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최영미
<선운사에서>
(28)
사랑이란 두 개의 심장을 가까이 포개는 거다. 두근거리며 안았을 때, 안긴 그의 두근거리는 심장이 느껴질 대 우리의 심장은 더 두근거리게 된다. 둘의
가슴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엄청난 파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파동은
13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블랙홀 한 쌍이 합쳐져 생겨난 중력파와 다름없다.
(58)
무릇 욕망의 과잉은 예술적 성취에 오히려 해가 되는 법, 그러기에
대체로 아마추어가 전문 작가보다 더 감정이 풍부하고 진실하고 의욕적인 편이지만, 예술적 결과는 그에
비례하지 않는 것. 하지만 철없고 순수했던 그 시절, 열정으로만
가득 차고 미숙했던 그 시절이 그래서 아름답고 그리운 것 아니겠는가.
(70)
이야기보다 목소리를, 목소리만이 아니라 침묵까지 듣는 것이 진짜 경청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도 퍽 소중한 일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궁극적인 전언(傳言), 곧 메시지가 아닐 때가 많다. 어떨 땐 그냥 말하는 것 자체가 그의 목적일 수도 있다. 진짜 말하고픈
전언이 표면의 전언과 반대일 때도 있다. 그러기에 고생한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행복해하는 목소리가 들린다면
진실은 목소리에 있지, 이야기에 있지 않다는 것 아니겠는가. 더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71)
시를 읽는 일이 대저 그와 같다. 시에서 이야기만 추려 읽는 것은
충분한 일이 못 된다. 우리는 시인의 목소리를 읽고, 침묵마저
읽어야 한다. 말한 것과 말한 것 사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 말로 하지 못한 것까지, 아니 시인 자신도
모르는 것까지, 보이지 않는 암흑까지 경청하며 읽어야 한다. 물론
시인이라고 해서 제 목소리에 취하지 않는 자는 아닐 것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목구멍이 아닌
귀로 들으려 애쓰는 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는 타인 대신 아파하고, 신음해
주고, 끙끙 앓는 소리로 간신히 침묵을 뚫고, 침묵을 소리처럼
흘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 마음으로 타인의 목소리를 읽고, 시인의 마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읽는 것, 그리하여 오동나무 소녀에게 목소리를 담아 주고, 엘리자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며, 인어 공주의 목소리를 회복해 주었으면 싶다.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며, 인어 공주의 목소리를 회복해 주었으면 싶다. 목소리를 회복해 주는 것, 그것이 이 불통의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이자 방식이었으면 싶다. 목소리가 살아야 사람이 산다. 목소리는
곧 그 사람이니까.
(80)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떠나간 사랑을
한탄하는 듯하지만, 청춘의 세월이야말로 내가 잘못해 떠나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 억울함으로 어디선가 볼멘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잠시 흥분하는가
싶더니 이내 담담해진다. 그래서 더 애절하다. 가는 세월, 가는 청춘과 더불어 조금씩 잊혀 가는 것이 인생임을 받아들이려는 듯, 화자는
깨달음처럼 정의를 내린다. 산다는 건 매일 이별하는 거라고. 매일
하루하루와 이별하는 거라고. 이제 진짜 서른을 맞이한 것이다.
(85)
원숙하면 곧 썩기 일수다. 그러나 썩지 않으려면 원숙함의 반대 길로
가야 한다. 나이 먹었다고 달관하고 도통한 척하지 말고, 아이가
되어야 한다. 서른이 아니라 마흔, 쉰이 넘어도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시인은 그래야 한다고, 그것이 인생
공부의 교훈이라고 설파하는 것 같다.
(112)
이제는 유행어처럼 즐겨 쓰게 된 말. “이 또한 지나가리라” 문제는 이 말을 고난의 시절에만 쓴다는 것이다. 원래 이는 구약
성서의 인물 다윗이 기쁠 때 교만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절망에 빠지고 시련에 처했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말로 반지에 새긴 글귀가 아니었던가. 기쁜 오늘 하루도, 힘든
오늘 하루도, 이 또한 모두 지나가리라. 그러기에 전인권은 <걱정 말아요 그대>라는 노래에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 하지 않았던가.
(121)
일생을 살지만 매일 살 수 있는 것은 하루밖에 없다. 그렇게 하루하루, 그러다 어느 날, 그날도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인생의 마지막
빨간 석양이 물들 때, 그때 나는 왜 여기에 서 있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많이 미안하고 부끄럽긴 하겠지만, 사랑과 혁명이 어찌됐든, 그것도 따지지 않을 것이다. 유대를 나눈 이들과 헤어지는 슬픔이
아주 크겠지만, 떠나는 게 내 잘못은 아니니 서로의 발잔등을 보며 위로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냥 올리버 색스처럼 감사할 것이다. 긴 하루 짧은 인생이든, 짧은 하루 긴 인생이든, 매일이 축복이었다고 여기까지 축복이었다고. 그리고 종소리를 들으며 다시 또 설렐 것이다.
(195)
시 한 편 순산하려고 온몸 비틀다가
깜박 잊어 삶던 빨래를 까맣게 태워버렸네요
남편의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을
내 시 한 편과 바꿔버렸네요
어떤 시인은 시 한 편으로 문학상을 받고
어떤 시인은 꽤 많은 원고료를 받았다는데
나는 시 써서 벌기는커녕
어림잡아 오만 원 이상을 날려버렸네요
태워버린 것은 빨래뿐만이 아니라
빨래 삶는 대야까지 새까맣게 태워 버려
그걸 닦을 생각에 머릿속이 더 새까맣게 타네요
원고료는 잡지구독으로 대체되는
시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시의 경제는 언제나 마이너스
오늘은 빨래를 태워버렸지만
다음엔 무얼 태워버릴지
속은 속대로 타는데요
혹시 이 시 수록해주고 원고료 대신
남편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 보내줄
착한 사마리언 어디 없나요
- 정다혜, <시의 경제학>
(238)
그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바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라틴어가 나온다. 중세 기독교 시대를
지배했던 언어가 지상의 명령처럼, 하나의 성스러운 주문처럼 학생들에게 던져진다. 영화 속 한글 자막은 한결같이 이 구절을 “현재를 즐겨라” 또는 “오늘을 즐겨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원래
영화에서는 카르페 디엠에 대해 이야기하기 직전, 키팅이 한 학생에게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바로 지금이니 언제나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오늘 이렇게 활짝 핀 꽃송이도 내일이면
시들고 말지어다”라는 로버트 헤릭의 시 <To the
Virgins, Make Much of Time>을 읽힌다. 그러나 나서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바로 지금이니’의 정서를 가리키는 라틴어가
곧 카르페 디엠이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때를 놓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함이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