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71)

역사는 자신의 존재에 의거하지 않은 지식인 출신 혁명가들의 나약함과 우유부단에 관한 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과 함께, 출신성분이 혁명가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기초 자료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보여준다. 자기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없더라도 타인에 대한 애정과 정의감만으로 기득권을 버리고 변혁운동에 뛰어들어 아낌없이 죽어간 사례들이다. 자신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분개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은 생존의 본능이지만, 타인의 고통에 분노하고 목숨까지 걸어 싸우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지식인이거나 노동자이거나 아무 상관없이, 타인데 대해 얼마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성품의 문제였다. 드물지만, 이런 이타적인 인간형들은 진정한 혁명가로서의 자질과 존경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현상도 그런 유형의 하나였던 것이다.


(193)

좌익 내부의 정적들조차 김삼룡이나 이주하는 말이 통하지만 이현상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고 평했다. 먼저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상대방을 설득하다가 안 되면 감정이라도 분출시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현상은 끝까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끝내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원칙을 관철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정적들이 조선공산당 중앙을 비판할 때 공식적으로 이현상의 이름을 거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현상의 원칙이란 것이 상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지도할 때 보여준 그의 융통성과 현실주의적인 감각이 이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205)

그러나 이현상은 도무지 말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를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하급 간부들은 이현상의 심중이 무엇인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짧게 표현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은유나 비유는 사용하지 않았고, 입에서 내뱉은 말과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르지 않았고, 정치적 암투를 위해 사람을 모함하거나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거짓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곤 없었다. 근본적으로 복잡한 생각이나 정치적 욕심이 없는 담백한 사람이라고 보면 좋았다. 따라서 동료들이나 하급자들은 그가 회의 시간 내내 듣고만 있어도 무슨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다가 한마디 하면 그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었다.


(360)

미군이라고 해서 마구 죽이지는 않았다. 미군도 일단 포로로 잡으면 죽이지 않고 며칠 동안 데리고 다니며 교양을 한 다음 살려 보냈다. 이 고지식한 공산주의자는 미워해야 할 것은 제국주의이며 제국주의 국가의 인민들은 다 같은 피해자라는 교리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쫓기는 처지라 포로를 감시하는 일도 쉽지 않아 쏘아버리자고 주장하는 대원도 있었으나 이현상은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살려준 미군들이 유격대의 위치를 파악해 보고하는 바람에 포격을 당하는 일도 생겼지만 이후로도 포로 수칙을 바꾸지는 않았다.


(377)

세속적인 욕심에 무심한 것은 역사를 바꿔온 대부분의 혁명가들이 가진 근본적인 성품이기도 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경쟁을 역사의 동력으로 파악하는 역사가들은 혁명가들의 삶에도 이를 적용하고 싶어하여 세계의 혁명사를 당파 싸움으로 대치시키는 데 몰두한다. 그들은 혁명가들의 마음속에 희생과 용기, 이타주의의 고귀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혁명이 시대적으로 주류가 되었을 때 출세의 기회를 잡기 위해 앞 다투어 뛰어든 투기꾼들의 행태가 그들의 분석에 근거가 되고 합리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그들은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시간 순서대로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고 그 사이사이에 인간의 욕망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끼워넣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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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09-08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제가 쓴 이현상 평전 서평이 노동전선 단체에서 출판한 현장과 광장 1호에 실렸습니다.ㅎㅎㅎ

bookholic 2020-09-09 23:39   좋아요 1 | URL
와우, 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