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정의를 말하다 - 셰익스피어 희곡에서 배우는 정의
켄지 요시노 지음, 김수림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히 셰익스피어를 이야기할 때 인용되는 문구가 바로 "우리는 그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영국인의 자부심이 담긴 한 문장이다.

이 말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는 진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세계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읽혔고, 읽히고 있고, 또 읽히게 될 것이란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 얽힌 스캔들, 의혹들이 끊이지 않는 점만 보아도 그가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을 정도다.

한 때 그는 자신에 차다못해 오만하게 보일 만큼 스스로의 재능과 문장, 작품에 대한 자부심을 지녔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생전에 그만큼 크게 성공한 작가가 적었을 뿐 아니라, 그가 일으키는 풍운의 바람이 오래, 강력하게 지속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자신감을 크게 드러내는 것이 <소네트>집에 담긴 글에서 엿볼 수 있는 태도다.

"인간이 숨을 쉬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한, 이 시는 살고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인간이 존재하는 한, 자신의 작품이 영원할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한다.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밖에 이야기 할 수 없는 자신감이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큰 변화를 보였던 모양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 조금 의미가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런 겸손함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의 작품인 '템페스트'에서 셰익스피어의 투영으로 보이는 프로스페로의 태도는 대범하며, 겸손하고 또 때를 알고 높은 자리에서 내려올 줄 아는 현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 뿐 아니라 그러한 태도와 지혜, 그리고 결단과 실천에서 매력을 발견했던 것이 아닐까.

 

이 책에는 9개의 희곡이 담겨 있다.

낯익은 작품도 보이고, 티투트 안드로니쿠스나, 자에는 자로, 헨리아드와 같이 낯선 작품도 있다.

특이한 점은 작품에 대해 문학적인 해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법'과 '정의'의 적용이라는 기준을 적용해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 작품이 선례가 되어 인간의 법과 정의에 대한 판단에 기준이 되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책이 시작된 셈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문장과 매력적인 표현, 놀라운 묘사만을 셰익스피어 작품의 가치로 알고 있던 내게는 조금 충격적이기도 했던 책이다.

그가 이야기 속에 담고 있는 또다른 이야기들.

정의와, 아름다움, 인간의 가치에 대한 고심과 고뇌를 엿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시대가 셰익스피어를 낳았고, 셰익스피어는 시대를 낳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이 책에 담긴 해석들이 정말 셰익스피어가 그렇게 생각하고 또 의도했던 바대로 해석된 것이라는 확언을 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세계와 시대를 매료시키는 그의 문장, 그의 작품이 풍기는 묘한 힘.

 

이 책을 읽기 전에 '티투스 안드로니쿠스'와 '자에는 자로', '헨리아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은 마침 가지고 있어 읽어볼 수 있었다.

다른 책들은 최근에는 출간도 되지 않고 '헨리 아드'는 책을 읽어보고서야 '헨리 5세'라는 것을 알았다.

 

읽어보지 않았던 세 작품을 찾아 읽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저자가 발견했던 것을 나 역시 발견할 수 있을지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훌륭한 작품을 바르게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 참 부끄럽다.

수박 겉핥기식에 그치는 읽기란 얼마나 비참한가.

 

다음에야 말로 그저 놀람에 그치지 않는 그런 자신에 찬 태도로 셰익스피어와 마주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내겐 이례적으로 읽기 시작해서 다 읽기까지 3주 가까운 시간에 걸쳐 찬찬히 읽은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볍게 읽어내려 갈 수도 없는 책일 뿐더러, 가볍게 읽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흔들리거나 위협받지 않을 것이며, 지금의 자유와 권리를 무한히 누려갈 것을 당연히 여긴다.

몇 십년 전 70년대와 80년대까지도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 위상은 어떠했는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정말 느닷없이 일어났듯, 지금 우리의 권리와 자유가 박탈당하고 침해당하는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완의 제도로써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을 견지하고 이 책을 읽어나간다면 좀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책의 말미 즈음에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책을 통해 두 번 언급된 말로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 역사는 몇 안되는 장소에서 단기간에만 일어났던 현상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와 그들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평생을 산 사람들은 운 좋은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 것일까?

억세게 운이 좋지 않다면, 느닷없이 찾아들지 모를 위기에 대비해 민주주의적 양식을 쌓아둘 때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민주주의의 시초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2500년도 더 된 아주 오래 전 이야기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우리가 현재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가 2500년에 걸쳐 발전해 온 것일까?"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결론을 통해 답을 내어놓자면, "아니다"이다.

 

최초의 민주주의의 출현은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긴 시간을 통해 발전되었다기보다 퇴보하고 쇠퇴해서 지도자와 지배계급에 입맛에 맛게 이용될 때만 잠깐씩 그 한쪽 면이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르곤 했던 것 뿐이다.

 

무엇이 민주주의의 쇠퇴를 불러왔을까?

최근 100여년 사이에 급격히 민주주의의 역풍이 강력하게 불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현재 우리 사회는, 그리고 세계는 진정 민주적인가?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과 발전 방향에 대한 예측은 긍정적이 될 수 있는가?

무엇이 민주주의 인가?

 

정말 많은 질문이 떠올랐고,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책을 통해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다만 경계하는 것은 저자의 사견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을 바로 잡는 것, 그것 뿐이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에서 중세 근대로 이어지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발전 양상과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음모와 암투.

민주주의의 번영과 몰락, 그리고 민주주의와 상대적 개념으로 일컬어지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전제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번영과 몰락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던 근 100여년의 민주주의 역사를 세계 곳곳에 시선을 던져가며 짚어준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저자의 풍부한 세계사적 지식과 그 지식에서 얻어낸 냉철한 결론, 그리고 때때로 드러나는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을 적절히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고 여겨졌던 것은 민주주의 역사가, 특히 근대 이후에는 전쟁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세계 열강의 식민지 경영, 전후 처리 과정과 이후의 사상의 변화와 흐름, 그리고 식민지배가 끝나고 독립하게 된 국가들의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총성이 있거나, 혹은 없는 세력 다툼.

그런 점이 더더욱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키웠다.

 

결론을 통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민주주의를 표현한다.

"민주 사회는 수많은 삶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또 공동체적 창의성의 줄기찬 발로다. 그런 창의성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며, 이를 막으려는 세력 또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강경, 혹은 점진적인 수단을 이용해왔다.

그런 이들의 노력이 헛되었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또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현재에 이를 수 있었겠지만, 나 혼자만의 힘으로 달성하려는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정신을 흐리고 훼손시키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사실 민주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알 수없게 되고 말았다.

국가를 다스리는데는 오히려 강력한 전제 정권, 혹은 독재가 유리하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자유와, 권리를 강렬히 희망한다.

 

민주주의는 국가를 위한 것도, 기업을 위한 것도, 집단이나 개인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의 것,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타인의 권리가 짓밟히는 순간에는 외면하다, 자신의 자유가 구속될 기미만 보여도 비명을 지른다.

홀로 완성될 수 없는 것,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 아닐까.

 

세계사와 함께 읽으면 더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세계 대전, 유럽과 아메리카의 근 현대사, 식민 국가들의 독립과 정부 수립 과정, 소련의 붕괴와 공산국가들의 전향,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독자적으로 구축한 나라(여기엔 북한도 포함된다), 그리고 세계사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를 참고로 한다면 좀 더 깊이 있게 다가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라, 오래 두고 배울 수 있는 책과의 만남이 참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수 천년을 이어온 왕조 사회, 그 깊이가 범인으로는 알 수 없다 하여 '구중궁궐'이라 칭해진 궁에 거주한 것은 왕과 왕비만은 아니었다.

왕을 위시한 왕족의 숫자의 수 배, 때로는 수십 배의 인원이 그들의 삶 전반을 보조하기 위해 궁에 머물렀다.

그 궁에 머물던 사람들 중 '여성'을 우리는 궁녀라 칭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 그렇게 많은 수의 인물들이 궁녀로서 궁에서 생활을 했지만 그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궁궐의 비밀 유지와 왕의 위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해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궁녀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편견이 난무하게 되었으니, 따져보면 이 책이 나오게 된 이유도 그러한 편견을 바로 잡고 비밀스런 존재였던 궁녀의 생활을 실증해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구별되는 하나의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궁녀'라는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일'이 그 사람의 존재를 규정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만큼 그들이 한 일은 그들의 존재에 결정적인 증언으로 작용한다.

 

 

지난 세월동안 숨겨져있던 그들 '궁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책에서는 몇가지 드러나지 않았던 '궁녀'들의 비밀을 고증하고 있는데, 그 과정이 흥미롭다.

거의 드러날 수 없는, 오히려 드러나는 것이 이상한 궁녀의 이름과 신원이 역사에 등장하는 순간은 언제였을까?

답을 말하자면 '역모추궁' 때다.

 

 

궁궐에 거주하고 왕과 왕비 그들을 가까이서 모시다 보니 그들을 통해 정보를 얻고 계획을 진행시키려 접촉하는 세력들 또한 많았던 모양이다.

권력을 위한 밀착이 아니었을지라도 그저 가까이에 있다는 '거리'의 이유로 영화를 누리기도 하고, 화를 입기도 했던 존재가 '궁녀'였던 것이다.

 

 

그 동안 알고 있던 것과 가장 달랐던 점은 그들의 입궁이 결코 자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경우가 대다수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출신 성분 또한 '노비'라는 천한 계층이 대부분을 차지했음을 알았다.

 

 

이 모든 것이 그 시대의 권력자들의 치밀한 계산과 안배의 결과라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지만 궁녀의 삶이 좀 더 기구하고 처량하게 느껴졌다.

궁녀라는 존재는 모두 암묵적으로 왕의 소유인 줄 알아왔으나 그것 또한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도 제법 흥미로웠다.

 

 

야심, 혹은 복수심에 불타는 궁녀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는데, 급료를 모아 부동산 부자가 된 궁녀 이야기나 계속되는 승진 누락에 앙심을 품고 평생을 모셔오던 왕족을 배반한 이야기는 철저하게 통제 되었을 것 같은 비인간적인 궁궐 생활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져있기에 20세기 초까지 왕정국가였다는 사실이 지금은 상상조차 되질 않는다.

몰락과 위기 부흥을 지속하면서도 결코 비밀로 남아 있던 궁궐의 생활, 그 비밀이 깨어졌음과 함께 조선왕조의 멸망을 의미한 사건을 꼽자면 아마 '을미사변'의 '민비시해' 사건을 꼽게 될 것 같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사건에 협력한 궁녀가 분명 존재할 것 같다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왕조가 해체되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궁녀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많은 사실 관계를 추론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고 한다.

부흥기와 쇠퇴기의 궁궐 생활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깊고 깊은 구중궁궐의 그늘에서 언제나 묵묵히 일했을 '궁녀'들의 삶과 애완, 그 기쁨과 슬픔을 비교적 잘 고증하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무엇보다 '궁녀'라는 존재에 주목하고 그 실체를 찾아가려 시도 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은 그런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장 인간적인 인간
브라이언 크리스찬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정보통신 기술과 함께 정보통신 기기 또한 급격히 발달해가고 있다.

최초의 컴퓨터가 등장하고 70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원형은 고사하고, 진공관 하나보다도 작은 컴퓨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벌써 놀라고 있다면 곤란할 만큼 놀라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책은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와 '가장 인간적인 인간'을 뽑는 튜링테스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튜링테스트는 뢰브너상의 수상자를 정하는 테스트의 이름으로 '컴퓨터'와 '연합군'이 인간성 대결을 하는 묘한 형태다.

그들은 심사위원에게 자신(컴퓨터, 인간)이 진짜 인간임을 보여야만 한다.

이 엉뚱한 것 같이 느껴지는 테스트가 시작된 것은 '튜링'(컴퓨터 과학 창시자의 일인, 영국의 수학자)이라는 사람이 던진 하나의 질문에서였다.

 

 

"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은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책 속에서 브라이언 크리스찬은 자신이 튜링테스트에 참가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에서부터 '가장 인간적인 인간'으로 선정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적어나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철학적 사유와 기술적 사유를 적절히 조합해내고 있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의 최초 목표는 이것이었다.

'컴퓨터의 인간성에 대한 도전의 저지'

 

 

간단히 테스트 방식을 이야기하자면 '네 대의 컴퓨터 프로그램'과 '네명의 인간'은 각각 열 두명의 심사위원과 '채팅'을 한다.

이 대화는 단 '5분'간 이루어지고 그 사이에 인간은 자신이 인간임을 어필해야 하고, 컴퓨터 또한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여야 한다.

오히려 인간적인 컴퓨터와, 컴퓨터 같은 인간, 보이지 않는 혈투가 그 안에 있었다.

 

 

그는 아직은 컴퓨터가 하나의 인간적 존재로 승인 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귀함을 지켜내려는 '연합군'의 숭고한 영혼을 가진 '전사'였다.

그래서 그는 궁극적인 저지를 위한 '전략과 전술'을 수립해 나간다.

 

 

컴퓨터를 저지하고, 덤으로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인간을 규정하는 것, 인간을 증명하는 것, 가장 인간적인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그동안 믿어왔던 '생각한다'는 것이 정말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가장 수준 높은 사고를 요하는 게임이라 인정되어 왔던 체스에서의 인간 챔피언의 컴퓨터에 의한 패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과연 컴퓨터는 어디까지 발전해 나갈 것인가?

컴퓨터가 인간적이 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기계화 된 것인가?

 

 

하나 하나의 질문에 주석을 달고 해설해 나가듯 저자는 자세하게 지식과 감정을 전달해 준다.

 

 

그가 수립한 하나하나의 전략과 전술이 효과를 보였는지, 혹은 강력한, 그리고 위협적인 컴퓨터의 불참 덕이었는지 인간 '연합군'은 대승을 거두고, 여전히 '인간적인 컴퓨터'를 용납하는 순간을 유예시킬 수 있었다.

내가 유예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 멀지 않은 날에 컴퓨터는 극히 인간에 가까워 질 것이고, 인간은 극히 기계에 가까워져 갈 것이라는 필연적 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느낌의 근거는 저자가 '가장 인간적인 인간'상을 수상하고 난 후 느낀 소감이었다.

인간은 여전히 존귀하고 고귀한가?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의 세계는 과연 우리 인간의 상상속 세계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이 책이 무척 의미심장하면서, 깊이 공감되고, 또 많은 사유의 문제를 던져주었기에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졌다.

 

 

몇 구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발췌하기로 한다.

만약 네 구절 이상 당신의 마음에 와 닿는다면, 당신도 이 책을 읽어볼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30쪽

20세기 중엽에는 첨단 수학 장치를 가리켜 "컴퓨터 같다"라고 말했다면 21세기에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인간을 가리켜 "컴퓨터 같다"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중략)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모방자를 모방하고 있다. 인간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오래된 전설에서처럼, 이제 인간의 운명은 이상야릇한 역전을 경험하고 있다.

 

 

50쪽

"클레버봇은 늘 자기 자신이 인간이고 내가 봇이라고 말한다. 혹시 내가 실제로는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 둘 다 상대방이 클레버봇이라고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클레버봇의 몇몇 응답은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152쪽

어쩌면 우리는 기계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일지 모른다. (중략)

"쓰레기가 우리에게 예술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었다." 비인간적인 것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160쪽

우리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 이유는 오늘이 다른 모든 날들과 비슷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이다.

 

 

265쪽

'계단의 재치'라는 비유가 있다. 적절한 말을 늦게 찾으면 아예 못 찾은 것과 다름없다. (중략)

반면에 복잡성 이론은 '만족'함이고, '제때에 답을 찾기, 그것이 옳으면 더 좋다'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대화이다.

 

 

344쪽

결국 모든 글은 덧없다. 언어 자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변한다. 모든 텍스트는 번역을 통해 소생하기 전에 명료함이 반쯤 줄어든다.

 

 

346쪽

반대로 인간 의사소통은 변경할 수 없다. 어떠한 것도 들리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배심원에게 방금 본 증거를 "잊어버리라"고 웃으면서 요구하는 판사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이런 식으로 반복될 수 없다. 처음 상태는 절대로 다시 만들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366쪽

나는 제대로 듣지 않으면서 상대방과 상호작용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출항 1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출항을 단 한줄로 요약하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

 

"규방 처녀, 자유로운 삶 찾아 미지를 향해 출항하였다 열병으로 사망하다."

이토록 간단히 요약될 수 줄거리지만 이 소설은 간단하지도 범상하지도 않다.

너무 많은 이야깃 거리를 던져주고 있어 숨을 들이켜기도 힘겨워하며 읽어야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율리시스'는 향후 100년간 파고들 거리를 던져 준 작품이라고 칭송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제임스 조이스와 '의식의 흐름 기법'의 선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가로 버지니아 울프가 거론되는 이유도 납득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호평을 하고 있지만, 사실 첫 인상이 좋았던 작품은 아니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 내게 이토록 생소하고 껄끄럽게 다가올 줄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게 등장 인물들의 행동과 내면의 흐름을 일일이 적어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가는 서술 방식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로 가득한 시장 한복판에 던져진 것 같은 혼란과 불편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에 적응해가고, 등장 인물들의 성격과 케릭터에 내재된 이미지가 분명해지면서 흐름은 급물살을 탔다.

 

작가의 삶을 아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도 뼈저리게 실감했다.

아마 작가의 삶을 전혀 몰랐다면 또 하나의 난해한 책 목록에 올려두고 말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대조적인 성향, 이미지의 케릭터를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주제를 강화하려 시도했음이 엿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대조되는 성향의 케릭터를 적어보자면 여성 케릭터로는 여주인공인 레이첼과 수잔이, 남성 케릭터로는 테렌스와 아서의 조합을 들 수 있겠다.

 

이른바 레이첼은 '레이디의 표본'과 같이 느껴졌다.

권위와 부를 지닌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 온실속의 화초처럼 길러져 세상 물정 모르는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모질게 말하면 철부지인 아가씨 케릭터 인 것이다.

 

그에 반해 수잔은 서른 살의 노처녀이자, 결혼을 통해 안정을 꾀하는 순종적인 성향의 케릭터다. 순박하다는 점에서는 레이첼의 순수함과 닮아 있는 것 같지만, 레이첼의 무지에서 우러나는 순수함과 원숙함에서 우러나는 순박함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테렌스와 아서를 보면 테렌스는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계층에 있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소설가'의 포부를 밝히지만, 창작에 열중하지는 않는다.

반면 아서는 부유하지도 않고, 어머니라는 벽에 막혀 자신이 원하는 일도 하지 못한다.

거기에 지금 하고 있는 일조차 전혀 좋아하지 않아서 억지로 하고 있다.

 

특징적인 케릭터를 하나 더 언급하자면 레이첼의 외숙모인 '헬렌'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경험이 많고, 레이첼을 아끼고 사랑하며 독립된 삶을 지켜주고자 하지만 정작 레이첼을 지켜내지 못한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이는 것에 비해 레이첼의 생명의 위기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특징은 내게 '버지니아 울프'가 느꼈던 그 시대의 진보적 여성의 한계를 형상화 한 것처럼 보였다.

레이첼의 죽음과 헬렌의 무력함,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절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케릭터 몇을 언급했을 뿐인데 벌써, 30분이 지났다.

 

제임스 조이스를 이야기하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적었던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이 작품은 각각의 케릭터 하나 하나의 관점에서 감상을 적어도 충분할 만큼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솔직히 한 번 읽었을 뿐인, 아니 읽었다고 이야기 하기도 부끄러워 훑었을 뿐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내가 무슨 대단한 감상을 적어낼 수 있을까?

 

대조적인 케릭터 설정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저자는 수잔과 아서의 커플보다는 레이첼과 테렌스의 케릭터에 더 많은 애정을 보인다.

2 권의 30쪽에 명기했듯, "그것은 끔찍한 일이야. 농장 일꾼들의 손에. 안 돼. 영국인의 손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나 중국인의 손에는 절대 안돼." 이것이 저자의 수잔과 아서에 대한 혹평의 일부다.

남성이 지배적인 권위를 휘두르던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불행을 거치면서도 작품을 써낸 그녀지만 결국 스스로를 수장시키는 죽음을 선택한 그녀의 절망을 온전히 이해 한다고는 못하겠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절망하게 했는지, 번번히 좌절시켰는지 난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레이첼은 분명 '열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레이첼의 죽음을 부추긴 것은 의사의 권위에 지나치게 기댔던 사람들과, 그들의 무지였다.

스물넷의 아가씨가 2주에 걸쳐 열병에 시달리는 동안 그들은 그저 돌팔이 의사인 줄도 모르고 그 의사의 "별 것 아니다"라는 말을 믿는다.

우스운 것은 전적인 신뢰가 아닌 의심이 따라붙은 불완전한 신뢰였음에도 미련스럽게 매달렸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레이첼은 죽었고, 테렌스는 그 죽음에서 도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테렌스는 레이첼의 약혼자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레이첼의 죽음은 금새 잊혀지는 것처럼 보인다.

잠깐의 폭풍과 함께 비가 내리지만, 그것은 금새 그치고 일상이 계속 된다.

테렌스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고 그 밖의 인물들이 평화를 찾아가는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그리고 있다.

 

내게는 그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결말이 비극의 형상을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그깟일로 권위가 흔들리는 일은 없다,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각인 시키듯 잔혹하게까지 느껴진 결말.

 

그녀를 몰랐던 때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무심한 세상에 어떤 희망을 품어 생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이렇게 신선하고, 놀랍고, 고통스럽지만, 강렬한 하나의 작품의 겉을 훑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적어내고 싶지만, 나의 인내가 깊지 않음을 탓하며 그만 적으려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녀의 절망과 슬픔을 좀 더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사람을 죽이나? "그것은 두려움이다."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두려움의 정체를 밝혀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