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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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현의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다 "우륵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게 무리수"라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적는다.


이 이야기는 우륵을 중심으로 흐른다. 하지만 역시 우륵이 주인공은 아닐거다.

진짜 주인공은 소리이고, 악기일 거다.

쇠의 소리, 금의 소리, 사람과 고을, 나라의 소리.

그리고 그 소리들을 내는 제가끔의 악기들.

중요한 건 균형이었을 거다.

그래서 우륵이 앞에 세워진 것이고, 우륵이 현이 되어 제가끔의 소리를 받아 들려주고 있던 걸 거다.


간과한 것이 있다.

우륵이 금을 만드는 과정, 가야금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다.


「그 소리는 나무의 소리이기는 하지만, 빈 것을 지나온 소리였다. 빈 통이 단단한 나무의 소리를 펴서 둥글게 돌려내고 있었다._198쪽」


「― 니문아, 봐라, 비어야 울리는구나. 소리란 본래 빈 것이다. 비어 있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있는 것이다._199쪽」


「― 여러 고을의 금들이 석 줄이나 넉 줄인데, 이제 새 금에 몇 줄을 걸어야 하리까?

  ― 열두 줄을 걸자. 열두 줄이면 이 세상의 넓이와 모든 시간이 담기기에 족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두 손은 능히 열두 줄을 넘나들며 울려낼 수 있다. 더 많아도, 더 적어도 안 될 것이다. 열두 줄이다._199쪽」


「― 니문아, 다로의 금이 생각 나느냐?

  ― 줄을 버팀목으로 고여, 그 오른편이 튕겨내는 소리를 왼편이 데리고 놀 수가 있었습니다.

  ― 그랬다. 새 금에 줄마다 버팀목을 받쳐야 한다._199쪽」


「금은 길이가 다섯 자 다섯 치에 폭이 한 자 세 치로, 사람의 키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았다. 굵고 가는 줄들이 가지런히 들어섰고 버팀목들이 들어선 모양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대열과 같았다.

  ― 니문아, 이것은 곧 사람의 몸이로구나. 끌어안고 뜯어보아라._200쪽」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비어야 한다. 하지만 비어 있음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실히 있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비움이다.

세상의 넓이와 모든 시간을 담을 뿐 아니라 사람의 두 손이 능히 넘나들 수 있는 현의 수가 열두 줄이다. 그보다 많으면 능히 넘나들 수 없겠고, 그보다 적어서는 세상의 넓이와 모든 시간을 담아내지 못할 거다.

 이것은 균형이 맞는 거다.

 줄만 걸어서는 오른편이 튕겨내는 소리를 왼편이 데리고 놀 수 없기에 줄에 버팀목을 고였다. 

 이것은 이치다.

 그 금의 길이와 폭이 사람의 몸과 비슷하다. 

 이것은 사람이다.


결국 우륵은 하나의 금을 만드는데 사람의 모든 능력과 가능성을 담았다. 제가끔에 맞는 모든 소리를 담고 있기에 누구나 자기의 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 소리를 내기 위함이라 해도 비워야만 한다는 거다.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이치에 따라 균형을 잃지 말아야만 한다.


악기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누구의 소리를 내는가? 

악기의 현을 울리는 사람의 소리다. 


현의 노래는 가야의 이야기도, 신라의 이야기도, 신라 장군 이사부나, 대장장이 야로, 우륵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저마다의 소리로 울려댈 독자와 그 독자의 가능성이 만들어갈 세상의 이야기다.


제가끔으로 읽어 울려야 좋은 이야기로구나.



혹 작가 님이 들으신다면 묻고 싶은데, 왜 이렇게 어렵게 그려내셔야만 했습니까.

우문이지요. 그래야만 하셨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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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을유세계문학전집 65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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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_149쪽


어쩌면 이 한 문장과 마주하기 위해 그토록 여러 번 <데미안>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 한 문장을 적기 위해 헤르만 헤세는 이 이야기를 적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누군가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아마도 없을 누군가는 "그럴 리 없다!"며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나를 흥분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는 표현은 나를 흥분시킨다.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표현은 그 흥분에 열기를 부추긴다.

결국 그렇게 완성된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는 표현은 아득하고 혼미하기까지 하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건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니 새로운 삶을 보고자 이 작품을 펴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은 새롭기보다 구태의연하기 쉬울 것이다. 그럴 것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내면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그 안에서 우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느리고 구태의연하지만 그 관조의 상태는 격렬한 변화와 거의 같은 공간에 놓여 있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얇게 드리워져 있던 장막이 걷히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상상하지 못한 풍경을 슬쩍 드러내는 거다. 

 

이제는 지금까지 거듭해 온 구태의연한 습관이 장애물이 되는 순간이 되었다. 단순히 멈추어 들여다보기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이제 익숙해서 덜 고통스러워졌을 거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떨어진 곳의 풍경은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맞춤한 세계임에도 무척 낯설게 느껴질 거고 동경과 동시에 공포 또한 품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될 거다. 선택의 시간이다. 열린 장막 안으로 한 걸음 내딛을 것인지, 조용히 못 본 것처럼 장막을 되돌릴 것인지 말이다.


싱클레어는 기묘한 소년 데미안을 만난다. 그리고 데미안과 만나기 전에 자신의 평화롭고 안정적이며 아름다운 세계가 단 하나의 적, 자신의 박해자, 프란츠 크로머로 인해 부서지는 충격을 겪는다. 이 선량하고 순수한 소년 싱클레어는 매일 같이 탈선으로, 더러움으로, 치욕으로 가득한 세계로 떠밀려간다. 평화와 순수의 세계의 주민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홀로 고민하는 동안 병이 나기도 한다. 치욕과 고통을 견디던 싱클레어는 자신을 괴롭히던 치욕이 누이들에게 옮겨갈 위기에 처하자 선택의 기로에 세워진다. 그리고 이 때 데미안이 나타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와 프란츠 크로머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하면서 싱클레어에게 말을 걸어오고, 떠나기 전에 "달리 방법이 없다면 때려죽여 버려!"라는 무시무시한 조언을 남긴다.

 결과적으로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와 대결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이 무엇인가를 바꿔놓았는지 프란츠 크로머는 더 이상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게 된다. 이후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가까워지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가야할 길, 추구해야 할 삶에 대해서도 깨달아 간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결코 데미안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싱클레어 자신, 자기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데미안>은 내겐 무척 특별한 작품이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데미안을 읽고, 충격과 함께 "나 역시 카인의 증표를 가진 것이다."라고 믿게 되었다. 그 후에 알게 된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중 2병이었구나."하는 조롱 섞인 핀잔을 듣기 일쑤였기에, 아무데서나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가끔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도 비슷한 반응에 단지 웃으며 응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들은 그들의 평화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나는 나의 투쟁으로 얼룩진 세계로 나아가는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였다.


<데미안>은 대표적인 성장 소설이라고 한다.

주인공이 나이 어린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는 면에서는 분명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소설에는 성장보다는 투쟁의 요소가 더 많이 숨어 있다.

결정적으로 흔히 <데미안>하면 떠올리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_105쪽는 구절만 봐도 성장이라고 하는 부드럽고 고요한 느낌보다 파괴라고 하는 거친 투쟁의 느낌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에 더해 싱클레어가 자신으로 가는 길을 가기 위해 경험하는 세계의 부서짐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끊임 없이 투쟁하는 자아의 모습을 그려 보여준다.


<데미안>의 감상은 기운을 빼놓지 않고는 쓸 수가 없다. 너무 긴장하게 되어서는 힘이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헤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사실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든 헤세는 자신으로 살기 위해 끊임 없이 자기의 세계를 부수는 과정을 반복했을 것이라는 거다.  

 신을 세계의 절반이라 하고, 악마까지를 더해야 하나의 세계가 된다는 것은 어떤 시각에서는 범죄를 넘어 죄악이라 비난 받을 위험까지도 품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헤세는 거듭 신과 악마를 한 세계에 몰아 넣는다. 그리고 그 세계란 다름 아닌 하나의 존재, 하나의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의 밝은 면, 선한 성품, 친절하고 상냥한 모습만을 보고자 하고, 보여줘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밝은 세계, 공동의 세계의 규칙이기도 하다. 선한 사람은 사랑받고 악한 사람은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곳, 그것이 반쪽짜리 세계다. 하지만 완전한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왜냐하면 애초에 사람에게 선과 악은 명백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그때 그때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미움을 받을 수 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사랑과 환영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이 반쪽짜리 세계의 진짜 모습이다.


 사람은 악인을 미워한다. 하지만 악인보다 더 미워하는 것은 자신을 악인이라 느끼게 만드는 더 선한 자다. 

옛 어른들은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다 하는 말로 그 가르침을 대신했다. 그러니까, 너무 맑다는 건 사람이 너무 선해서도 안 된다는 말인 셈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정말 맑은 사람이 고기가 없는 것을 아쉬워해서 스스로를 더럽힌다면 그것은 정말 그 사람 자신을 위한 일일까? 자신이 가려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버리고 다중, 대중이 원하는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맑은 물에는 그 맑은 물에만 살 수 있는 고기가 있기 마련이다. 너무 맑은 물은 있을 수가 없다. 혹은 너무 맑은 물도 분명 때와 시를 보내며 변하게 된다. 하나의 세계인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나는 새처럼, 그 물도 한 세계를 거듭해서 부수어 왔을거다. 하나의 상태에 계속 머무른다면 언제까지고 맑을 수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나는 선한 존재, 신과 같은 존재일 거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악한 존재, 악마와 같은 존재일 거다.

하지만 그런 존재의 선악 구분이 나의 길을 가는데 어떤 장애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이 나에게 덧씌운 세계는 그저 부수어 나가야 할 수많은 세계 가운데 하나일 것이기에 끊임 없이 투쟁을 계속할 뿐이다.


사실 처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 어쩌면 데미안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싱클레어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일 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읽었을 때부터는 데미안이 확실히 존재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믿어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 새삼스레 데미안의 실존에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데미안>의 마지막 구절이 달리 읽혔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나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그와 똑같이 닮아 있는 나를._193쪽

이야기 속에서 헤세가 거듭 말하는 있는 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미워하지 않는다거나,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흥분하지 않는다거나, 진정으로 해야 할 일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나와 '똑같이 닮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내 안에 있는 것, 바로 진정한 자신일 수밖에 없다.

싱클레어가들여다보는 '어두운 거울'이 있는 곳은 '나 자신 속'이다. 그리고 '나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그와 똑같이 닮아 있'는 것도 싱클레어 자신이다. 

이쯤 적으면 왜 데미안의 존재에 의구심을 갖는지 이해했으리라.


데미안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싱클레어 자신의 투영인지는 사실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결국 싱클레어가 자신의 모습에 가서 닿았다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내면, 자기 안에서의 투쟁에서만 싸웠던 것이 아니다. 외부, 그러니까 물리적인 세계가 부딪히는 현장 즉 전쟁에서도 투쟁을 계속 했다. 주위에서 죽어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들이 추구하는 삶을 헤어려보려고 애썼다. 단지 그들 스스로가 미래를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광기어린 환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젊은이들을 보며 싱클레어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마지막 순간에 그 역시 폭발에 휘말려 의식을 잃었다가 한참 후에야 깨어난다. 그리고나서 고백하기를 「붕대 감는 건 고통스러웠다. 그 후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고통스러웠다._193쪽」고 한다. 그 고통 속에서 들여다 보는 것이 위에 적은 '검은 거울'이다.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끝났다거나 멈추지는 않았다. 다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거다. 

이렇게 적고 보니 꼭 자기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 무수한 세계를 부수면서 무시무시한 탄생의 공포를 감내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새삼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렇게 생각한다.


"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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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23 0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도 다시 을유문화사 고전을 사게되더라구요.^^

대장물방울 2015-05-23 15:13   좋아요 0 | URL
을유 세계문학 몇 권을 읽어봤는데 번역이 매끄럽고 좋더라고요. ^^
그래서 조금씩 들여놓게 되는 것 같아요.
 
데미안 을유세계문학전집 65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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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돌아온 탕아가 그리워하던 고향 집의 방을 보고 그 향기를 다시 맡을 때처럼 내 마음은 애틋함과 감사함으로 그것들을 반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제 더 이상 내게 속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였고, 나는 이제 죄를 잔뜩 진 채 낯선 물결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모험과 죄악에 얽혀 들어 적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위험, 불안,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86쪽

그 모든 것이 환한 광채로 덮여 있었다. 모든 것이 놀랍고 신성하고 정결했다. 그리고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어제만 해도, 아니 몇 시간 전만 해도 내 것이었고, 나를 기다렸는데 지금은, 이제 이 시각에는, 타락하고 저주받았으며,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나를 밀쳐 내며, 역겨워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장 멀리 되돌아 간 유년의 금빛 찬란한 정원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모든 사랑스럽고 친밀한 체험들이 ― 어머니의 입맞춤, 성탄절, 집에서 보낸 경건하고 환한 일요일 아침, 정원의 꽃들 하나하나가 ― 그 모든 것이 황폐해져 버렸고,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짓밟아 버린 것이었다! 

 <데미안> 속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의 세계가 완전히 부서져버리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다. 위에 인용한 두 부분은 처음으로 세계가 부서져나감을 느끼며 처음으로 탕자가 되던 순간과 탕자에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 후 방황 속에서 처음으로 술에 취해 엉망으로 망가져 다시금 탕자로 전락해버린 자신을 바라보는 싱클레어의 감정을 그리고 있다. 세계가 부서진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계기는 무척 다르다. 

 처음에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적'의 위협으로 인해 떠밀리듯 세계의 부서짐을 '당했다'면 두 번째에는 스스로 '부순' 꼴이 된 거다. 

'위험, 불안, 치욕'이라는 감정과 '역겨움'이라는 감정의 대립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건 부서지는 세계의 배경이 그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데미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세계의 부서짐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충격과 공포, 두려움과 고통도 그때마다 다르게 다가올 것이고,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를 죽이지 않으면 오늘의 내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름을 잊은 불가의 유명한 수행자가 말했다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라"는 것도 '죽음'이라는 면에서는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내일을 맞이한다는 것이 오늘의 내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함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은 적에 의해 떠밀려 죽음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내딛을 것인가의 선택만이 남는다.

 어린 싱클레어는 최초의 적 프란츠 크로머의 그림자로부터 혼자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데미안의 힘에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그 도움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뿐더러, 프란츠 크로머를 데미안과 싱클레어 사이에서 일종의 금기로 만든다. 

 술에 취해 방탕에 빠져든 젊은 싱클레어는 자신의 방황을 계기로 세계의 부서짐,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그 죽음에서 회복하고 본래 자신이 지녔던 '카인의 증표'가 더 분명해지는 계기로 만든다. 

 이왕 부서질 세계라면, 스스로 부수는 길을 택할 일이다.

 


24쪽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체험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새겨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선 넘어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난 첫 번째 칼자국이었다. 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線)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점점 수가 늘어나고, 아물고, 잊혀 가지만, 우리 마음 속 가장 비밀스러운 방에서는 여전히 살아남아 계속 피를 흘린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 어쩌면 가족은 자기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자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어떤 면에서는 극복되어야 할 존재다. 싱클레어의 이러한 체험은 우리가 흔히 '반항'이라고 부르는 충돌의 여러 모습 가운데 하나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권위와 위력, 신성함에 최초의 반기를 드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첫 번째 칼자국을 새기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칼자국에서 흐르는 피는 자신만의 자신이 되기까지 멈추지 않는다. 기둥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기둥의 것이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고통을 참지 못해 상처내기를 그치거나 피를 멎게 한다면 우리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자신에게서는 멀어지게 된다.

 


25쪽

처음으로 나는 죽음을 맛보았다. 쓰디쓴 맛이었다. 왜냐하면 죽음은 탄생이니까, 무시무시한 새로운 것 앞에서의 불안과 두려움이니까.

 죽음의 맛은 쓰디쓰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이 곧 탄생이라고도 한다. 에스프레소의 맛은 쓰다. 하지만 그 쓴맛 너머에 강렬한 단맛도 기다리고 있다. 불안과 두려움은 새로운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오는 거다. 사람은 때로 새로운 것의 '무시무시함'이 두려워 더 좋은 것조차 마다한다. 그 결과 보통의 삶에 보통 혹은 보통 이하의 만족감을 느끼며, 때로는 불평을 하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43쪽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 일을 받아들이고 나를 잘 보살펴 주고 진정 안타까워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리나는 것을. 그 모든 것이 운명인데도, 그들은 그저 일종의 탈선으로 보리라는 것을.

 열한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렇게까지 느낄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그런 사람들 앞에선 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련다. 인간을 더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겠다.

 이해라는 것은 단순한 받아줌과 보살핌, 안타까움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애써 설명을 거듭해도 상대를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이해는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제각각으로 보게 되어 있기에 타인이 되어 전적으로 그를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전할 상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렇게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의미가 없다. 그러니 그렇게 믿는 이들에게, 인간을 더 잘 아는 이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데미안>은 어쩌면 '그런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는 시험문제인지 모른다.



51쪽

그 후에도 내 두려움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내 적과 맞서 길고도 무서운 대결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랬던 만큼, 모든 것이 그리도 고요하고 그리도 비밀스럽고도 평화롭게 흘러가는 것이 더 이상했다.

 싱클레어의 이 '각오'가 운명의 어떤 수레바퀴를 굴렸는지 확신은 없다. 다만 분명 어딘가에서 '죽음'에 정체되어 있던 그의 수레바퀴를 어느 쪽으로든 움직이게 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56쪽

아, 이젠 나도 안다. 세상에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내키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 번 데미안을 읽었지만 이 문장이 전에도 눈에 들어왔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힘겹다'가 아니라 '내키지 않는다'니. 그 무엇보다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싱클레어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거기에 자신이 그 내키지 않는 길로 갈 것임을 확실히 깨닫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알아 버렸을 때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프란츠 크로머에게서 벗어나, 데미안의 길과 마주했을 때 싱클레어가 유년 시절로 돌아가 부모님의 세계로 숨어든 것은 당연하다. 결국에는 떠나게 되겠지만 아직은 평화가, 평화로운 세계에서의 삶이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보다 더 간절했던 시기였을테니 말이다.



67쪽

내가 이런저런 것을 상상할 수는 있겠지. 무조건 북극에 가고 싶다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것을 말이야.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거나 충분히 강력하게 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소망이 완전히 나 자신 안에 있을 때, 실제로 내 존재가 완전히 그 소원으로 꽉 차 있을 때뿐이야.

 하나의 소망으로 나 자신을 완전히 채우는 것의 불가능성, 그 어려움을 얼마나 익히 알게 되어야 했던가. 그럼에도 그 불가능성을 넘어서라고 요구하는 구나, 나의 운명이여.



74쪽

생각이란, 우리가 그대로 살아 내는 것만 가치 있는 거야. 너의 '허락된 세계'는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걸 넌 알았어. 그런데 신부님이나 선생님들이 하듯 두 번째 절반을 감추려고 했지.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야! 한번 생각이라는 걸 시작하면 누구도 그렇게 못해!"

 엄격하다 못해 가혹한 말이다. '우리가 그대로 살아 내는 것만 가치 있는' 것이 생각이라니.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기에 우리는 '생각하지 말 것'을 교육 받는 지 모른다. 마치 <1984> 속 이중사고처럼 인식하는 동시에 인식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나는 틀렸다. 이미 생각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어져 버렸다는 거다. 이제는 둘 중 하나다. 가치 있게 되는가, 가치 없게 되는가. 



111쪽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난 그것을 살아 보려 했을 뿐이다. 그게 왜 그리 힘들었을까?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 가장 '내키지 않는 일'이었던 게 바로 그 이유다. 자신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자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유는 여럿이다. 그것이 너무 '제 멋대로'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타인과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르다는 건 그것 자체로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다름이 끊임 없이 세계의 부서짐, 죽음을 경험해서 새로운 탄생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시작이라면 힘들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127쪽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라 하고,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이고, 자기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지니고 있어. 아브락사스는 자네의 어떤 생각에도 반대하지 않고, 자네의 어떤 꿈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그걸 잊지 말게. 그러나 자네가 언제고 흠잡을 데 없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면, 아브락사스가 자네를 떠나. 자네를 떠나서 자신의 사상을 담아 요리할 새 그릇을 찾는 거지.

 우리는 언제든 '무시무시한 탄생'의 공포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그 방법은 '흠잡을 데 없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거다. 우리가 품고 있는 밝음과 어두움의 세계 가운데 밝음이라는 절반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면 신인 동시에 악마인 아브락사스는 우리를 떠나고, 우리는 다시 공통의 세계에 편입될 수 있게 된다는 거다. 하지만 역시, 이미 생각을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을테고 공포는 멈추더라도 후회는 멈출 수 없게 될 거다.



131쪽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우린 그 누군가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내면에 들어앉아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거야.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못하거든.

 우리가 미워하는 것, 사랑하는 것,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모두 우리 내면에 들어 있는 것들이다.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의 버릇을 닮는 아들이 그 흔한 증거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로 볼 수 없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흥분은 조금도 우리를 나아지게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더 과장된 흥분에 자신을 맡기게될 뿐이다.



148~9쪽

누구에게나 사명이 있지만, 누구도 그 사명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고쳐 쓰거나, 마음대로 관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신들을 원하는 것도 틀렸고, 세상에 그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생각도 틀렸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의무가 있을 뿐 그 어떤 다른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안에서 확고해지고, 자기 자신의 길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 길이 어디로 이끌든 간에.

(중략)

나는 시를 쓰기 위해, 설교하기 위해, 그림 그리기 위해 거기 있는 게 아니었다. 나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그저 부차적으로 생겨나는 일이었다. 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작가는 이 한 문장을 전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데미안>에서 헤르만 헤세가 하고 싶은 말을 한 문장으로 꼽으라면 역시 이 문장을 꼽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 역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소설을 썼다. 여행을 했고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이를테면 연장이다. 무엇을 위한 연장인가 하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만들어가기 위한 연장인 거다. 

 그렇다고 연장들이 가치 없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 연장들은 반드시 필요했고,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연장을 얻거나 잃어버리는 일은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 그것을 쓰고 있는가 하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인 거다.



175쪽

하늘과 숲과 시내, 모든 것이 새로운 빛깔로 신선하고 찬란하게 다가와 그의 것이 되었고, 그의 말로 속삭였다. 그리하여 그는 여인을 하나 얻는 대신 온 세계를 가슴에 지니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별이 그의 안에서 타올랐고, 그의 영혼을 뚫고 지나며 환희의 빛을 뿜어냈다. 그는 사랑을 했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나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럴 거다. '사랑을 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 가운데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자신을 잃어버리는 데 있지 않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데서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데 있다. 무엇을 해야하는 지 알면서도 탄생은 언제나 무시무시하게 느껴져서 자꾸만 움츠리게 한다. 그럼에도 나아가려 한다. 나를 잃어버렸다면 되찾으러 가야겠고, 되찾은 다음에는 지켜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데미안>은 내게 기쁨을 주는 동시에 밑줄 하나 긋기에도 온 기운을 쓰게 만드는 묘한 이야기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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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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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_데미안(을유문화사)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의 제목은 <헤세로 가는 길>이지만 결국은 자신에게 가는 길이 될 게 분명하다. 

작가 정여울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길을 이야기한다. 단지 그 소재가 정여울 자신이 무척 좋아하는 작가인 헤르만 헤세가 태어난 고향 칼프와 죽기까지 머물렀던 죽음의 고향 몬타뇰라일 뿐인 거다.

 정여울이 들려주는 헤르만 헤세의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헤세는 누구의 길이 되려고도, 누구에게 길을 가르쳐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럴수도 없다. 만약 그가 그렇게 했다고 느낀다면, 그건 헤세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 독자가 스스로의 길로 나아갔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정확할 거란 이야기다.


헤세를 처음 만난 건 고 1 혹은 고 2 때였다. 그때 읽은 작품이 <데미안>이다. 그리고 종종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 역시 '카인의 증표'를 가진 존재라고 믿었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다른 아이들에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도 아닐 뿐더러, 카인은 박해받는 자의 상징이다. 

더 나빠질 것이 있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통해 더 좋아질 것도 없었기에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흔히 '중 2병'이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단순히 생각하면 '카인의 증표'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는 이야기에 대한 반응으로 '중 2병' 운운 하는 것 역시 일종의 박해다. 

 "너는 우리와 다르다."는 선언을 돌려서 말하는 셈인 거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헤세의 고향인 칼프로 떠난 여행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담았다.

두 번째는 헤세의 대표작 몇 가지에 대한 작가의 해석과 이야기를 적었다. 

세 번째는 헤세가 독일을 떠나 죽기까지 살았던 스위스의 몬타뇰라의 이야기다.

여행 에세이와 서평의 균형을 잘 맞춘 것으로 보인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 책을 읽고 독일의 칼프 혹은 스위스의 몬타뇰라로 떠나고 싶어질 거고, 책을 좋아하는 이 혹은 헤세에 관심이 있던 이들은 헤세의 전작에 욕심을 내게 될 거다. 어느 쪽으로든 그 결말은 각자가 택한 길로 나아가게 되어있다.


물어볼 것도 없이 후자 쪽에 욕심이 솟았다. 생긴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 격렬한 욕구에 가까웠기에 솟았다고 적는 게 옳다.


누구나 자기의 읽는 방식이 있겠으나 나란 사람은 스스로도 감상을 적는 주제에 다른 사람의 감상을 읽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책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감상에 느끼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좋아하는 작가나 읽고 싶은 책에 대해 '서평가'들이 쓴 것은 어쩐지 읽기가 불편해지고 마는 거다.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마주한 정여울 작가의 책 이야기 역시 어느 정도는 그랬다. 그나마 <마음의 서재>를 즐겁게 읽은 기억이 있어 거부감은 없었지만, 작가가 들려주는 헤세 이야기에서 상당 부분이 심리학자 융에서 시작한다는 게 어느 정도의 아쉬움을 남겼다. 융이 프로이트보다는 거부감이 덜하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의 심리를 규격화 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한 바가 있기에 그 틀 안에서 헤세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는 게 못내 아쉬웠던 거다.

개인적 취향의 문제니 조금쯤 아쉬움을 털어 놓아도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책의 이야기는 먼저 적었던 '밑줄 긋기'에서 거의 늘어 놓은 것 같기에 여기서는 한 부분만 발췌해서 몇 마디 보태기만 해야겠다.


 76쪽

대부분 인간은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춤추고 방황하고 비틀거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살아간다고. 하지만 별을 닮은 인간도 있다고. 별을 닮은 인간은 확고하게 자신의 궤도를 걷는다고. 어떠한 강풍도 별을 닮은 인간을 날려버릴 수는 없다고. 자신의 내부에 자기의 법칙과 자기의 궤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별을 닮은 인간이다.

 


인간의 행위 중 가장 혼란스러운 상태의 하나인 전쟁에서 독일 청년들이 손에 들고 전장으로 향했던 책이 <데미안>이라고 한다. 별을 닮은 인간으로, 진정한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평생을 보낸 작가의 작품이 시대와 이념의 강풍인 전쟁 속에서 유난히 빛났다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다. 어쩌면 청년들은 헤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이해하고 납득하고 받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믿든 생각을 하든, 그들이 늘 원하는 것은 자기네가 준비되어 있고, 자기네가 필요한 존재이며, 자기네로부터 미래가 형성되리라는 사실이었다."_데미안/을유문화사


자신의 삶이 이어지건 끝장나건 관계 없이, 오직 '자기네로부터 미래가 형성되리라는 사실'이 전쟁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그들의 최후의 보루는 아니었을까? 모두가 '별을 닮은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해도 별똥별처럼 한 순간 격렬하게 타오르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같은 삶보다 낫다고 믿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헤세로 가는 길>을 읽으면서 정작 내내 생각한 것은 '내가 가려는 길'에 대한 것 뿐이었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 이 책 속 이야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으로 '별을 닮은 인간'을 옮겨 적게 됐을 거다. 인간이 모든 별의 궤도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별은 비틀거리는 것처럼, 방황하는 것처럼, 때로는 꺼졌다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 내 삶이 그런 비틀거림과 방황, 깜빡임을 계속하는 것도 내가 그런 삶을 구하고 나아가고 있기 때문일 거다.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이리 불거나 저리 불어대는 바람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내가 가야할 궤도 속에 있기 때문일 거다. 흔들림도 필요하고, 때로는 눈물도 흘리며, 방황하고, 대상도 없이 막연하지만 격한 분노를 터뜨리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나에게는 이 길 뿐이다. 세상의 길이 아닌 나에게로 가는 길, 진정한 자신에 이르는 길을 끝까지 가고 싶다.


정여울 작가는 헤세의 탄생과 죽음의 땅 뿐 아니라 그의 작품 속 배경이 된 곳들도 들러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도 자기의 길을 가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미치도록 빠져있는 작가의 발자취를 좇으며 자신의 길로 이어진 골목을 찾는 일도 즐거운 일 일 거다. 


헤세를 좋아하는 사람, 정여울을 즐겨 읽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아가려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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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틈에 2015-05-22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별 다섯개!!! ㅋㅋㅋ

대장물방울 2015-05-22 23:13   좋아요 0 | URL
흐흣, 헤세에 대한 편애의 결과물이지요. ^^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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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쪽

대부분 인간은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춤추고 방황하고 비틀거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살아간다고. 하지만 별을 닮은 인간도 있다고. 별을 닮은 인간은 확고하게 자신의 궤도를 걷는다고. 어떠한 강풍도 별을 닮은 인간을 날려버릴 수는 없다고. 자신의 내부에 자기의 법칙과 자기의 궤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별을 닮은 인간이다.


 별을 닮은 인간이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도, 여러 번 했던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의 법칙과 자기의 궤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꿈꿨다기보다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 같다. 별은 어느 순간에도 추락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그 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별을 닮은 인간이고 싶다. 나의 궤도를 확고하게 걷는, 마르고 지는 일을 염려하는 나뭇잎처럼, 혹은 마르고 지는 날을 생각조차 못하는 나뭇잎처럼 덧없고 싶지는 않다. 기왕에 덧없고자 한다면 별의 마지막처럼 화려하게 우주의 한복판에 거대한 빛무리를 남기고 사라지고 싶다. 

 별도 흐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에 밀려 흐르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질서, 내부의 법칙에 따라 자기의 길을 가는 것 뿐이다.


97쪽

나는 꽃이기를 바랐다

그대가 조용히 걸어와

그대 손으로 나를 붙잡아

그대의 것으로 만들기를


 이렇게 답하기로 했다.


나는 꽃이기를 바랐다.

그대가 조용히 다가와 

그대 눈으로 나를 담아

잠시 그대의 소유로 하기를

 


102쪽

한 사람의 시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시인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고. 시인을 향해 이론적인, 또는 윤리적인 결론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시인이 들려주는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밭을 지닌 사람은 작품이 지닌 고유의 언어만으로도 자신이 바라는 모든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 나는 관계에 서툰 편이다. 다른 무엇보다 타인에게 나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부분이 유난히 서툴다. 매일 혹은 순간순간 뭔가를 끄적이는 이유는 그 서툶을 메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할 줄 아는 게 쓰는 일 밖에 없기 때문이다.

 헤세는 유명한 사람이다. 많은 작품을 소설, 시, 그림에 이르는 넓은 분야에서 두루 남겼고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헤세는 그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지음(知音)을 가졌을까?"

위에 발췌한 문장은 「카프카 해석」에 적은 것이라 한다. 헤세는 카프카의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이해했을까? 

감히 추측해 적자면 헤세는 카프카의 작품 속에서 '말하지 않은 말'을 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 소리를 아는 사람 사이에서만 통하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단 몇 줄의 시 속에서 나눴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헤세 자신도 그처럼 이해받기를 원했으리라.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일목요연, 자세하고 많은 설명을 통해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은 사실 진정한 이해에서 오히려 멀어지는 길이 아니던가? 정말 이해하는 사람, 진정한 이해자라면 시인의 메시지를 어떤 왜곡이나 분해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만의 답을 얻는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읽을 수 있는 마음밭을 갖춰가야겠다는 마음만 가득하다.

 


110쪽

독특하게 여기는 밑줄이 아닙니다. 사진이거든요. 

 


 

 인파라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한적한 풍경입니다. 혼자 혹은 두서넛이 모여 신문을 읽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 그저 보기만 해도 느긋함이 옮아오는 그런 사진입니다. 그런데, 오호,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눈에 띄었어요. 

뭔지는 모르지만 테이블의 커피인지 혹은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노트, 어쩌면 헤세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여인입니다. 

 누구일까요? 

한참을 들여다보고, 표지 뒤의 날개를 펼쳐보고 하면서 비교분석한 결과 작가이신 정여울 님인 것으로 확신합니다.

 낯선 곳이건만, 그 풍경에 녹아들어갈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세계와 닮아있다는 것이겠지요.

헤세를 찾아간 길, 정여울 작가님의 헤세 사랑을 아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이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네요.

 


116쪽

누구든 제대로 말할 기회를 얻어

진심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책들에 관한 메모


 

 말할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다.

진심으로 이야기하기는 이야기 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진심을 전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사람, 누군가를 사랑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울 수밖에 없어지고 만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야만 할 것 같다.

 제대로 말할 기회를 늘 찾아야 하고, 진심으로 진실된 이야기를 해야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왜 이 문장이 '책들에 관한 메모'에 들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책들에 담긴 이야기 가운데 어떤 이야기가 헤세에게 진심으로 다가왔던 게 아닌가 할 뿐이다.

 


161쪽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 때, 그 첫 느낌은 반가움보다 공포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영혼을 찍는 초고화질 카메라라도 가진 것처럼 내 마음 구석구석을 엿보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일단 경계하게 된다. 그 사람은 내 상처를 치유하고, 내 안의 가장 밝은 빛을 끌어낼 가능성을 지닌 사람인데도,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서 도망치고 싶어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어쩌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삶에 도래하지 않을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적은 생각보다 흔하게 일어나는 법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기적으로 느끼지 못하거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인 거다. 

 그런 만남이 있다면 분명 나 역시 공포로 어디로든 숨어버리려 할 것이다. 두터운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무기까지 손에 쥐고 경계를 해온 사람일 수록 그 공포는 커질 것이고 도망은 더 빠를 것이다. 

 하지만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는 동안은 안타깝지만 영원히 그 상처가 나을 일은 없다. 이것은 추측이 아니라 단정이자 확신이다. 

마주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공포일 수 있고, 설렘일 수 있고, 눈부심이거나 어두움일 수 있다. 

 보통의 우리는 도망치기에 빠르고 맞서기에는 약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면 공포를 느꼈을 때 도망치지 않고 상처와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오랜 상처에서 놓여나게 되는 것 아닐까.

 


251쪽

나의 깨달음은 오직 나만이 개척할 수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어야 했다. 그는 최고의 스승을 눈앞에 두고서야 알게 되었다. 깨달은 자를 매일 본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님을. 최후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스승이 아니라 고독한 자기 인식이므로.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고 한다. 하지만 외로움은 경계해야 할 것, 타파해야 할 것, 벗어나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왜 사람이 외로운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은 "나이기 때문이다"라는 거다. 나의 인생은 누구도 먼저 가보지 못한 나만의 길이다. 그런 길을 가는데 외롭지 않다면 오히려 "자신을 삶을 살고 있는가?"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청출어람이라 했지만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가 나오기는 무척 어렵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스승을 뛰어넘을 수 없는 능력의 부족이라기보다 스승에 대한 예의, 그러니까 "어찌 제자가 되어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스승의 길에 자기를 가져다 붙여놓은 셈이라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고, 많은 것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의 삶을 살다 갔다 말하기 어려워진다. 외로움을 두려워 말자. 아무도 가지 않은 길, 나만의 길을 가는 중이라는 걸 잊지 말자.

 최후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고독한 자기 인식이라지 않는가.

 


337쪽

이 드넓은 세상에서 구름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나보다 더 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세상에서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사물이 있으면 나에게 가르쳐다오!

『페터 카멘친트』


 

  헤세는 자신을 구름에 비추었다고 한다. 위에 적은 것처럼 '그'보다 더 구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왜, 흔히 아이들이 누가누가 더 사랑하는가를 경쟁할 때 뭐라고 말하던가?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 '태양만큼' 하는 식이 아니던가?

이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많이"라는 말이기에 그보다 더 구름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더라도 '그만큼'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다른 이 역시 자신이 아는 한 가장 많이 구름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구름을 사랑한다. 홀로 물들지 않는 구름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서로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음을 사랑하고, 섞이지 않음도 사랑한다. 무엇보다, 미련도 없이 흩어질 줄 알는 그 넉넉한 무던함이 좋다.

 


401쪽

당신이 좋은 것은 아마 나와 비슷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나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올 여름에는 이 말을 써먹어보자.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는 좋아한다고 말하고, 나와 다른 여자(남자)에게는 사랑한다고 고백해보자.

나는 차마 못하겠으니, 누구든 시도해보고 그 결과를 일러줬으면 좋겠다.

이 문장에 공감했다. 좋아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것이나 사실은 이유가 없다.

비슷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닮지 않았기에 사랑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애정의 이유가 아닌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닮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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