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 국경 문예중앙시선 24
우대식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의 모든 시인은 좌파이고 혁명가인가? 그들이 무슨 뻔질난 열정이 있어 혁명가이기야 할까만 적어도 그들은 늘 혁명을 꿈꾼다. 그래서 이 시인도 이렇게 노래한다. '몽유의 회벽을 개어 바른 건물 앞에서 나는 헤매리라'. 그러므로 시인들은 모두 몽유병자인지도 모른다. 서정시로 가득찬 이 시집에서도 혁명의 냄새는 어김없이 배어 나온다. '혁명이란 독백이지/ 예세닌은 이런 겨울밤/ 담배를 물고 보드카를 홀짝이며/ 또 다른 혁명에 대한 명상에 빠졌을 것이다 -(예세닌을 생각하는 밤에서)'라고 노래한다. 돌아갈 곳이 없는 '이념의 떠돌이'인 자신을 돌아보며 예세닌을 그리워 하는 밤, 시인은 혁명의 몽유를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대식은 서정시인이다. 그를 일컬어 혁명가라는 말은 당치도 않고 좌파라는 말은 더 온당치 않다. <설산국경>에 넘쳐나는 서정시들은 자본 앞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기어다니던 우리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그를 서정시인으로만 자리매김하는 것도 온당치가 않다. 그는 허무주의자이기도 하다. 허긴 시인들은 모두 허무주의자이기도 하므로 그의 시에서 흘러나오는 허무가 새삼스럽지는 않다. '바람이여/ 다시는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지 마라/ 허무의 모가지, 모가지/ 고향을 떠난 염치없는 이리들이 들판을/ 배회한다-(바람의 사원에서) 그러나 시인의 허무는 그 근원을 허무에 두지 않는다. 그는 버림 받는 자, 외로운 자, 세상의 슬픈 자들을 바라보며 허무를 키워 나간다. '나는 바람의 후레자식......살아 있다 살아 있다/ 이를 내 유서라 하자-(유서에서)'


세상의 모든 시인들은 외롭고 쓸쓸하고 슬프도록 태어났다. 나도 자주 외롭고 쓸쓸하고 슬프다. 그러므로 시인들의 근원적인 외로움과 쓸쓸함과 슬픔을 그 근원까지 모두 이해한다. 시인들은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자이고, 너무 일찍 하늘의 비의를 알아버린 자들이다. '나는 크게 결심하였다/ 나는 간다/ 내가 도달한 곳이 본래(本來)이다......아버지도 어머니도 실은 팽팽한 활시위에 놓인/ 내 굴욕의 촉이었음을 고백한다......한 인간의 굴욕이 음각된 것을-(이력에서)'이라고 시인은 자신의 태어남이 '굴욕이 음각'된 것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처럼 시인은 굴욕의 태어남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그 굴욕의 태어남은 너무도 당연히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늘 '대지 깊은 곳으로 혈육을 찾아가는 그의 여행은/아주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며/ 한 순간에 끝날 일이다-(바람이 보내는 경배)'라고 말한다. 굴욕의 태어남은 늘 대지 깊은 곳을 향해 있었으니 그 생이 어찌 명랑하고 또 명랑하리오.


그러한 생이, 누구나 그러하듯이,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행복이란 말이 넘쳐나고 누구나 행복하기를 꿈꾸지만 정작 행복을 찾은 사람은 많지 않다. 행복은 순간순간 바람처럼 머물지만 고통은 긴 장마처럼 우리 삶을 잠식한다. 그래서일까, 지상의 글들과 말들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넘쳐난다. 그래서일까, 역설적으로 그 행복은 이 지상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아이들은 점점 똑똑해지고/ 점점 슬퍼진다......일곱시만 넘으면 대문이 잠기고/ 할머니가 보는 연속극 보며/ 함께 울고 웃는/ 긴 밤의 유폐-(유폐)'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할머니의 집에서 유폐되었지만 어른인 우리들은 어디에 유폐되었을까. 오히려 할머니의 집에 유폐당한 아이들이 부러울 정도로 어른들의 유폐는 그 자리가 없다. 유폐당하지 않고 사는 어른들은 정작 지상과 하늘 모두에 유폐당한 것을 모른다. 희미하게 유폐의 흔적을 찾아가는 시인들은 그래서 비극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귀가 웃는다......귀가 서럽다......향기를 듣는다......시인들이 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알 법하다/ 혼자 웃고 싶다는 뜻일 테지-(귀와 모자에서)'에서처럼 시인의 귀는 웃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향기를 듣기도 한다. 그러면서 때로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혼자서 깔깔깔 웃고 싶기도 할 것이다.


<설산 국경>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시인의, 이웃의, 혁명의, 허무의 이야기들이 문자가 되어 펄럭인다. 그 펄럭임을 태풍전야의 바람처럼 읽는다. 고요하되 고요하지 않은 술렁임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