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납치하다 인생학교에서 시 읽기 1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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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여전히 아빠는 시읽기를 어렵다고 생각한단다. 그래도 좋은 시를 만나면, 그 시가 비록 짧더라도 소설 한 권을 읽은 것만큼 감동을 받는 경우도 있어. 시는 읽고 싶은데, 시를 어렵게 생각하는 아빠 같은 사람들에게 류시화님이 가끔씩 내는 시선집은 많은 도움이 된단다. 류시화님은 자신의 시와 산문으로도 아빠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만, 좋은 시를 소개해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준단다. 이번에 읽은 책도 그런 책 중에 하나야.

시로 납치하다. 제목도 잘 지으셨네. 시로 사람들의 마음을 납치했다는 의미겠지? 류시화님이 페이스북을 하면서, 가끔씩 그곳에 시를 소개를 하고 자신의 생각을 남기곤 하셨는데, 그 글들을 고치고 다듬어서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이 책이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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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못할 수도

   - 제인 케니언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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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고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니. 아빠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렇게 좋은 시를 만나게 해준 것에 대해 류시화님한테 고마움을 느끼는 거야. 이 책이 아니라면 이런 시를 아빠가 어디서 만나겠니. 이런 것이 시의 힘이 아닌가 싶구나. 아빠가 설명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류시화님의 설명을 잠깐 읽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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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그렇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은 얼마나 축복된 시간인가. 살아 있다는 것은 큰 기회이다. 특별한일상들이 사라질 날이 곧 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두 발로 땅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다. 삶은 수천 가지 작은 기적들의 연속이다. 그것들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행간마다늦기 전에 깨달으라라는 말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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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좋은 시들과 그 시에 살을 붙여주는 듯한 류시화님의 글들이 가득했단다. 그리고 아빠가 이 책을 읽을 때 여건이 되면 소리 내서 천천히 명상하듯 읽어보기도 했단다. 시라는 것으로 소리 내서 읽어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거든.. 이 시에 소개된 많은 시들 중에서 특히 아빠의 가슴을 뛰게 한 시들은 따로 발췌해 보았단다. 나중에 너희들이 커서 이 책을 읽고 나서 너희들의 가슴을 뛰고, 너희들의 마음을 울린 시는 어떤 시를 골라보고 아빠가 고른 시들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궁금하구나.

 

 

2.

아빠가 정말 존경하는 정치인인 노회찬 의원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지 어느덧 한 달이 되었구나. 평생을 청백리처럼 깨끗하게 살아왔고 자신은 풍족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서민과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애만 쓰시다가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작은 흠집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할 만큼 그에게는 치명적인 것으로 생각하셨나 봐. 다른 사람들에게 누구나 있는 흠이었는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이었단다. 그가 흠이 있더라도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과 그의 철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용서하고 앞으로 더욱 잘 하면 된다고, 아니 그냥 지금까지 해온 만큼만 하셔도 된다고 격려를 해주셨을 텐데 말이야.

그가 세상을 떠난 날, 아빠는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단다. 그가 떠난 지 한 달이 되었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구나. 아빠가 노회찬 의원님 이야기를 불쑥 하는 이유는 이 책에 그를 떠오르게 하는 시 한 편이 있어서야. 숨지 말 것. 이 짧은 시는 마치 그를 노래하는 시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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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지 말 것

 

  - 에리히 프리트

 

시대의

일들 앞에서

사랑 속으로

숨지 말 것

 

또한

사랑 앞에서

시대의 일들 속으로

숨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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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하겠다고 하면 그곳에 온 힘을 쏟으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짧게 시로 표현하는 것이 더 강렬한 것 같구나. 그 일이 시대를 위한 일이든, 사랑이든 말이야. 노회찬 의원님이야말로 시대의 일들 앞에서 숨지 않고 맨 앞에서 서셨던 분이었거든. 다시 한번 그의 영면을 기원하며, 그가 남긴 꿈과 못다한 숙제를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이들이 이루어낼 수 있기를 바래본단다.

 

 

2.

시를 영어로 poem이라고 하는데, 그냥 그런가 하고 생각했는데, 이 시의 어원이 있다고 하는구나. 시의 그리스 어원은 poiein으로 뜻은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하는구나. ()는 창조해 내는 것이야.  무엇을? 너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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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poem)의 그리스 어원은창조하다(poiein)’이다. 시는 우리에게너의 삶을 창조하라고 말한다. 삶에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다. 비가 내리는 순간, 꽃이 피는 순간, 사랑과 고독의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 시는 그 특별한 순간들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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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첫째가 시를 한편 썼다면서 보여주었잖아. 자리에 앉아서 화이트보드에 그럴싸한 동시 한 편 뚝딱. 또 조금 있다가 아까 쓴 시는 지우고, 또 다른 동시 한 편을그래 시라는 것이 읽기는 어려워도 잘 생각해보면 그나마 쉽게 접해볼 수 있는 문학 장르가 아닐까 싶구나. 소설을 써 본 사람은 드물어도 시를 써 본 사람은 많을 테니까 말이야. 너희들도 형식과 소재에 구애 받지 말고, 너희들의 삶과 생각과 일상을 시로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일기를 시로 쓰는 것은 어떨까?

 

 


(46)

필요한 것은 ‘사랑받지 않을 용기’이다. 사랑을 구걸하지 않으려면 고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군중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강둑에서 자신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 사람들이 당신을 곁눈질로 쳐다보면 당신도 곁눈질로 보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모순 덩어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모순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머리만으로는 멋진 춤과 음악을 만들 수 없다. 사람들이 나를 추방하기 전에 나 스스로 추방자가 되어야 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신이 준 선물이다.

(153)

한번은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러 가서, 이제 자식들도 다 컸으니 어머니 자신의 삶을 살라고 하면서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오늘처럼 음식을 만들어 네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음식이 너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고 하시면서 얼른 또 다른 접시를 내오셨다. 내가 갖고 있는 ‘행복’의 개념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던가. 나는 아직도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그 음식들이 아니면 맛을 잘 모른다.

(171)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이 크다. 그러나 내면의 포기가 주는 고통은 더 크다. 대시인의 시가 감동을 줄지라도, 자신이 쓴 시만큼 자기 삶의 중요한 부분을 건드리는 시는 없다. 시를 써서 바람에 읽어 주면 바람이 머릿결을 쓰다듬어 줄 것이다. 겨울강에게 읽어 주면 강물이 얼음장 밑에서 화답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178)

결국 우리가 후회하는 것은 시도한 일보다 시도하지 않은 일들이다. 인생의 광물을 끝없이 캐내지 않은 광부에서 남는 것은 불만뿐이다. 행복 여부는 우리가 외부에 행사하는 통제력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시도에 달려 있다. 잘랄루딘 루미는 "너는 자신이 문의 자물쇠라고 생각하지만 너야말로 그 자물쇠를 여는 열쇠이다."라고 썼다. 자신이라는 열쇠로 어떤 자물쇠를 열려고 시도해 보았는가? 산골짜기 모래를 파헤쳐 사막을 만들려고 해 본 적이 있는가? 금을 발견하든 발견하지 못하든 쇳조각이라도 캐내 한번 깨물어 보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181)

내일(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일이다. 정치인을 떠나 인간적으로 내가 좋아한 사람이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오래전, 그가 종로구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였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선거 유세를 하기 위해 내가 사는 동네에 왔다. 그의 연설을 듣는 이는 선거 운동원을 제외하면 나를 포함해 서너 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는 열정을 다해 말을 했고, 끝난 뒤 내가 인사를 하자 반가워하며 내 시집과 내가 번역한 <성자가 된 청소부>를 잘 읽었다고 말했다. 깨달음과 진리 추구는 결국 인간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이라는 데 우리는 동의했다. 나에게 각인된 그의 인상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순수한 열혈청년의 모습이었다. 아름답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그가 세상을 떠나고, 우리는 아직도 많은 문제들을 힘겹게 헤쳐 나가고 있다.

(202)

우리가 하려는 일에 대해 세상은 언제나 ‘왜’냐고 묻는다. 마치 자신들은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인도를 가려고 하면 왜 위험한 그런 곳을 가려느냐고 묻는다. 핀란드에 오로라를 보러 가려고 하면 왜 자격증부처 따지 않느냐고 묻는다. 채식을 실천하려고 하면 채소에는 생명이 없느냐고 묻고, 무정부주의자라고 하면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런 질문들에는 일일이 답할 필요가 없다. 어떤 대답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해시키느라 자신 안의 불을 다 태울 필요는 없다. 외롭고 쓸쓸할 때, 눈을 멀리 돌리고 산을 바라보라. 훨씬 더 외롭고 굳건한 산이 거기 말없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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