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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4 - 임진왜란 ㅣ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4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신병주 감수 / 민음사 / 2015년 10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가끔씩 읽는 <역사저널
그날> 시리즈. 제
4권을 읽었단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조선시대를 다룬 제
4권의 이야기를 읽었어.
…
조선시대에 왜와 교류를 하였는데, 조선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조선 사람들이 왜를 방문하곤 했단다. 임진왜란
전에도 조선통신사가 다녀왔는데, 갔다 온 사람들의 의견이 전혀 달랐어.
김성일이라는 사람은 일본은 전혀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아서 전쟁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고, 황윤길과
허성이라는 사람은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니 대비해야 한다고 했어. 하지만 당시 왕이었던 선조는 김성일의
의견에 따랐단다. 특별히 전쟁 준비는 하지 않았어. 물론
황윤길의 말에 따라 전쟁 준비를 했다고 해서, 그 흐름이 많이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당시 조선은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고,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고
있었단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듯 하구나. 당시 조선의 신하들은 왜에 대해 무시하는 성향이 있어서
그들이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다고 생각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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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낙관에는 일본 군사력에 대한 낮은 평가도에 꽤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 같아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얼마 전에 선조가 신하들을 불러서 의논을 했대요. ‘일본이 진짜 침략할 것 같나?’ 그랬더니 한 신하가 웃으면서, ‘일본은 배 한 척에 100명밖에 못 싣고, 배는 많아봐야 100척 밖에 동원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대요. 그런데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에 동원하도록 지시한 배는 2000척 가까이 됐던 거죠. 조선은 이렇게 일본의 군사력을 한참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즈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서를 보내왔어요. 그런데 조선 입장에서는 그 국서의 내용이 굉장히 오만방자하게
느껴졌던 거죠. 여기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가 태몽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한 부분도 있고, 또 자기가 전쟁을 하면 지는 일이 없다면서 자신감을 넘어 오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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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 이래 200여
년 동안 큰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던 이 땅에 전운이 감돌고 있던 걸 이 곳에 살고 있는 이들만 모르고 있었어.
1.
당시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그 힘을 과시하는 한편 넘쳐나는 무신들의 에너지를 발산할 목표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조선을 쳐들어왔단다. 원래는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목적으로 길을 내달라고
했는데 조선이 떠 받치는 명을 친다는데 길을 내주겠니… 그렇다고 조선이 잘 막은 것은 아니야.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군들이 한양에 도착한 것이 5월 2일이라고
하니.. 20일만에 부산에서 한양까지 치고 올라갔다는 것은 거의 무사 통과였다고 볼 수 있단다. 그나마 저항했던 것이 동래성과 탄금대에서의 전투였어. 동래성의 당시
부사는 송상현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나라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지 않았지만, 나름 1년 전부터 전정에 대한 대비를 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역부족이었대. 하지만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숨어 있는 위인 송상현이라는 분을 알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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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송상현이 동래부사로 부임한
게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입니다. 동래부사는 지금으로 치면 부산시장 정도 되는 자리죠. 송상현은 부임과
동시에 성 주변에 나무를 심습니다. 나무가 성책(城柵) 역할을 하도록 한 거죠. 송상현은 또 군사 훈련을 철저하게 시켰다고
합니다. 이때가 꽤 평화로운 시대였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조치죠. 그러므로
송상현은 일본군의 침략을 예견했거나 적어도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유능한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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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4월 28일 탄금대에서 전투가 있었어. 당시 조선 최고의 장군이자 기마전의
대가였던 신립 장군… 조정에서는 신립 장군에 큰 기대를 하였고, 당연히
신립 장군이 막아주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하지만 탄금대는 기마전에 유리한 지형이 아니었고, 그날따라 비가 와서 땅이 질척하고, 말을 이용한 기동성이 장점인
기마전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면서 대패했다고 하는구나. 8000여명의 군사들이 죽고, 신립도 자결을 하였대. 탄금대가 뚫렸으니 한양까지는 아무런 방비도
없었어. 그렇다고 왕이라고 유능했냐… 그것도 아니야.. 왜군이 한양 입성하기 이틀 전에 선조는 몰래 측근들과 함께 도망을 갔단다.
백성들의 민심은 왕에 대한 분노 그 자체였어. 선조 일행은 개성, 평양을 거쳐 단숨에 의주까지 도망을 갔단다. 해결책도 없이 의주까지 가서는 명으로 망명할 생각까지 하고 명나라에 편지까지 썼는데 명나라에서는 부담을 느끼고
거절했다고 하는구나. 아, 참으로 창피한 일이구나. 평양과 의주 사이에 영변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세자인 광해군에게 분조를 하면서 나라를 맡겼다고 하는구나. 당시 광해군의 나이가 18살이었어.
그러니까 18살 아들에게 올라오는 왜군을 막으라고 하고,
자신은 도망을 간 거야. 참 무능도 하구나…
2.
그대로 나라가 왜에 넘어가는 상황이었지. 남쪽에서 이순신이 하나둘 왜군을 격파한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야. 전라
좌수사에 있던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전쟁 준비를 했다고 하는구나. 혹독하게 했다고 하니
이순신은 이 전쟁을 예견한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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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어떤 면에서 이순신 장군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쟁을 준비해요. 조금이라도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있으면 곤장을 때리기도
했고요. 당시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은 불만을 가졌을지도 몰라요.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한테 맨날 전쟁 준비시키고 함부로 곤장 때리고 그러냐?’ 이런 불만이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그런 걸 보면 이순신 장군은 확실히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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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해전 승리를 시작으로 연전 연승을 거둔 이순신은 한산 대첩으로
전쟁의 분위기를 확 바꾸어 놓았단다. 수군의 승전보에 힘을 받았는지 육지에서는 힘을 쓰고 있었어. 김시민 장군이 큰 활약을 보인 진주 대첩에서 왜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단다. 관군의
힘뿐만 아니라 곽재우 등 의병들이 큰 도움이 되었단다. 진주 대첩은 관군과 의병의 합작승리라고 할 수
있었어. 진주 대첩 패배에 열 받은 왜군이 보복을 한다고 나중에 진주의 많은 백성들이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말이야.
…
명나라에서 지원이 왔어. 아무래도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의 땅에서 전쟁을 할 것 같으니 지원을 보내 조선에서 싸운 것이지.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이 합작으로 평양성을 7개월만에 탈환했단다. 그리고
나서 1593년부터 강화회담이 시작되었는데, 이 회담은 4년 가까이 이어지다가 결국 결렬이 되었고, 다시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정유재란이었단다. 회담이 열리던 4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 이순신이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있었어. 전쟁 영웅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거니.. 무능한
왕이 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난단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왜군이
함정을 파고 유혹했어… 그 함정에 말려들면 조선군의 대패가 눈에 보였단다. 선조 왕은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이순신은 왜군의 함정인 것을 알고
공격하지 않고 있었어. 그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죄인을 서울로 압송한 것이래… 심지어 사형까지 당할 뻔했는데, 정탁 등 몇몇이 말려서 사형은 면하고
백의종군을 하였다고 하는구나.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이 왔는데 그는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고 남쪽 바다를 책임졌어. 그 전에 원균의 패배로 조선의 전투배는 12척뿐이었단다. 어떤 사람이 나중에 한 척을 더 가지고 와서 13척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말이야. 여기서 그 유명한 말을 이순신 장군께서 하신 것이란다.
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다고 말이야… 이순신
바다의 흐름을 이용하여 12척의 배로 대승을 거둔단다. 그것이 바로 명량대첩이야… 일본도
다시 한번 좌절을 느꼈을 거야.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유언으로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라고
했대. 그래서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나게 되었단다.
그때 후퇴하는 일본군을 총공격하게 되는 이순신 장군… 그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지만 이순신 장군은 목숨을 잃었단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쟁을 통해 전쟁 영웅으로 많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단다. 선조의 반응은 시쿤둥.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던 이유는 명나라가 도와주어서 그렇다는 평을 내놓았단다.
3.
임진왜란을 끝내 승리로 이끄는데 공을 세운 또 한 사람이 있다면
류성룡이라는 사람이란다. 류성룡은 인재를 알아보는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었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종6품인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정3품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이가 바로 류성룡이었단다. 이것은 신의 한
수였던 거지.. 임진왜란에 행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권율 장군이란 사람도 있는데, 이 사람도 류성룡이 추천한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래.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순신의 형님과 류성룡이 친구 사이였다고 하는구나. 어렸을 때부터 옆에서 지켜봤을 때 이순신의 남다른 능력을 알아보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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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류성룡과 이순신은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가요?
어린 시절부터 관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흔히 두 사람이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류성룡이 세 살 많아요. 사실 류성룡은 이순신 장군의 형님과 친구였어요. 이순신 장군은 사형제
중 셋째인데, 제일 윗형님 이름이 복희씨의 신하, 희신입니다. 그다음에 중국 제일의 성인으로 치는 분이 요 임금, 순 임금이죠. 그래서 바로 윗형님 이름이 요신이에요. 이 형님하고 류성룡이 친구
관계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순 임금의 신하라는 뜻으로 순신이죠. 그러나
이순신 장군 동생 이름은 뭘까요?
이순신 장군의 동생도
있어요?
네, 요순 다음으로 하나라의 우임금이 유명하죠. 치수(治水)를 잘했던 분이요. 이
우임금의 신하라는 뜻에서 동생 이름은 우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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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하면 유명한 책이 한 권 있단다. <징비록>이란 책이야.
임진왜란이 끝나고 임진왜란에 대해 기록한 책이고, 앞으로는 전쟁을 잘 대비하자는 내용도
있다고 했어. 아빠도 오래 전에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단다. 읽고
쓴 독후감이 있으니 한번 찾아봐서 읽어봐야겠구나. 이 책은 나중에 일본으로 유출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4.
선조의 아들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책들에서도 이야기를 하고, 한명기 님의 <광해군>을 읽고 쓴 독후감을 참고해고 좋을 것 같구나. 오늘은 아주 간단히 이야기할게. 선조와 의인왕후 사이에 아이가 없었어. 후궁인 공빈 김씨가 낳은 아이가 아들들이 있는데, 임해군과 광해군이었단다. 광해군이 두 살 때 엄마인 공빈 김씨는 죽었어. 선조의 첫아들 임해군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이 원칙이나, 임해군의 성격이 무척 안 좋았대. 그래서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이 되었고,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었대. 의인왕후는
양아들 광해군에게 잘 해주었다고 하는구나. 선조는 역대 왕 중에 선위하겠다고, 그러니까 왕을 아들에게 넘기겠다고 가장 많이 이야기한 왕이었다고 하는구나. 20번을
넘게 이야기했대. 그럴 때마다 신하들과 광해군은 무릎 꿇고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야 했고… 참 골치 아픈 왕이로구나.
또 의외의 변수가 생겼어. 의인왕후가
죽고 51살인 선조가 새로운 왕비를 맞이했어. 그 왕비가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다고 하는구나. 진정한 적자가 태어난 것이지… 영창대군이
잘 자라면 세자가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그런데 선조는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단다. 그래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단다. 어찌 보면 우여곡절 끝에
오른 왕위였어.
여기까지가 <역사저널 그날 4>의
이야기란다… 이제 학교에서 너희들도 역사를 조금씩 배우는 것 같더구나.
아빠가 어렸을 때는 역사를 싫어했는데, 그런 아빠를 닮았는지 너희들도 모두 역사가 재미없다고
하는구나. 너희들에게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재미를 느끼게 하려면 아빠가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고
그래야 하는데…. 연구가 필요할 것 같구나. 아니면 역사를
재미있게 가르쳐주는 이를 찾던지…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임진왜란의 역사적 무게는 조선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에서 가장 또렷하다.
책의 끝 문장: ‘나도 좋은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700여 척의 배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면서 시작되어 1598년 11월 종결되기까지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다. 그 영향도 지대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전란이 끝난 뒤 명과 일본 모두 왕조나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것이다. 그전부터 침체했던 명은 참전 뒤 더욱 허약해졌고 결국 멸망했다.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수립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무너질 때까지 250여 년간 존속하면서 일본의 중세를 이끌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전쟁터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쓰러지지 않았다. 전쟁 이후 조선은 체제를 수습했고, 그동안 지내온 것보다 더 오랜 기간을 존속했다. - P13
두 사람은 사실 처음부터 관계가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허균의 책을 보면 두 사람이 같은 동네 출신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원균은 부친이 수군절도사까지 지낸 무반 가문 자손이고, 이순신은 할아버지 때까지 굉장히 잘 나가던 문반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두 사람의 무과 합격 시기도 10년 이상 차이가 납니다. 이순신이 한참 늦게 합격했죠. 그런데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이 종6품인 정읍 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까지 일곱 품계가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하고, 계속 승승장구하잖아요. 본래 이순신보다 훨씬 높은 직급에 있었던 원균으로서는 그런 이순신이 탐탁지 않았겠죠. - P92
의병은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죠. 우선 경상도 3대 의병장으로 곽재우, 정인홍, 김면이 있습니다. 호남 의병장으로는 고경명, 김천일 등이 있고, 지금의 충청도 지역인 호서 의병장에는 조헌, 영규가 있죠. 금강산에서 활약한 사명대사 유정과 함경도의 정문부 장군도 빼놓을 수 없고요. 이렇듯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했어요. 그러므로 의병의 봉기는 수군의 승리와 더불어 전쟁의 흐름을 바꾼 핵심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P106
그 재조지은이라는 말을 들으면 너무 화가 나요. 대체 누가 나라를 구했습니까? 나라를 구한 건 조선의 백성들이에요. 그러면 백성을 섬겨야지 이게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런 걸 보면 선조는 그토록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도 배운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전쟁 후에도 제대로 된 국가 시스템을 만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어요. - P154
손바닥도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잖아요. 이순신이 그토록 큰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는 경상도 지역의 의병이죠. 곽재우를 비롯해서 김면, 정인홍 등이 낙동강 지역을 굳게 지킴으로써 왜적들이 진주를 거쳐 전라도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했고, 덕분에 후방 기지를 든든하게 확보할 수 있었죠. 두 번째는 류성룡이 조정에서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해 줬기 때문입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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