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억은 버릴 수 없는 것이니까. 사진처럼 편리하게 구겨버리거나 도려낼
수도 없다. 기억은 스스로 사라진다. 파괴는 불가능하고 분실이
최선이다. 왜 잊으려 애쓰는가?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잊었음을 깨닫는가? 되찾을 때가 왔기 때문이다. 기억의 종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개와 같다.
(10~11)
“세상은 말로 배울 수는 없어.”
하나같이 줄담배를 피우던 대학 선배들은 종종 역설의 정수와 같은 설교를 늘어놓곤 했다. 세상을 말로 배울 수 없다는 말. 그것은 말로 배운 말이었다. 말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들에게 배운 말로 나도 후배를 타일렀던
적이 있다. 그런데 세상을 말로 배울 수 없다는 건 사실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어쩌면 아닐 것이다. 경험보다 말을 많이 가진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끝없는 말들. 세상보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이야기. 아마도 세상은 언어가 소멸하는 날에 종말을 맞을 모양이다. 이제 선배들도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말과 함께 나이
들었고 나이와 함께 거짓말의 비중을 늘려왔지만 다 지나간 일을 굳이 거짓으로 덮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자, 묻습니다. 혹시 끊을
날이 올 걸 알면서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습니까?
(28)
“빗줄기라는 표현은 틀렸어요. 빗방울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한줄기처럼 보여도 띄엄띄엄 내리지요. 실은
세상 모든 게 띄엄띄엄 존재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비가 띄엄띄엄 내리듯이 디지털 역시 띄엄띄엄의
기술이다. 양자 에너지도 띄엄띄엄이다. 사랑도 띄엄띄엄 찾아오고, 소변도 띄엄띄엄 마려운데, 그 이유는 심지어 시간조차 띄엄띄엄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 만물이 띄엄띄엄하다! 그는 자기
철학에 이름까지 붙였다. 띄엄띄엄의 철학.
(43)
그런데 형사는 그에게 학생이냐고 묻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학생증을
넘겨받아 유심히 살펴본 다음, 무죄가 입증되었다는 듯이 그를 방생시켰다. 체포된 노동자들이 나오는 절차는 달랐다. 훨씬 길고 복잡했다. 더러 유치장에서 나오지 못하고 교도소로 바로 이감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이
다른가? 관점에 따라 단지 ‘학생과 노동자’의 차이거나 혹은 ‘서울대 학생과 노동자’의 차이로 볼 수 있었다. 전자라면 대석 형은 술래잡기의 깍두기로
무시당한 것이고, 후자라면 장래가 창창한 명문대 학생으로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씨발놈의 계급사회, 멸망해버려라!” 나는 그에게 학생증을 내밀지 않았으면 구속당할 수
있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는데 너무 치사한 질문 같아서 그만두었다.
(111)
“봐, 진보적 자녀는 어떤
경우에나 나타날 수 있지만 보수적 자녀는 보수적 부모에게서만 나올 수 있어. 이 비대칭이 인류의 역사가
야금야금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원리일 거야.”
(223)
기숙사 침대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선배들의 전설을. 온갖 고문을 당하고도 기밀을 발설하지 않았다는 굳센 의지의 영웅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우리의 입을 여는 데는 고문은커녕 고만의 암시조차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나약해진 걸까? 세상이 너무
착해진 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악을 악이라 믿지 않았던
게 아닐까? 우리는 악의 존재를 원했고, 우리 앞에 맞선
자들을 서슴지 않고 악이라 불렀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악을 신뢰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227)
사실 나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였다. 인간은 불행이 따르면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불행이
닥치지 않는다고 의아함을 느끼지는 않는 법이다. 그리고 불행은 인간이 완전히 방심했을 때, 즉 몸과 마음의 긴장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았을 때, 무장강도처럼 불쑥
찾아와 최악의 피해를 남긴다. 그래서 그것이 불행이라고 불린다.
(254)
마음속에서만 꾹 담아둔 말. 그런 말은 검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입으로 하기 어려운 말이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입으로 할 가치가 있는 말이라고 느꼈다. 마음속에서만 담아두면 검증할 방법이 없어서였다.
(332)
하지만, 겨우 그 정도를 과대망상이라 부른다면 이런 상상은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축제를 위해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는 게 아니다. 거꾸로
감옥에 보낸 사람들을 잊기 위해 우리는 축제를 벌인다. 축제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축제란 불바다인 전쟁과 피가 튀는 학살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죄책감의 산물이었다. 대한민국의 다섯 개 국가경축일 가운데 네 개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의 45개 국가기념일 가운데 17개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의 45개 국가기념일 가운데 17새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축제는 인간의 죄에서 유래했다. 축제의 흥취에 익사 직전까지 젖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저지른 지나간
죄는 깨끗이 망각된다.
(352)
마르크스는 상품의 진정한 도량 화폐는 노동시간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책장을
만들어내는 데 쓰인 노동시간은 책장의 사용가치를 자명하게 함축한다. 책장의 사용가치에 비해 노동시간이
크게 소요된다면 굳이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 줄곧 평가된다. 바로 가격이다. 책장의 경우에는 4만 원이다. 이때, 책장을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은 구체성과 특수성과 질적 차별성을 잃고 입에 넣어 우물거리는 한우 스테이크 한 점과 동등한 것으로 전락한다. 추상적 숫자가 상품 가치의 척도가 되는 순간, 우리 세계에서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의 주인성은 박탈된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저작물을 아름답게 전시해놓을 의미 있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딱 한우 스테이크 한 접시만큼의 일을 하는 것이 된다. 하루 열다섯 시간. 먼저처럼 날리는 톱밥. 유독한 휘발성 가스. 전기톱날이 앗아 간 손가락. 그 모든 것이.
한우 스테이크 한 접시와 같다.
(380)
이름이 없어서 세상을 정처 없이 표류한 사람. 세상은 이름들이 만물을
남김없이 지배하는 곳이다. 부를 수 없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과 같다. 이름 없는 존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뿐. 그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가슴 언저리가 아려오는 슬픔을 느낀다.
(500)
아름다움이 너무나도 드물기에 우리는 그것을 좇는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대번에 홀린다. 세상에 거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주를
부유하는 작은 원소들처럼 그저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플라톤에 한 표를 던진다. 지상에 완전한 아름다움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다 배운 게
아닌가? 부질없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