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을유세계문학전집 65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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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돌아온 탕아가 그리워하던 고향 집의 방을 보고 그 향기를 다시 맡을 때처럼 내 마음은 애틋함과 감사함으로 그것들을 반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제 더 이상 내게 속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였고, 나는 이제 죄를 잔뜩 진 채 낯선 물결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모험과 죄악에 얽혀 들어 적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위험, 불안,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86쪽

그 모든 것이 환한 광채로 덮여 있었다. 모든 것이 놀랍고 신성하고 정결했다. 그리고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어제만 해도, 아니 몇 시간 전만 해도 내 것이었고, 나를 기다렸는데 지금은, 이제 이 시각에는, 타락하고 저주받았으며,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나를 밀쳐 내며, 역겨워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장 멀리 되돌아 간 유년의 금빛 찬란한 정원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모든 사랑스럽고 친밀한 체험들이 ― 어머니의 입맞춤, 성탄절, 집에서 보낸 경건하고 환한 일요일 아침, 정원의 꽃들 하나하나가 ― 그 모든 것이 황폐해져 버렸고,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짓밟아 버린 것이었다! 

 <데미안> 속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의 세계가 완전히 부서져버리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다. 위에 인용한 두 부분은 처음으로 세계가 부서져나감을 느끼며 처음으로 탕자가 되던 순간과 탕자에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 후 방황 속에서 처음으로 술에 취해 엉망으로 망가져 다시금 탕자로 전락해버린 자신을 바라보는 싱클레어의 감정을 그리고 있다. 세계가 부서진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계기는 무척 다르다. 

 처음에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적'의 위협으로 인해 떠밀리듯 세계의 부서짐을 '당했다'면 두 번째에는 스스로 '부순' 꼴이 된 거다. 

'위험, 불안, 치욕'이라는 감정과 '역겨움'이라는 감정의 대립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건 부서지는 세계의 배경이 그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데미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세계의 부서짐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충격과 공포, 두려움과 고통도 그때마다 다르게 다가올 것이고,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를 죽이지 않으면 오늘의 내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름을 잊은 불가의 유명한 수행자가 말했다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라"는 것도 '죽음'이라는 면에서는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내일을 맞이한다는 것이 오늘의 내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함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은 적에 의해 떠밀려 죽음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내딛을 것인가의 선택만이 남는다.

 어린 싱클레어는 최초의 적 프란츠 크로머의 그림자로부터 혼자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데미안의 힘에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그 도움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뿐더러, 프란츠 크로머를 데미안과 싱클레어 사이에서 일종의 금기로 만든다. 

 술에 취해 방탕에 빠져든 젊은 싱클레어는 자신의 방황을 계기로 세계의 부서짐,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그 죽음에서 회복하고 본래 자신이 지녔던 '카인의 증표'가 더 분명해지는 계기로 만든다. 

 이왕 부서질 세계라면, 스스로 부수는 길을 택할 일이다.

 


24쪽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체험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새겨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선 넘어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난 첫 번째 칼자국이었다. 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線)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점점 수가 늘어나고, 아물고, 잊혀 가지만, 우리 마음 속 가장 비밀스러운 방에서는 여전히 살아남아 계속 피를 흘린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 어쩌면 가족은 자기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자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어떤 면에서는 극복되어야 할 존재다. 싱클레어의 이러한 체험은 우리가 흔히 '반항'이라고 부르는 충돌의 여러 모습 가운데 하나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권위와 위력, 신성함에 최초의 반기를 드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첫 번째 칼자국을 새기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칼자국에서 흐르는 피는 자신만의 자신이 되기까지 멈추지 않는다. 기둥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기둥의 것이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고통을 참지 못해 상처내기를 그치거나 피를 멎게 한다면 우리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자신에게서는 멀어지게 된다.

 


25쪽

처음으로 나는 죽음을 맛보았다. 쓰디쓴 맛이었다. 왜냐하면 죽음은 탄생이니까, 무시무시한 새로운 것 앞에서의 불안과 두려움이니까.

 죽음의 맛은 쓰디쓰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이 곧 탄생이라고도 한다. 에스프레소의 맛은 쓰다. 하지만 그 쓴맛 너머에 강렬한 단맛도 기다리고 있다. 불안과 두려움은 새로운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오는 거다. 사람은 때로 새로운 것의 '무시무시함'이 두려워 더 좋은 것조차 마다한다. 그 결과 보통의 삶에 보통 혹은 보통 이하의 만족감을 느끼며, 때로는 불평을 하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43쪽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 일을 받아들이고 나를 잘 보살펴 주고 진정 안타까워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리나는 것을. 그 모든 것이 운명인데도, 그들은 그저 일종의 탈선으로 보리라는 것을.

 열한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렇게까지 느낄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그런 사람들 앞에선 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련다. 인간을 더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겠다.

 이해라는 것은 단순한 받아줌과 보살핌, 안타까움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애써 설명을 거듭해도 상대를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이해는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제각각으로 보게 되어 있기에 타인이 되어 전적으로 그를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전할 상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렇게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의미가 없다. 그러니 그렇게 믿는 이들에게, 인간을 더 잘 아는 이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데미안>은 어쩌면 '그런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는 시험문제인지 모른다.



51쪽

그 후에도 내 두려움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내 적과 맞서 길고도 무서운 대결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랬던 만큼, 모든 것이 그리도 고요하고 그리도 비밀스럽고도 평화롭게 흘러가는 것이 더 이상했다.

 싱클레어의 이 '각오'가 운명의 어떤 수레바퀴를 굴렸는지 확신은 없다. 다만 분명 어딘가에서 '죽음'에 정체되어 있던 그의 수레바퀴를 어느 쪽으로든 움직이게 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56쪽

아, 이젠 나도 안다. 세상에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내키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 번 데미안을 읽었지만 이 문장이 전에도 눈에 들어왔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힘겹다'가 아니라 '내키지 않는다'니. 그 무엇보다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싱클레어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거기에 자신이 그 내키지 않는 길로 갈 것임을 확실히 깨닫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알아 버렸을 때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프란츠 크로머에게서 벗어나, 데미안의 길과 마주했을 때 싱클레어가 유년 시절로 돌아가 부모님의 세계로 숨어든 것은 당연하다. 결국에는 떠나게 되겠지만 아직은 평화가, 평화로운 세계에서의 삶이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보다 더 간절했던 시기였을테니 말이다.



67쪽

내가 이런저런 것을 상상할 수는 있겠지. 무조건 북극에 가고 싶다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것을 말이야.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거나 충분히 강력하게 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소망이 완전히 나 자신 안에 있을 때, 실제로 내 존재가 완전히 그 소원으로 꽉 차 있을 때뿐이야.

 하나의 소망으로 나 자신을 완전히 채우는 것의 불가능성, 그 어려움을 얼마나 익히 알게 되어야 했던가. 그럼에도 그 불가능성을 넘어서라고 요구하는 구나, 나의 운명이여.



74쪽

생각이란, 우리가 그대로 살아 내는 것만 가치 있는 거야. 너의 '허락된 세계'는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걸 넌 알았어. 그런데 신부님이나 선생님들이 하듯 두 번째 절반을 감추려고 했지.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야! 한번 생각이라는 걸 시작하면 누구도 그렇게 못해!"

 엄격하다 못해 가혹한 말이다. '우리가 그대로 살아 내는 것만 가치 있는' 것이 생각이라니.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기에 우리는 '생각하지 말 것'을 교육 받는 지 모른다. 마치 <1984> 속 이중사고처럼 인식하는 동시에 인식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나는 틀렸다. 이미 생각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어져 버렸다는 거다. 이제는 둘 중 하나다. 가치 있게 되는가, 가치 없게 되는가. 



111쪽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난 그것을 살아 보려 했을 뿐이다. 그게 왜 그리 힘들었을까?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 가장 '내키지 않는 일'이었던 게 바로 그 이유다. 자신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자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유는 여럿이다. 그것이 너무 '제 멋대로'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타인과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르다는 건 그것 자체로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다름이 끊임 없이 세계의 부서짐, 죽음을 경험해서 새로운 탄생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시작이라면 힘들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127쪽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라 하고,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이고, 자기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지니고 있어. 아브락사스는 자네의 어떤 생각에도 반대하지 않고, 자네의 어떤 꿈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그걸 잊지 말게. 그러나 자네가 언제고 흠잡을 데 없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면, 아브락사스가 자네를 떠나. 자네를 떠나서 자신의 사상을 담아 요리할 새 그릇을 찾는 거지.

 우리는 언제든 '무시무시한 탄생'의 공포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그 방법은 '흠잡을 데 없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거다. 우리가 품고 있는 밝음과 어두움의 세계 가운데 밝음이라는 절반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면 신인 동시에 악마인 아브락사스는 우리를 떠나고, 우리는 다시 공통의 세계에 편입될 수 있게 된다는 거다. 하지만 역시, 이미 생각을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을테고 공포는 멈추더라도 후회는 멈출 수 없게 될 거다.



131쪽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우린 그 누군가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내면에 들어앉아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거야.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못하거든.

 우리가 미워하는 것, 사랑하는 것,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모두 우리 내면에 들어 있는 것들이다.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의 버릇을 닮는 아들이 그 흔한 증거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로 볼 수 없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흥분은 조금도 우리를 나아지게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더 과장된 흥분에 자신을 맡기게될 뿐이다.



148~9쪽

누구에게나 사명이 있지만, 누구도 그 사명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고쳐 쓰거나, 마음대로 관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신들을 원하는 것도 틀렸고, 세상에 그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생각도 틀렸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의무가 있을 뿐 그 어떤 다른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안에서 확고해지고, 자기 자신의 길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 길이 어디로 이끌든 간에.

(중략)

나는 시를 쓰기 위해, 설교하기 위해, 그림 그리기 위해 거기 있는 게 아니었다. 나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그저 부차적으로 생겨나는 일이었다. 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작가는 이 한 문장을 전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데미안>에서 헤르만 헤세가 하고 싶은 말을 한 문장으로 꼽으라면 역시 이 문장을 꼽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 역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소설을 썼다. 여행을 했고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이를테면 연장이다. 무엇을 위한 연장인가 하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만들어가기 위한 연장인 거다. 

 그렇다고 연장들이 가치 없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 연장들은 반드시 필요했고,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연장을 얻거나 잃어버리는 일은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 그것을 쓰고 있는가 하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인 거다.



175쪽

하늘과 숲과 시내, 모든 것이 새로운 빛깔로 신선하고 찬란하게 다가와 그의 것이 되었고, 그의 말로 속삭였다. 그리하여 그는 여인을 하나 얻는 대신 온 세계를 가슴에 지니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별이 그의 안에서 타올랐고, 그의 영혼을 뚫고 지나며 환희의 빛을 뿜어냈다. 그는 사랑을 했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나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럴 거다. '사랑을 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 가운데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자신을 잃어버리는 데 있지 않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데서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데 있다. 무엇을 해야하는 지 알면서도 탄생은 언제나 무시무시하게 느껴져서 자꾸만 움츠리게 한다. 그럼에도 나아가려 한다. 나를 잃어버렸다면 되찾으러 가야겠고, 되찾은 다음에는 지켜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데미안>은 내게 기쁨을 주는 동시에 밑줄 하나 긋기에도 온 기운을 쓰게 만드는 묘한 이야기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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