히 공감을 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우리나라 언론의 편향성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생각들 하고 있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 중에도 주요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분명 다른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히려 대안 언론을 찾아 듣는 이들이 더 많다.

객관성이 결여되고 주관성이 깊이 개입한 기사들... 그런 언론들을 향해 성철 스님이 주시는 깊은 가르침 같은 글이 실려 있었다. 그들이 들을 리 없겠지만 말이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졌으니, 그들은 더욱 편향적이 될까 싶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욱 편향적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

어떤 언론이든지 사회의 공기라는 것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는 근본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이용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곤란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춘추필봉(春秋筆鋒

말 그대로 시퍼런 필봉을 세워 나가야만 사회에 공헌을 하고

사회에 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언론이 근본정신을 버린다면 사회와 인류에 해를 주지 않겠어요?

지금도 잘하고 있겠지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한 필봉으로

춘추필봉을 발휘하면 사회를 잘 선도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살릴 수 있겠지요.

=====================================

...

그리고 지도자의 덕목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다시 읽고 발췌해 보았다. 이 쉬운 지도자의 덕목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나마 이번 선거에서 그런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이 회초리를 들어준 것을 보고, 아직 우리 백성들의 힘은 세다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희망을 보았다.

=====================================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근본 전제가 사리사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정치하는 사람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이 되고 맙니다.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면 그 단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죠.

그렇게 하려면 사리사욕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면 그 단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을 버려야만 국가도 살고 민족도 살고 단체도 살고 자기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정치를 결국엔 국가와 민족에 큰 손해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란 참으로 사리사욕을 완전히 버린 

무아(無我)사상에서 전체를 위해 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어떤 언론이든지 사회의 공기라는 것,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는 근본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이용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곤란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춘추필봉(春秋筆鋒)
말 그대로 시퍼런 필봉을 세워 나가야만 사회에 공헌을 하고
사회에 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언론이 근본정신을 버린다면 사회와 인류에 해를 주지 않겠어요?
지금도 잘하고 있겠지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한 필봉으로
춘추필봉을 발휘하면 사회를 잘 선도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살릴 수 있겠지요.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근본 전제가 사리사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정치하는 사람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이 되고 맙니다.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면 그 단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죠.
그렇게 하려면 사리사욕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면 그 단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을 버려야만 국가도 살고 민족도 살고 단체도 살고 자기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정치를 결국엔 국가와 민족에 큰 손해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란 참으로 사리사욕을 완전히 버린
무아(無我)사상에서 전체를 위해 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30쪽
내가 자꾸 깨친다 깨친다 하는 것은 사람이 그런 깨칠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다면 만날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오. 땅 밑에 금이 많이 있는 줄 알면,
거기에 금이 꼭 있을 것 같아서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암만 파도 금이 없을 것 같으면 헛일이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도 헛일입니다.
문제는 그 광맥이 사람 사람 마다에 다 있나 없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런 무진장한 대광맥,
금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 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이것을 개발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 불교의 근본 생명선입니다.

46쪽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모든 생각을 쉬어 버리는 것, 이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구하는 생각, 이것이 마음에 들어 있으면 아무리 섭생을 잘해도 소용이 없거든요.
그런 구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떨쳐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쉬고 사는 이것이 건강에 좀 도움이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85쪽
흔히 `용서를 하자. 용서를 하자`고 하는데, 불교의 근본사상에 용서란 없습니다.
용서란 내가 잘하고 남이 잘못됐다는 것인데,
모든 것의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며,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남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칼로 나를 찌른다 할지라도
찌르게 한 것의 근본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회`를 해야지 저 사람을 `용서`하다니요.
그래서 우리 불교사전에서 `용서`라는 말을 빼야 한다고 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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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쪽

내가 자꾸 깨친다 깨친다 하는 것은 사람이 그런 깨칠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다면 만날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오. 땅 밑에 금이 많이 있는 줄 알면,

거기에 금이 꼭 있을 것 같아서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암만 파도 금이 없을 것 같으면 헛일이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도 헛일입니다.

문제는 그 광맥이 사람 사람 마다에 다 있나 없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런 무진장한 대광맥, 

금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 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이것을 개발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 불교의 근본 생명선입니다.



46쪽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모든 생각을 쉬어 버리는 것, 이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구하는 생각, 이것이 마음에 들어 있으면 아무리 섭생을 잘해도 소용이 없거든요.

그런 구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떨쳐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쉬고 사는 이것이 건강에 좀 도움이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79쪽

그러면 왜 우리는 '중생'이라고 하고, '사바세계'라고 하는가?

내가 비유로써 말하는데, 아무리 한낮에 해가 떠서 광명이 우주에 충만해 있더라도

눈먼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설사 눈감은 사람이 광명을 보지 못한다 해도 광명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해는 떠서 온 우주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생이 본래 부처이고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지만

우리가 눈을 감고 있어서 본시 부처인 중생을 바로 보지 못하고,

본시 절대인 이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바로 뜨면, 광명을 따로 찾을 것 없고 극락을 따로 찾을 것도,

부처를 따로 찾을 것도 없습니다.

그리하면 이리 가도 부처, 저리 가도 부처, 여기도 극락세계, 저기도 극락세계,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해결되지 않느냐 말입니다.



85쪽

흔히 '용서를 하자. 용서를 하자'고 하는데, 불교의 근본사상에 용서란 없습니다.

용서란 내가 잘하고 남이 잘못됐다는 것인데,

모든 것의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며,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남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칼로 나를 찌른다 할지라도 

찌르게 한 것의 근본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회'를 해야지 저 사람을 '용서'하다니요.

그래서 우리 불교사전에서 '용서'라는 말을 빼야 한다고 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97쪽

어떤 언론이든지 사회의 공기라는 것,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는 근본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이용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곤란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춘추필봉(春秋筆鋒) 

말 그대로 시퍼런 필봉을 세워 나가야만 사회에 공헌을 하고

사회에 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언론이 근본정신을 버린다면 사회와 인류에 해를 주지 않겠어요?

지금도 잘하고 있겠지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한 필봉으로

춘추필봉을 발휘하면 사회를 잘 선도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살릴 수 있겠지요.




102쪽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근본 전제가 사리사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정치하는 사람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이 되고 맙니다.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면 그 단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죠.

그렇게 하려면 사리사욕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면 그 단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을 버려야만 국가도 살고 민족도 살고 단체도 살고 자기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정치를 결국엔 국가와 민족에 큰 손해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란 참으로 사리사욕을 완전히 버린 

무아(無我)사상에서 전체를 위해 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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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법칙 - 수학으로 배우는 법칙 시리즈 2
Transnational College of LEX 지음, 강현정 옮김, 곽영직 감수 / Gbrain(지브레인)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있음.

                  

[히포 패밀리와 트래캘리]

또 양자역학에 대한 책을 집어 들었다. 작년부터 양자역학을 이해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양자역학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고 있다. 이번에는 읽기 전부터 기대를 많이 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일본의 히포 패밀리 내에 Transnational College of Lex라는 교육기관에서 그들 스스로 공부하고 이해한 후에 낸 책이기 때문이다. Transnational College of Lex에서 펴낸 책 중에 몇 달 전에 읽은 "수학으로 배우는 파동의 법칙"란 너무 좋게 봤었다. 이 책을 통해서 푸리에 급수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설명들도 어렵지 않게 되어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래서 <수학으로 배우는 양자역학의 법칙>도 쉽게 썼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읽은 <수학으로 배우는 양자역학의 법칙>에는 히포 패밀리에 관한 설명도 더 있었다. 히포 패밀리는 다른 나라의 언어들을 자연 습득으로 배우는 그런 모임이라고 한다. 자연 습득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이가 언어를 배울 때 따로 그 언어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아는 단어들을 조금씩 조금씩 익혀서 배워 나가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도 낯선 언어에 대한 노출을 많이 해서, 처음에는 아무 뜻도 없이 발음만 비슷하게 하면서 나중에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다. 그러게 그들은 7개국의 말들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히포 패밀리에 일종의 스터디 모임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Transnational College of Lex이고, 그들은 줄여서 '트래칼리'라고 부른다. 그들이 처음 만나서 공부한 것이 바로 푸리에 급수였고, 그 공부를 마치고, 두번째로 공부하기로 결정한 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그들은 수식이라는 것도 일종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언어를 습득하는 방식으로 수식을 이해하고 그 수식을 통해 양자역학이 무엇이란 것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10주 동안 양자역학에 대한 공부를 계획했고, 그 전에 양자역학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하이젠베르크가 쓴 <부분과 전체>라는 책을 먼저 읽었다고 한다.

쉽지는 않았다. 책의 첫부분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유치한 듯한 그림까지 섞어가며 쉽게 쓰여 있었고, 상식으로 알고 있던 내용들이 나와서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책의 중간부분을 넘어가면서, 온통 알 수 없는 수식들로 어지러웠다. 아래 수식과 같은 페이지가 연속으로 나왔다. ,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책은 양자역학을 이해시켜주는 책이라기보다 증명하는 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연구한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을 설명한 수식들이 있는데, 그들이 계산한 수식을 하나하나 따라가 보는 것이다. 이 책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연필을 들고 이 책에 나와 있는 수식을 하나하나 따라 써 내려가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처럼 눈으로 읽어 내려간다면, 그 수식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전에 읽은 <파동의 법칙>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운 수학에서 볼 수 있는 수식들이 많았지만, 이번에 읽은 <양자역학의 법칙>에는 수식 자체가 어려웠다. 그래도 이 책은 양자역학이 왜 생겨났으며,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연구했다는 내용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복잡한 수식은 건성건성 건너뛰고, 글만 읽어도 나쁘지 않았다. 이번 리뷰에서는 그런 양자역학에 대한 흐름만 정리해보았다.

이 책의 좋은 특징 중 하나는 반복을 자주 한다는 것이다. 한 챕터를 시작하기 전에 그때까지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준다. 그러면 복잡한 수식으로 잃어버렸던 맥을 다시 찾아서 다시 한번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내 다시 출현한 복잡한 수식 때문에 한숨을 내쉬지만 말이다. 좀 아쉬운 점은... 수식을 대충대충 봤는데도, 수식에서 명백한 오류가 있었다는 점이다. 본 것만 두어 군데인데, 꼼꼼히 수식을 검토해 보았다면 그보다 더 많은 오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책을 읽을 계획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수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읽길 바란다.

 

[빛이란]

양자역학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빛이다. 먼저 과학자들이 빛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부터 살펴보자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는 무엇일까? 고대 돌턴이라는 사람은 그것을 원자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 시절에 원자를 볼 수는 없었다. 근대에 들어서서 돌턴이 이야기한 것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많은 원자들이 발견되어 주기율표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물리학에서는 원자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자, 광자 등 원자보다 더 작은 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가 있을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입자들을 양자(量子)라고 했다. 그런 양자들은 너무 작아서 보이질 않았다보이지는 않아도 그 양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바로 양자역학이다양자들이 자연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수식으로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그런데 빛의 정체는 무엇일까? 빛은 19세기까지만 해도 파동이라고 생각했다. 영이라는 사람이 실험을 통해 빛이 간섭한다는 것을 밝혔다. 간섭이라는 것은 파동의 성질이기 때문에 영의 실험을 통해 빛은 파동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런데, 파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흑체 복사다. 태양의 빛이 지구에 닿으면 지구는 따뜻해진다. 그것은 빛이 열을 전달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파동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전달 물질이 있어야 열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빛이 열을 복사하는 것을 흑체 복사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 과학교과서에 들어본 적이 있는 플랑크라는 과학자가 그래서 실험을 했다. 진공의 쇠상자에 온도를 높이면 빛이 나오는데, 온도에 따라 빛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양한 온도는 다양한 파동의 빛이 나온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온도와 빛의 파동과의 관계를 그린 그래프를 플랑크 곡선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곡선을 수식으로 표현하려고 했는데고전역학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빛의 에너지가 불연속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파동이라면 에너지가 불연속일 수가 없다... 여기서 고전역학이라고 하면 뉴턴의 역학과 거기에서 파생된 역학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자연의 모든 현상은 고전역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플랑크는 그 곡선의 식을 구해서 플랑크 곡선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논문에 발표하면서도 뉴턴 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문구를 추가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의 고전역학은 절대진리와도 같았다.

그런데 그런 고정관념을 깨는 천재가 등장하였으니, 바로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논문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빛은 파동이 아니라 입자라고 생각했다. 혁신적인 생각이란다. 선입견을 깨는 그런 생각. 그렇게 빛이 입자라는 가설을 내세웠는데 바로 광양자 가설이다. 이것이 1905년이었다. 참고로 아인슈타인은 1905년 한 해에 광양자 가설뿐만 아니라 특수상대성이론, 브라운 운동 등 3개의 위대한 논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는 외계인이거나 천재임에 틀림없다. 빛이 입자라고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것은 바로 광전효과와 콤프턴 효과란 것이 있다. 광전효과는 금속에 진동수가 큰 빛을 쬐면 전자가 튕겨나가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파동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고, 입자여야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콤프턴 효과는 빛 입자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x선은 충돌 후 산란되어 진동수가 작아진다... 진동수가 작아진다는 것은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이야기인데, 파동이라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현상을 운동량으로 증명해야 하는데운동량은 속도와 질량의 곱으로 구할 수 있다. 그런데 빛의 질량이 있나? 없다... 빛의 질량은 0이다. 하지만 질량이 없어도 에너지와 속도를 알면 운동량을 구할 수 있는데, 그렇게 아인슈타인은 빛의 운동량을 구했다고 한다.

빛이 입자를 증명하는 실험 중에 안개상자 실험이라는 것도 있다. 콤프턴 실험에서는 전자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작은 물방울을 모아 놓은 안개상자에 전자를 쏘게 되면 전가가 지나가는 모습이 물방울의 흔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빛은 입자라는 것이다. 정말 빛은 신기한 것이다.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밝혀낸 빛의 성질들은 정말 확실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알아내지 못한 빛의 성질이 또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양자역학의 탄생]

원자에 열을 쪼이면 빛이 난다그것을 프리즘으로 보게 되면 불연속선으로 보인다. 그 모양의 형태는 원자마다 다르다. 이것은 예전에 학창시절 배웠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선들이 불연속적으로 나타날 것인가? 그 선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발머라는 수학교사가 취미로 그 선들의 관계식을 구했다고 한다. 그냥 불연속적인 선들로 보였는데, 특정 수식으로 그 선들과의 관계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 선들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톰슨이라는 과학자도 이 금속에서 나타나는 불연속 선 스펙트럼에 대해 연구를 했다. 그래서 전자의 존재를 알아냈다. 전자의 질량은 원자의 1/2000 이고, (-)전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그럼 전자는 어떻게 생겼지톰슨은 전자가 수박씨처럼 위치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자가 수박이면 수박씨는 전자가 되는 것이다. 톰슨의 제자 러더퍼드는 α산란실험으로 톰슨모델을 증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α파가 2만개 중에 1개꼴로 금속을 통과하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톰슨모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전자는 원자핵 주변에 있다고 생각을 했다. 원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인데, 전자는 (-)전하를 띠고 있으니, 원자핵은 (+)전하를 띠어야 했다. 그러면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전하와 (+)전하는 전자기력에 의해 서로 끌어당긴다. 그런 원자핵 주변의 전자는 이내 원자핵과 붙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인 전자가 원자핵을 주변을 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원심력과 전자기력이 같기 때문에 일정궤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모순이 있었다. 원운동은 가속도운동이고, 고전역학 중에 맥스웰의 파동역학에 의하면 가속도 운동을 하는 것은 에너지가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 시간이 흐르면 원자력이 전자기력보다 작아져야 하고그로 인해 다시 전자와 원자핵이 서로 붙어야 한다고 했다. 그 밖에 전자의 움직임을 고전 역학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빛도 그렇고, 전자도 그렇고... 이런 작은 입자들의 미시적 세계의 현상들은 고전 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 작은 입자들의 현상을 설명할 새로운 역학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전자 궤도를 버려라]

닐스 보어란 과학자가 있었다. 원자 모형을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의 이론, 즉 입자로 설명하려고 했다. 고전 역학은 아예 적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양자역학의 규칙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먼저 원자의 선 스펙트럼이 불연속적인 에너지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전자가 몇 개의 에너지 준위를 가지고 있는 궤도를 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전자가 자신의 궤도를 돌고 있는 것은 정상상태라고 하고 이때는 빛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자의 에너지 준위가 달라질 때, 즉 에너지가 변할 때 빛이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되자 선 스펙트럼의 원자 구조를 모두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좀더 보충해서 설명하면, 궤도가 높은 곳의 전자들은 궤도간 간격이 아주 좁게 되어 불연속이 아니라 연속처럼 동작한다고 했다. 그렇게 궤도가 높은 곳의 전자들의 움직임은 전자기력과 원심력이 같다고 하는 고전역학으로 설명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높은 궤도의 전자의 경우 고전역학을 이용하여 전자의 진동수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자의 궤도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닐스 보어는 원자의 궤도 구하는 것은 뒤로 하고, 선 스펙트럼의 빛의 세기나 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보어가 구한 것은 진동수 구하는 방법까지였다.

닐스 보어의 제자 중에 하이젠베르크라는 과학자가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초열이라는 병에 걸려서 헬골란트 섬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쉬면서 연구를 했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고전역학을 궤도가 높은 전자뿐만 아니라 낮은 전자도 고전역학을 이용해서 설명하려고 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변칙이었다. 그런 변칙을 써서 그는 보어가 하지 못한 선 스펙트럼의 에너지 크기를 구했다. 하지만 그도 전자의 궤도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궤도를 버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자가 방출하는 빛으로 진동수와 진폭을 구할 수 있다면서, 굳이 궤도를 밝혀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물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어야 물리학이라고 하면서, 하이젠베르크의 물리를 부인했다. 아인슈타인은 관측이 가능한 것만이 물리학이라고 했다.

 

[전자의 정체는…]

루이 드브로이란 사람이 있었다. 아마추어 과학자로 독학으로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전자가 입자가 아닌 파동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빛이 파동이 아닌 입자라고 생각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전자를 파동으로 생각해서 계산했더니 양자조건을 만족하는 것을 밝혀냈다. 그래서 그는 전자는 파동이라고 논문을 발표했다. 아인슈타인도 이 논문에 흥미를 느끼고, 그 논문을 슈뢰딩거에게 전달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슈뢰딩거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한다. 슈뢰딩거는 전자의 파동방정식을 이끌어냈다전자가 파동임을 수식으로 증명한 것이다. 이 전자의 파동방정식을 유도해내는 식이 책이 쭉 나와 있지만눈으로만 읽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식이다. 그렇다고 손으로 천천히 따라 적는다고 이해할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려운 수식의 연속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게 하는 페이지가 지나면 결국 슈뢰딩거가 이룬 것은 전자를 파동방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바라던 그것. 이미지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슈뢰딩거의 전자는 약점들이 있었다. 그가 구한 파동방정식은 전자가 한 개인 경우를 구한 것이었다. 내가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전자 2개를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설명하려면 6차원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전자 3개면 9차원, 더 많은 전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무한차원이 필요하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시 전자의 이미지가 사라졌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막스 보른이라는 사람이다.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확률로 해석했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파동이 아닌 입자들의 개수로 바꿔서 설명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이중슬릿 실험. 그것은 파동을 설명하는 실험이었다. 그런데 전자의 입자로 바꿔서 생각하고 이중슬립을 통과한 전자의 개수들을 세어보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파동으로 나타난 간섭의 세기에 비례하여 전자의 개수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확률로 생각하니 다시 이미지가 돌아왔다고 했다슈뢰딩거 방정식은 한 개의 전자만 설명이 가능했는데, 보른의 확률해석은 전자가 많아도 3차원의 공간에서 설명이 되었다. 그런데 전자를 한개만 쏘면 어떻게 될까? 이중슬릿에 전자를 한 개만 쏘면 전자는 둘 중에 하나로 들어오게 된다. 각각 확률은 반반씩이다. 그리고 이 경우는 간섭 현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가 우리가 관측을 하게 되면 전자는 영 딴 놈이 된다. 이를 확률파동이 수축한다고 하는데, 몇 번을 읽어봐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결국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보다 보면 가장 끝에서 출현하는 불확정성 원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자의 불확정성이란, 위치를 정확하게 보려고 하면 운동량을 알 수 없고, 운동량을 정확하게 알려고 하면, 전자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전자는 눈으로 봤을 때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불확정성 원리를 하이젠베르크와 보어가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전자는 관측하지 않을 때는 파동처럼, 관측될 때는 입자처럼 움직인다" 라고... 그리고 이때 파동은 실제 물질의 파동이 아니라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주장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물리학이라는 것은 명백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니까 말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를 1927년에 주장하였는데그 이후에 이것을 뒤집는 이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은 옳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고양자역학은 현대 과학에서 아주 중요한 분야라고 한다. 그러니까 누군가 전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아직까지는 전자는 관측하지 않을 때는 파동처럼, 관측될 때는 입자처럼 움직인다라고 대답하며 된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핵심이다.

아쉽게도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아직 양자역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모했다. 전에 다른 책에서 양자역학을 가장 쉽게 설명한 사람이 리처드 파인만이라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이제 파인만이 설명한 양자역학을 찾아봐야 하나.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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