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을유세계문학전집 65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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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_149쪽


어쩌면 이 한 문장과 마주하기 위해 그토록 여러 번 <데미안>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 한 문장을 적기 위해 헤르만 헤세는 이 이야기를 적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누군가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아마도 없을 누군가는 "그럴 리 없다!"며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나를 흥분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는 표현은 나를 흥분시킨다.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표현은 그 흥분에 열기를 부추긴다.

결국 그렇게 완성된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는 표현은 아득하고 혼미하기까지 하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건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니 새로운 삶을 보고자 이 작품을 펴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은 새롭기보다 구태의연하기 쉬울 것이다. 그럴 것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내면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그 안에서 우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느리고 구태의연하지만 그 관조의 상태는 격렬한 변화와 거의 같은 공간에 놓여 있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얇게 드리워져 있던 장막이 걷히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상상하지 못한 풍경을 슬쩍 드러내는 거다. 

 

이제는 지금까지 거듭해 온 구태의연한 습관이 장애물이 되는 순간이 되었다. 단순히 멈추어 들여다보기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이제 익숙해서 덜 고통스러워졌을 거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떨어진 곳의 풍경은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맞춤한 세계임에도 무척 낯설게 느껴질 거고 동경과 동시에 공포 또한 품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될 거다. 선택의 시간이다. 열린 장막 안으로 한 걸음 내딛을 것인지, 조용히 못 본 것처럼 장막을 되돌릴 것인지 말이다.


싱클레어는 기묘한 소년 데미안을 만난다. 그리고 데미안과 만나기 전에 자신의 평화롭고 안정적이며 아름다운 세계가 단 하나의 적, 자신의 박해자, 프란츠 크로머로 인해 부서지는 충격을 겪는다. 이 선량하고 순수한 소년 싱클레어는 매일 같이 탈선으로, 더러움으로, 치욕으로 가득한 세계로 떠밀려간다. 평화와 순수의 세계의 주민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홀로 고민하는 동안 병이 나기도 한다. 치욕과 고통을 견디던 싱클레어는 자신을 괴롭히던 치욕이 누이들에게 옮겨갈 위기에 처하자 선택의 기로에 세워진다. 그리고 이 때 데미안이 나타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와 프란츠 크로머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하면서 싱클레어에게 말을 걸어오고, 떠나기 전에 "달리 방법이 없다면 때려죽여 버려!"라는 무시무시한 조언을 남긴다.

 결과적으로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와 대결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이 무엇인가를 바꿔놓았는지 프란츠 크로머는 더 이상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게 된다. 이후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가까워지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가야할 길, 추구해야 할 삶에 대해서도 깨달아 간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결코 데미안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싱클레어 자신, 자기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데미안>은 내겐 무척 특별한 작품이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데미안을 읽고, 충격과 함께 "나 역시 카인의 증표를 가진 것이다."라고 믿게 되었다. 그 후에 알게 된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중 2병이었구나."하는 조롱 섞인 핀잔을 듣기 일쑤였기에, 아무데서나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가끔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도 비슷한 반응에 단지 웃으며 응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들은 그들의 평화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나는 나의 투쟁으로 얼룩진 세계로 나아가는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였다.


<데미안>은 대표적인 성장 소설이라고 한다.

주인공이 나이 어린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는 면에서는 분명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소설에는 성장보다는 투쟁의 요소가 더 많이 숨어 있다.

결정적으로 흔히 <데미안>하면 떠올리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_105쪽는 구절만 봐도 성장이라고 하는 부드럽고 고요한 느낌보다 파괴라고 하는 거친 투쟁의 느낌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기에 더해 싱클레어가 자신으로 가는 길을 가기 위해 경험하는 세계의 부서짐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끊임 없이 투쟁하는 자아의 모습을 그려 보여준다.


<데미안>의 감상은 기운을 빼놓지 않고는 쓸 수가 없다. 너무 긴장하게 되어서는 힘이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헤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사실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든 헤세는 자신으로 살기 위해 끊임 없이 자기의 세계를 부수는 과정을 반복했을 것이라는 거다.  

 신을 세계의 절반이라 하고, 악마까지를 더해야 하나의 세계가 된다는 것은 어떤 시각에서는 범죄를 넘어 죄악이라 비난 받을 위험까지도 품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헤세는 거듭 신과 악마를 한 세계에 몰아 넣는다. 그리고 그 세계란 다름 아닌 하나의 존재, 하나의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의 밝은 면, 선한 성품, 친절하고 상냥한 모습만을 보고자 하고, 보여줘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밝은 세계, 공동의 세계의 규칙이기도 하다. 선한 사람은 사랑받고 악한 사람은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곳, 그것이 반쪽짜리 세계다. 하지만 완전한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왜냐하면 애초에 사람에게 선과 악은 명백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그때 그때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미움을 받을 수 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사랑과 환영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이 반쪽짜리 세계의 진짜 모습이다.


 사람은 악인을 미워한다. 하지만 악인보다 더 미워하는 것은 자신을 악인이라 느끼게 만드는 더 선한 자다. 

옛 어른들은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다 하는 말로 그 가르침을 대신했다. 그러니까, 너무 맑다는 건 사람이 너무 선해서도 안 된다는 말인 셈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정말 맑은 사람이 고기가 없는 것을 아쉬워해서 스스로를 더럽힌다면 그것은 정말 그 사람 자신을 위한 일일까? 자신이 가려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버리고 다중, 대중이 원하는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맑은 물에는 그 맑은 물에만 살 수 있는 고기가 있기 마련이다. 너무 맑은 물은 있을 수가 없다. 혹은 너무 맑은 물도 분명 때와 시를 보내며 변하게 된다. 하나의 세계인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나는 새처럼, 그 물도 한 세계를 거듭해서 부수어 왔을거다. 하나의 상태에 계속 머무른다면 언제까지고 맑을 수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나는 선한 존재, 신과 같은 존재일 거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악한 존재, 악마와 같은 존재일 거다.

하지만 그런 존재의 선악 구분이 나의 길을 가는데 어떤 장애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이 나에게 덧씌운 세계는 그저 부수어 나가야 할 수많은 세계 가운데 하나일 것이기에 끊임 없이 투쟁을 계속할 뿐이다.


사실 처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 어쩌면 데미안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싱클레어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일 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읽었을 때부터는 데미안이 확실히 존재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믿어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 새삼스레 데미안의 실존에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데미안>의 마지막 구절이 달리 읽혔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나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그와 똑같이 닮아 있는 나를._193쪽

이야기 속에서 헤세가 거듭 말하는 있는 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미워하지 않는다거나,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면 흥분하지 않는다거나, 진정으로 해야 할 일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나와 '똑같이 닮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내 안에 있는 것, 바로 진정한 자신일 수밖에 없다.

싱클레어가들여다보는 '어두운 거울'이 있는 곳은 '나 자신 속'이다. 그리고 '나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그와 똑같이 닮아 있'는 것도 싱클레어 자신이다. 

이쯤 적으면 왜 데미안의 존재에 의구심을 갖는지 이해했으리라.


데미안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싱클레어 자신의 투영인지는 사실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결국 싱클레어가 자신의 모습에 가서 닿았다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내면, 자기 안에서의 투쟁에서만 싸웠던 것이 아니다. 외부, 그러니까 물리적인 세계가 부딪히는 현장 즉 전쟁에서도 투쟁을 계속 했다. 주위에서 죽어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들이 추구하는 삶을 헤어려보려고 애썼다. 단지 그들 스스로가 미래를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광기어린 환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젊은이들을 보며 싱클레어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마지막 순간에 그 역시 폭발에 휘말려 의식을 잃었다가 한참 후에야 깨어난다. 그리고나서 고백하기를 「붕대 감는 건 고통스러웠다. 그 후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고통스러웠다._193쪽」고 한다. 그 고통 속에서 들여다 보는 것이 위에 적은 '검은 거울'이다.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끝났다거나 멈추지는 않았다. 다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거다. 

이렇게 적고 보니 꼭 자기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 무수한 세계를 부수면서 무시무시한 탄생의 공포를 감내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새삼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렇게 생각한다.


"누구나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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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23 0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도 다시 을유문화사 고전을 사게되더라구요.^^

대장물방울 2015-05-23 15:13   좋아요 0 | URL
을유 세계문학 몇 권을 읽어봤는데 번역이 매끄럽고 좋더라고요. ^^
그래서 조금씩 들여놓게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