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개화기는 새로운 외부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한 시대였다. 그
충돌은 개화기 이전부터 일어났으니 그건 바로 천주교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 대응은 박해로 나타났다.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는 당파싸움으로 인해 증폭되었다. 이는 개화기가
결국 망국(亡國)으로 종결된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의 자폐적 시스템과 더불어 내부갈등이 나라의 진로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였다는 사실을
폭로해주기 때문이다. 개화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천주교 문제를 살펴보고 넘어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72)
‘블라디보스토크’의
블라디는 러시아어로 ‘정복하다’는 뜻이고 보스토크는 ‘동쪽’의 의미인바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가 동쪽으로 와서 정복한 도시인
셈이다. 이전 이 땅은 발해의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고 이후로는 여진과 거란의 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땅을 한자로 해삼위(海蔘威)라고 표기했는데 바닷가에 ‘해삼’이
많아서 해삼위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바다도 4~5개월간
결빙하기 때문에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90)
역설이지만 서학은 물론 동학에 대한 이러한 탄압은 조선 조정이 자신들의 죄, 즉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걸 시사하는 건 아닐까? 민생을
도탄에서 건져낼 수 없는 무능이, 언제든 민심을 폭발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 제거에만 총력을 기울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게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망국(亡國)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99)
다블뤼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자선(慈善)의 원조 국가가 조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이 나라에서는 자선 행위를 진정으로 존숭하고 실천한다. 사랑방에서 받는 대접 이외에도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면 거절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일부로 그를 위해 밥을 다시 하기도 한다.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식사하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즐거이 자기 밥을 나누어준다. 뱃사공들은 밥을 먹지 않고 배 타러 나온 사람과 나누어 먹는
것을 철칙으로 한다. 잔치가 벌어지면 언제나 이웃 사람들을 초대해서 형제처럼 모든 것을 나눈다. 여비가 없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엽전 몇 닢의 도움을 받는다. 없는
사람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조선인이 가진 덕성 중의 하나이다.”
먼 훗날에라도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161)
조선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서양 문물을 수입하게 되었다. 1876년 부산이 개항하고 이어 1879년 원산, 1880년 인천이 개항했다. 학계에선 근대화가 되는 시대를 의미하는
‘근대’가 언제부터인가 하는 논쟁이 있는데 학계의 통설적
견해는 아무런 준비 없이 강요된 것이긴 하지만 개항을 통해 새로운 서구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한 1876년을
근대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188-189)
금장태는 “최한기는 조선 후기 실학파의 마지막 인물이자
근대 개화사상으로 한걸음 나아갔던, 그 기대의 가장 앞선 진보적 지성인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저술은
1000권이나 된다는데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직 100여 권뿐이다. 그의 탁월한 학문의 폭넓은 식견이 알려지자 당시의 여러 재상들은 그를 조정에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는 상황에서 벼슬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신미양요로 강화도가 미국 함대에 침략당하자 친분이 있던 유수의 자문요청에 조언한 바 있다. …… 자신의
시대를 ‘새로운 것으로 낡은 것을 바꾸는’ 변혁의 시대로
규정한 그는 ‘차라리 옛것을 버릴지언정 지금을 버릴 수는 없다’ 하여
진보정신을 표방하고 과학과 문명이 더욱 발전하고 역사가 발전해나간다는 것을 확신했다.”
(284)
한편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의 미국 생활은 어떠했는가?
미국 <뉴욕타임스> 1883년 11월 8일자는
“사절 수행원의 한 사람인 유길준은 자기나라의 옷을 벗고 지금은 서양 옷을 입고 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에드워드 모스(1838~1925) 교수
지도하에 학생으로 이 나라에 머물 것이다. 어제 저녁 이 젊은이는 5번가(뉴욕)에 산책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그러나 몇 마디의 영어를 사용하여 경찰관에게 호텔 가는 길을 물어 찾아왔다.”고
보도했다.
(301)
<한성순보>는
신문발간의 동기와 기술적 지원은 일본에 의존했지만 신문의 뉴스원, 내용과 관련해선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이 신문이 기사로 가장 많이 다루었던 국가는 중국(453회)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베트남(165ㅎ회), 프랑스(71회), 영국(56회), 일본(53회), 미국(47회) 등이었다. 중국 관련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이유는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밀접했다는 것 이외에 영국,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선교사나 상인 등이 발간하던 중국계 신문들을 주요 뉴스원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성순보>의
실무자들은 “거의가 한학자와 중국어 역관(譯官) 출신들로서 한문에는 능통한 반면 일본어는 몰랐다는 점과 이들이 “일본보다는
중국을 더 숭상”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베트남, 프랑스 관련 기사가 많았던 건 1884년 6월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1883) 문제로 일어난 청불전쟁과 베트남이 프랑스에 먹히는 비극에 대한 동병상련(同病相憐) 감정 때문이었다.
(334)
갑신정변의 내각은 ‘청춘정권’이었다. 내각 서른두 명의 연령을 보면 20대와 30대가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다. 김옥균 서른세 살, 홍영식 스물아홉 살, 서광범 스물다섯 살, 박영효 스물세 살, 서재필 스무 살 등 주동자들은 더 젊었다. 혈기가 지혜를 앞섰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336)
“너희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군주는 그렇게 개화를 버렸다. 김옥균은 군주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는다. 이제 곧 천하대역죄인이 될, 그의 부모와
아내와 아이들은 몰살을 당하게 될, 그리고 자신은 10여
년의 망명객이 될 것이며 망명지 일본에서도 버림받은 후 결국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 정부가 보낸 암살자에게 목숨을 잃을, 그러나 군주를 사랑하였고 조선의 강대한 힘을 꿈꾸었던 김옥균은 이렇게 군주와 마지막 작별을 했다.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이 김옥균과 함께 후퇴하는 일본군을 쫓아갔다. 군주의 곁에는 이제,
청군과 군중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홍영식, 박영교만 남았다. 실패한 혁명 뒤에 남은 것은 군중의 분노뿐이다. 거리는 살육으로
뒤덮인다. 일본인과 개화파들, 그들의 가족은 보이는 대로
습격을 당한다. 김옥균의 집과 일본공사관은 성난 군중의 손으로 불타올랐다.
(345)
이어 신용하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실패
요인은 일본군 무력을 차용한 요인”이라며 “갑신정변은 아무리
필요하고 애국적인 목적을 갖고 있어도 그 수단에 있어서 침략의도를 가진 일본의 힘을 일부 빌려서 수행하려 해서는 실패하고 만다는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