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9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조정래 님의  <아리랑> 9권을 이야기해줄게. 9권의 이야기 시작은 군산에 퍼진 전염병 이야기란다. 그렇게 심한 독한 감기는 처음이라면서, 약을 써도 속수무책이었고 죽는 이들도 많았어. 손판석의 막내도 독감에 걸렸다가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단다. 손판석의 집뿐만 아니라 한 집 걸러 초상을 치렀어. 당시 기록에 의하면 평안남도와 전라북도에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이 약 1100명이었다고 하는구나. 이 전염병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돌고 있던 스페인 독감이었단다. 일제 침략기이다 보니 나라에서 전염병에 대한 대책이 없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구나. 안타까운 일이구나.

송중원은 감옥에서 출옥한 후 고향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후유증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쇠잔해 있었단다. 송중원의 동생 송가원은 경성에서 의대에 다니고 있었고, 형의 소개로 알게 된 허탁, 박정애 등과 알고 지냈어.

….

친일파로 돈을 벌어 55세 생일 잔치가 벌였던 이동만 기억나니? 이동만은 돈 욕심에 일본인과 사금 사업까지 벌였단다. 사금이란 것은 광석 속에 포함되어 있는 금을 채취해 내는 것이란다.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잘못하면 망할 수도 있는 사업.. 망해라이동만의 아들 이경욱은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친일파인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자신은 사회주의 활동을 했어. 이경욱은 스승 고서완의 조언대로 판사가 되어 조선의 백성들을 도와주기 위해 판사 시험을 준비했단다. 하지만 두 번이나 계속해서 떨어지고 말았어. 머릿속에 온통 옥비 생각뿐이라서 그런 것 같구나. 옥비는 옥녀가 예인 활동하면서 새로 지은 이름이란다. 아빠가 옥비와 옥녀 이름을 혼동해서 쓸 수 있는데 같은 사람이란다.

이경욱은 계속 옥비의 행방을 찾아 다녔어. 그러다가 옥비가 일본 놈에 의해 순결을 잃었고, 그 일에 자신의 아버지가 깊숙하게 관여되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했단다. 이경욱은 옥비가 서울로 갔다가는 소식을 듣고 그도 서울로 향했단다. 이동만의 사금 사업의 결말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구나. 그 사금 사업이라는 것은 사실 일본인들이 사기를 친 것이야. 이 일로 이동만은 쫄딱 망하고 그 충격으로 논바닥에 쓰러져 죽고 말았단다.

 

1.

김제에서 동척(동양척식회사) 소속의 소작인들이 대규모 소작쟁의를 일으켰단다. 이것의 배후에는 신간회 김제 지부가 있는데, 신세호도 신간회 김제 지부의 간부로 일하고 있었고, 차득보도 참여하고 있었단다. 이 소작쟁의를 통해 소작료 인상 철회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했어.

….

1929 11 3일에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단다. 이것은 아빠가 다른 책을 이야기해줄 때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요지는 우리나라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의 싸움이 일어났는데 우리나라 학생들만 경찰서에 갇히면서 시작되어 이웃 학교들이 동맹 휴학으로 동참하면서 그 동안 쌓여왔던 불만들을 터뜨리면서 항일 운동으로 전개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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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런데 광주의 여러 학교 학생들이 그렇게 연대투쟁에 나선 것은 조선 여학생이 희롱당한 것에 대한 감상적인 민족감정의 발로거나 충동적인 젊은 혈기의 폭발이 아니었다. 3.1운동 이후부터 전국의 수많은 학교들은 끊임없이 동맹휴학을 일으켜왔다. 어느 학교에서나 학생들이 내세운 맹휴의 이유는 거의 동일했다. 일인 교사나 일인 교장의 배척,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조선어교육의 강화, 조선인 교사들의 학대 같은 것을 내세웠다. 그건 단순한 교내문제가 아니라 학생의 입장에서 전개한 맹휴투쟁은 사회주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차츰 빈번해지고 격렬해졌던 것이다. 그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비밀조직이 배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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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주학생운동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으로 송가원도 참가를 했고, 보름이의 장남 오삼봉도 참가를 했단다. 세월이 빠르게 흘러 보름이의 장남이 벌써 어엿한 청년이 되었구나. 오삼봉은 이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잡혀 징역을 살았단다. 보름이는 서무룡에게 부탁을 해서 징역형을 1년으로 감형을 받았어. 서무룡이 참 못된 놈이지만, 그래도 보름이에게는 진심이었던 것 같구나. 목포에 살고 있던 박건식의 장남 동화도 이 학생운동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들리고 퇴학까지 당했단다. 우리나라는 나중에에 이 광주학생운동을 기리기 위해 11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했단다. 아빠가 어렸을 때 학생의 날, 학생들은 왜 안 쉬는지 불만을 가졌던 기억이 있구나…^^ 지금이라도 쉬면 너희들이 좋을 텐데

 

2.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송수식은 걱정이 많았어. 독립운동 단체의 갈등은 점점 심해지고 통합이 되지 않고 있었고, 이런 와중에 신채호 선생께서 투옥되시고 말았단다. 독립운동의 큰 기둥이었던 신채호의 투옥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좌절감을 주었어. 송수익은 이회영, 김원봉과도 교류하였단다. 김원봉의 의열단은 조선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기도 했는데, 코민테른에 위해 1 1당 정책으로 조선공산당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단다. 중국공산당도 11당 정책에 따라야 한다면서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지지했어. 어쩔 수 없이 조선공산당은 해체될 수밖에 없었단다. 그러면 조선공산당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김원봉은 개인의 의견을 존중한다면서 각자 판단하라고 했단다. 의열단에서 활동을 하든 중국공산당원이 되든 우리의 목표는 한가지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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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 의열단의 정신과 목표를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최고 최대의 대의는 조선의 독립입니다. 그건 우리의 유일한 길이며 최후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쟁취하기 위하여 결속했고, 투쟁해 왔고, 앞으로도 투쟁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 투쟁과정에서 상해임정과 협조했고, 중국공산당을 도와 광동코뮌에서 싸웠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도 동참했습니다. 그건 우리의 최우선의 목표인 독립을 성취시키기 위해 모든 세력과 협조하고 연합하자는 우리 의열단의 투쟁방법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우린 독립을 위하여 어린아이들의 힘까지 빌려야 할 처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도 모든 항일세력들과 연합하고 결속하고 통일체를 이루는 노력을 변함없이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중국공산당의 입당은 하등의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강압적인 필요는 없고 자율적으로 선택하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디까지나 의열단이며, 그 문제로 하여 우리 의열단은 추호의 변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는 것은 인민대중과 결속하여 투쟁을 확대해 나가는 방법과 인민존중의 사상에 공감하는 것이지 의열단의 근본 정신과 목표를 훼손하자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 좋은 일례가 광동코뮌에서 싸우는 동시에 변절자가 된 박용만을 제거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이 기회 의열단원의 임무와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문제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바랍니다.”

김원봉이 총괄적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단원들을 휘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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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가지 의아한 것은 의열단이 변절자 박용만을 처단했다는 소식이란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국민군단을 이끌었던 박용만이었어. 야비한 이승만과 날을 세우며 국민군단을 이끌었던 이였는데 변절을 했다고? 의열단이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아빠가 좀 찾아보니 박용만의 변절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명확하지 않다고 하더구나. 여전히 논란이 있다고 하는구나. 의열단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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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김원봉이 언급한 박용만은 바로 하와이에서 건너온 박용만이었다. 그는 변절한 밀정으로 판명되어 2년 전에 의열단원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의 변절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구구하게 말이 많았다. 그 말들을 간추리면 변절했다, 아니다, 하는 엇갈린 주장이었다. 그것은 박용만이 그만큼 지명인사이기 때문이었고, 변절자로 죽어간 그의 죽음이 또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죽고 없었다. 어쨌거나 의열단에서는 그만한 인물을 죽이기로 결정하기까지는 확실한 근거를 확보했을 것이고, 박용만의 죽음은 실망스러운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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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강압에 살기 어려웠던 우리 백성들하늘도 도와주지 않는구나. 어느 해는 대홍수가 발생해서 간척지에 있던 논과 집이 모두 물에 잠기고 말았어. 그뿐만 아니라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죽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2657명이 죽고, 37438호의 집이 물에 잠겼다고 하는구나.

….

공허 스님은 서울에서 송가원을 비밀리에 만나는데 그 자리에 옥비를 데리고 갔어. 옥비는 한남권번에서 소리꾼으로 일하고 있었단다. 송가원은 옥비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 옥비도 송가원을 보고 한눈에 반했단다. 이경욱은 옥비를 보려고 경성에 왔다가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선배 홍명준을 만났단다. 홍명준으로부터 만보산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작년에 강준만의 <한국근대사 산책> 이야기를 할 때도 해주었는데 기억나는지 모르겠구나.

만보산 사건은 1931년 만주 지역에서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의 일상적인 충돌이 있었는데, 일본경찰이 개입하여 과잉 진압을 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단다. 이것은 일본이 중국과 조선의 갈등을 부추기기 위해 일부로 개입한 것이었어. 일본 경찰의 의도대로 국내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단다. 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을 공격하고안타깝게도 일본의 이간질이 제대로 성공했구나.. 중국까지 차지하려고 야심을 품은 일본은 1931 9 18일 일본관동군을 이끌고 만주를 침략했단다. 독립운동은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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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송수익은 눈을 내리감았다. 이회영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분은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만주의 상황은 돌변하고 있었다. 독립군들이 처한 입장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바로 후방이 전방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무정부주의 투쟁도 새롭게 계획을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직의 총력을 만주에 집중시킨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구체적인 투쟁사업을 정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이회영은 작년 11월에 만주를 향해 상해에서 배를 탔다. 그러나 대련에 내리자마자 수상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상해에서 밀정에게 탐지되어 미리 연락이 취해져 있었다. 이회영은 고문을 못 이기고 다음 달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분은 떠났지만 그분과 함께 세운 계획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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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와이에서 일하고 있는 방영근. 고국에 꼭 돌아가겠다는 의지로 계속 결혼을 미뤘는데, 주위의 소개로 늦장가를 들게 되었고, 아들을 셋이나 낳았단다. 하와이에도 박용만의 변절 소식이 전해지면서 큰 파장이 일었어. 그들도 박용만의 변절에 믿을 수 없다는 이들도 많았어. 그러면서 그들이 낸 세금과 헌금이 또 이상한 곳에 쓰였다는 것을 알고, 이제는 세금과 독립헌금을 내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도 있었어. 얼마 뒤 김구의 한인애국단 특별헌금 모집이 있었는데, 이런 분위기로 인해 이 특별헌금도 어렵게 마련되었다고 하는구나. 김구의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후에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소식으로 전해졌단다.

다시 국내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가끔씩 이야기해주는 삼형제 정재규, 정상규, 정도규의 이야기도 해줄게. 정재규는 결국 논과 집을 모두 날리고 초가집에서 지내면서, 아내가 바느질삯으로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지냈어. 그런 형을 거들떠보지는 않는 정상규는 여전히 소작인들을 갈구면서 논을 넓혀갔단다. 막내 정도규는 사회주의 활동으로 감옥에 갔다가 3 6개월만에 풀려나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여전히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고 회유와 협박이 이어졌단다. 그런 감시에도 정도규는 고서완과 함께 계속 공산주의 활동을 비밀리에 했단다.

송가원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어. 옥비가 보름마다 찾아와서 공허스님의 심부름이라고 하면서 용돈을 주고 갔단다. 겉으로는 서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 그런데 이 둘을 훼방 놓는 이가 있었어. 박정애의 동생 박미애였단다. 박미애는 그야말로 돈만 많고 무식하고 사치덩어리 여자라고 생각하면 돼. 하지만 송가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쓰는 그런 여자였단다. 옥비를 찾아가 자신이 가원의 약혼녀이니 만나지 말라고 협박도 했어. 결국 송가원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동침까지 해서 송가원에게 족쇄를 채웠단다. 당시는 그런 시절이었지. 가원은 여전히 옥비를 그리워하고 있었지만, 미애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단다.

여기까지가 <아리랑> 9권의 이야기란다. 등장인물이 많다 보니 정리해서 이야기하기가 쉽지는 않구나. 아빠가 이야기해준 인물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단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너희들이 커서 직접 읽어보는 것으로이젠 <아리랑> 세 권이 남았구나. 아빠가 부지런히 이야기해줄게. 그나저나 이런 아픈 역사의 이야기가 채 100년도 안되었다는 것이 가끔 믿기지 않는구나.

,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군산부두에는 포근한 햇살과 함께 봄바람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그러면서 그는 털퍽 주저앉고 있었다.



차득보는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담배를 깊이 피웠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해가 막 떠오르는 순간 바람결이 휘익 스치고 지나갔다. 그 문득 스치는 바람결을 한두 번 느낀 것이 아니었다. 햇살이 쫙 비치면서 일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바람이었다. 그건 해가 내뿜는 힘이었다. 누구에게 들은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농사를 지어 갈수록 해가 얼마나 오묘하고 큰 힘을 지녔는지 깊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농사는 사람의 힘으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가 해의 힘으로 지어졌다. 사람의 힘은 그저 잔일을 거들 뿐이었다. 해와 땅과 물, 그것들이 어우러져 벼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이삭을 맺게 했다. 그것을 한문으로 하면 火•土•水였다. 신세호 선생 앞에서 늦공부를 하며 뜻인지 잘 몰랐었다. 그런데 농사짓는 세월이 쌓이면서 그 뜻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 P69

송수익은 지금도 독립투쟁의 가장 효과적인 방략은 모든 세력들이 화합적으로 뭉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희박했다. 만주의 삼부는 29년 3월에 제2차 통합회의를 개최하여 다행스럽게 자치기관으로 국민부를 조직했다. 그런데 7월에 신민부의 군정파를 이루고 있는 김좌진의 다시 한족총연합회라는 것을 만들어 분리되어 나갔다. 또 통합체의 한쪽이 허물어진 상태가 된 것이었다. 국내에서 발족된 신간회의 영향으로 만주에서 일어난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은 그 상태로 끝나고, 사회주의 단체들과의 연합이란 막연한 일로 남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만주와 같은 시기에 한국유일독립당촉진회를 만들었던 상해임정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여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 P95

하와이의 조선 사람들은 세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그 누구든 자식들에게 다시는 농장생활을 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자기들의 고생을 자식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자기들의 고생을 자식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지 않겠다는 부모님들의 마음이었다. 농장생활을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학교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열은 더없이 뜨거웠다. 둘째, 법에다 김치를 먹듯이 조선사람으로서의 생활과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여름뿐인 땅이었지만 해가 바뀌면 꼭 설을 쇴고, 비록 양주를 따라올리더라도 꼭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셋째, 어떻게 해서든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얼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만이 아니었다. 실생활에서 노란둥이라는 차별에다가 나라 없어서 당하는 설움이 겹쳐지고 있었다.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들이 당하지 않는 무시와 멸시 그리고 손해를 언제나 당하며 살고 있었다. - P161

"그려, 나가 공산주의 변호인도 아닝게 그 말언 그만 허세. 근대 우리가 한 가지 명심헐 것이 있네. 자내가 나나 멀라고 만주짱서 요 고상덜얼 허고 있능가? 그야 천번 만번 물어도 대답언 똑겉이 독립, 독립얼 위해서 아니여?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무정부주의자든 조선사람이먼 그 목적은 다 똑겉이 한나여. 단지 목적얼 달성허는 방법으로 서로 다른 주의럴 택런 것뿐이란 말이시. 근디 주의가 다르다고 혀서 서로 미와허고 등지고 싸와서야 되겄능가. 아니여, 서로 돕고 손얼 잡고 연합혀야 혀. 우리 의열단이 중국공산당이나 조선공산당얼 도운 것언 다 그런 뜻 땀시여. 자네넌 공산주의자덜얼 원수 대허디끼 허는디, 나넌 시방 송 선생님 밑에서 무정부주의 투쟁얼 허세만 언제 또 공산주의자로 활동헐란지 몰르네. 독립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허먼 주의야 언제든지 바꾼다는 것이 내 주의잉게로. 글먼 그때 가서 자네 나 가심에다 총질헐랑가?" - P174

다시 말하면 조선농민들은 긴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투쟁의 방법과 기술도 다양하게 가지고 있다 그겁니다. 그건 바로 무엇입니까? 혁명적 잠재력입니다. 총독부가 발표한 것을 보면 지난 10년 동안에 노동쟁의보다 소작쟁의가 세 배 네 배로 많이 일어났던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그 혁명적 잠재력의 폭발인 동시에 우리의 운동을 그만큼 빨리 흡수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해왔습니까? 그저 무조건적으로 쏘련의 이론을 우리에게 적응시키려고 급급하면서 노동자 우선, 농민 경시의 운동을 해왔습니다. 그건 우리가 저지른 큰 불찰이고 오류입니다. 물론 운동지도층이 도시 중심의 지식인들이었으니까 농민들의 그런 특질을 잘 모르고 소홀히 했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지금까지도 쏘련이론의 맹목적이 추종과 무조건적인 대입을 심각한 문젭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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