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ASEM 정상회의 만찬을 마친 대통령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주방에
라면을 청했다. 순방국의 공식 만찬 행사에 다녀올 때마다 거르지 않는 대통령의 주문이었다. 라면 한 그릇을 비운 후 대통령은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며 아리랑 담배에 불을 붙였다. 힘들도 어려운 시기에도 그의 얼굴에서 웃음을 지켜준 세 가지 아이템이었다.
(172)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결국은 자기 삶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약간의 불일치가 생깁니다. 참모들은 제 인생을 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좋은 정치만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결국
한 인간으로서 삶의 선택에 치열하게 맞닥뜨리는 것은 아닌 셈이지요. 그런데 어찌 보면 사람들은 자기
멋에 살다가 죽는 게 아닐까요?”
(177)
경사였고,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을 탄생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기에 기쁨이 더 컸다. 선거를 위해 이 년여에 걸쳐
숱한 외교 일정을 소화했던 터라 대통령 당선에 견줄 만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바깥으로 감정을 드러낼
일은 아니었다. 의전비서관이 축하 행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왔다.
그는 최대한 간단히 하자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생색낼 일이 아니다”
그것이 전부였다.
(181)
미국의 입장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의 안보도 중요하지만
한반도의 평화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어떤 형태든 한반도 긴장을 높이는 방향의 제재 조치에는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인이지만,
막상 전장에서 죽는 것은 군인이다.”
그가 평소 자주 하는 말이었다. 그렇듯 그는 전쟁이 초래할 비극을
원치 않았다. 또 결코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혹여
미국과 북한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 군사적 충돌이라도 생기면 한반도의 남쪽은 전쟁의 참화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접견이 계속되는 동안 대통령의 얼굴은 몇 번이나 벌겋게 상기되었다. 때로는
격앙된 표정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긴 설득이 이어졌다. 접견을 마치고 관저로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그는 진익훈 대변인에게 기록해두라며 말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고집 센 나라와 가장 힘센 나라 사이에 끼어
있다.”
(202)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대통령이 혼잣말처럼 말한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이 선출된 권력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게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317)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재판을 통해 싸울 각오를 다졌다. 이미 큰
생채기가 나 있었지만 그래도 명예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설령 감옥에 가는 일이 있어도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그 생활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쏟아지는 엄청난 비난의 화살 속에서도
자신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또 자신에게 뒤집어씌워진 누명의 한 귀퉁이라도 제대로 벗겨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구차한 연명은 될 수 있을지언정,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으로 인해 받는 고통을 덜어내는 방법은 아니었다. 감옥 안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진보의 미래를 성찰하는 글을 쓴들 효과는 크게 없을 듯싶었다. 그런 한편에서는 사실이 아닌 그 모든
것을 사실이라고 인정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는 이렇게 토로하기도 했다.
“내가 차라리 사법절차를 포기하는 것은 어떻겠나? 이 말은 내가 그냥 모든 걸 인정해버린다는 뜻이다.”
(320)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332)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대화를 나눈 뒤 대통령은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켠다. 어느
곳이든 일하는 사람이 있는 마을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고 덕담을 건넨다. 그는 이제 전직 대통령이라기보다
시민 임진혁에 가깝다. 마을회관을 나서면서 그가 말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2017년 5월 15일. 봄이 그렇게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