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

그의 아버지의 눈에는 이러한 시대 상황이 아마도 거의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전 여러 대에 걸쳐 그래 왔던 것처럼,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방랑하는 음유시인이나 그 비슷한 부류의 방랑자를 제외한 약사들은 귀족의 궁정에서나 성직자의 궁정에서나(모차르트는 양쪽 다 해당된다) 당연히 하인으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시종이나 마차꾼처럼 하인의 제복을 입고(하이든도 생애 대부분을 이렇게 살았다), 하인들의 부엌에서 요리사, 부엌일 담당 하녀들과 어울려서 식사했다. 하인들 중에서도 악사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그들은 고용주가 허락하지 않으면 여행을 할 수도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하이든의 첫 일자리인 보헤미아의 모르친 백작의 궁정에서처럼) 결혼조차 금지되었다. 대개는 시종처럼 필요에 따라 1 2역을 해야 했다(J.S. 바흐도 바이마르 궁정에 처음 일자리를 얻었을 때 공식적으로 그런 역할을 요구받았다.)

 

(26)

이를 테면 프리드리히 멜키오르 폰 그림 남작도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이렇게 그 어린 영혼에게 정복당했다.

어디서 이런 아이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말씨와 행동은 동심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풋풋함이 어우러져 찬란한 생명력과 원기가 넘쳐 흘렀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그 쾌활함은 그 아이가 제대로 영글기도 전에 시들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적정조차 떨쳐냈습니다.”

 

(29)

모차르트는 알았을 리가 없지만 트럼펫은 이 세상 어느 인간 집단에서나 강력한 남성, 더 나아가 남근을 상징했다.(아직도 그런 지역이 많이 남아 있다) 다시 말해 꿰뚫는, 공격적인 독재적이고 위협적인 속성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은 것이, 트럼펫은 어느 나라에서나 군대를 집합시키거나 적을 위협하기 위해 고안된 군악기이다. 18세기 유럽 음악, 특히 바로크 음악에서는 왕의 영광을 찬양하는 음악에서 가장 도드라진 악기로 쓰였다. 모차르트의 트럼펫 공포와 아버지에 대한 공포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면? 그의 어린 시절 모토는 하느님 다음은 아빠였다. 성인이 된 뒤에도 스트레스로 힘겨울 때면 종종 그 모토를 읊조리곤 했다. 하느님이 그러하듯이 아버지도 베풀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는 존재였다. 그게 아버지의 주요한 교육 기법 중 하나였다. 모차르트에게 스승이라고는 오로지 아버지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이들을 학교 문전에도 데려가지 않고, 또래와의 우정을 거의 박탈한 채로 키웠다.

 

(83)

자식이 어린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어른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양치기는 양을 잃어버렸다. 레오폴트로서는 자기의 존재 이유를 박탈당한 것이었다. 의존적이었던 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였던 셈이다. 메이너드 솔로몬에 따르면 모차르트 가정에서 진짜 영원한 어린이는 볼프강이 아니라 레오폴트였다. 밖으로 내돌려진 신동들의 실제 모습(신화가 만들어낸 모습의 상대어로서)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모차르트가 청중이나 가족에게 휘둘렀던 바로 그 권력이다. 그가 권력을 남용한 흔적은 없지만 가족이나 지인과 주고받은 편지를 읽다 보면 언제나 그가 권력을 의식했고 즐겼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루이 15세의 연인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에게 차갑게 거절당했을 때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게 입 맞추기를 거절한 그대는 누구십니까? 황후께서는 내게 입 맞추셨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와도 같은, 티 한 점 없는 어린 모차르트의 이미지를 바로잡아줄 요긴한 대목이다.

 

(112~113)

언제나 그는 가족이라는 단위에 방점을 찍었다. 어린 모차르트를 데리고 연주 여행을 돌아다니던 시절과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자기는 오로지 아들의 성공을 위해 헌신적으로 돈을 쏟아 부었으며, 그 결과 경제적으로 말할 수 없이 쪼들리게 되었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모차르트에게는 죄의식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실은 레오폴트는 자식들 덕에 한 재산을 벌었으며 그 대부분을 여기저기에 빼돌렸고,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는 쉬지 않고 돈이 없다고 불평을 해댔던 것이다. 레오폴트는 심리전의 명수였다.

 

(134)

모차르트는 헨델 이래로 후원자라는 족쇄 대신에 자유를 선택한 첫 위대한 작곡가였다. 그는 오케스트라와 독주자를 함께 해방시켜 그들이 서로 끊임없이 대화하게 만든 첫 작곡가로 불려 마땅하다. K.271에 나오는 대화는 그 수준과 내용이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관악 파트(오보에와 호른)를 음악적 대화의 일선에 내세운 것도 마찬가지이다.(첫 악장 알레그로에서 오보에와 피아노가 나누는 대화는 이런 매력적인 자리바꿈의 첫 시도이다.) 이때부터 그는 협주곡에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관악 밴드에게 이중의 역할을 주었다. 그 하나는 오케스트라라는 팔레트 위에서 색조를 혼합하는 마법의 중개자 역할이고, 또 하나는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조정자 역할이다. 다수에 둘러싸인 독주자를 아우르고 각 파트를 하나의 위대한 전체로 연합해나간 것이 모차르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이다.

 

(151~152)

그러나 여기에도 모차르트 특유의 초연함이 있었다. 그는 레오폴트에게 이렇게 전했다.

그녀는 집안 살림을 모두 책임지고 있지만 그들의 태도로만 판단한다면 아버지는 그녀가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 사랑하는 아버지, 제가 그 가정에서 직접 목격한 것만 묘사한다 해도 편지지를 여러 장 채울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못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의 작고 까만 두 눈과 사랑스러운 용모에는 순순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위트가 없지만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자신의 역할을 해나가기에 충분한 상식을 갖췄습니다. 사치와는 거리가 멀고요, 옷차림도 대개는 초라해요. 그녀의 어머니가, 없는 살림에 다른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그녀는 뒷전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도 그녀는 살림살이를 터득했고 아주 친절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온 영혼으로 저를 사랑해요. 제가 이 이상의 아내를 바랄 수 있을까요?”

 

(169)

이 헌정의 편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 가지 특징은 모차르트의 힘든 고생에 대한 언급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그 어떤 일에도 힘들여 고생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저 음악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고 여겼다. 마치 모차르트는 하느님의 물길을 열어준 도랑이나 도구적인 존재였다는 듯이(언제나 악전고투하며 창작에 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베토벤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비범하게 조직적인 두뇌의 소유자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사실상 모든 작곡 행위가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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