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항 1 ㅣ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출항을 단 한줄로 요약하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
"규방 처녀, 자유로운 삶 찾아 미지를 향해 출항하였다 열병으로 사망하다."
이토록 간단히 요약될 수 줄거리지만 이 소설은 간단하지도 범상하지도 않다.
너무 많은 이야깃 거리를 던져주고 있어 숨을 들이켜기도 힘겨워하며 읽어야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율리시스'는 향후 100년간 파고들 거리를 던져 준 작품이라고 칭송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제임스 조이스와 '의식의 흐름 기법'의 선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가로 버지니아 울프가 거론되는 이유도 납득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호평을 하고 있지만, 사실 첫 인상이 좋았던 작품은 아니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 내게 이토록 생소하고 껄끄럽게 다가올 줄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게 등장 인물들의 행동과 내면의 흐름을 일일이 적어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가는 서술 방식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로 가득한 시장 한복판에 던져진 것 같은 혼란과 불편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에 적응해가고, 등장 인물들의 성격과 케릭터에 내재된 이미지가 분명해지면서 흐름은 급물살을 탔다.
작가의 삶을 아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도 뼈저리게 실감했다.
아마 작가의 삶을 전혀 몰랐다면 또 하나의 난해한 책 목록에 올려두고 말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대조적인 성향, 이미지의 케릭터를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주제를 강화하려 시도했음이 엿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대조되는 성향의 케릭터를 적어보자면 여성 케릭터로는 여주인공인 레이첼과 수잔이, 남성 케릭터로는 테렌스와 아서의 조합을 들 수 있겠다.
이른바 레이첼은 '레이디의 표본'과 같이 느껴졌다.
권위와 부를 지닌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 온실속의 화초처럼 길러져 세상 물정 모르는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모질게 말하면 철부지인 아가씨 케릭터 인 것이다.
그에 반해 수잔은 서른 살의 노처녀이자, 결혼을 통해 안정을 꾀하는 순종적인 성향의 케릭터다. 순박하다는 점에서는 레이첼의 순수함과 닮아 있는 것 같지만, 레이첼의 무지에서 우러나는 순수함과 원숙함에서 우러나는 순박함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테렌스와 아서를 보면 테렌스는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계층에 있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소설가'의 포부를 밝히지만, 창작에 열중하지는 않는다.
반면 아서는 부유하지도 않고, 어머니라는 벽에 막혀 자신이 원하는 일도 하지 못한다.
거기에 지금 하고 있는 일조차 전혀 좋아하지 않아서 억지로 하고 있다.
특징적인 케릭터를 하나 더 언급하자면 레이첼의 외숙모인 '헬렌'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경험이 많고, 레이첼을 아끼고 사랑하며 독립된 삶을 지켜주고자 하지만 정작 레이첼을 지켜내지 못한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이는 것에 비해 레이첼의 생명의 위기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특징은 내게 '버지니아 울프'가 느꼈던 그 시대의 진보적 여성의 한계를 형상화 한 것처럼 보였다.
레이첼의 죽음과 헬렌의 무력함,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절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케릭터 몇을 언급했을 뿐인데 벌써, 30분이 지났다.
제임스 조이스를 이야기하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적었던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이 작품은 각각의 케릭터 하나 하나의 관점에서 감상을 적어도 충분할 만큼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솔직히 한 번 읽었을 뿐인, 아니 읽었다고 이야기 하기도 부끄러워 훑었을 뿐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내가 무슨 대단한 감상을 적어낼 수 있을까?
대조적인 케릭터 설정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저자는 수잔과 아서의 커플보다는 레이첼과 테렌스의 케릭터에 더 많은 애정을 보인다.
2 권의 30쪽에 명기했듯, "그것은 끔찍한 일이야. 농장 일꾼들의 손에. 안 돼. 영국인의 손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나 중국인의 손에는 절대 안돼." 이것이 저자의 수잔과 아서에 대한 혹평의 일부다.
남성이 지배적인 권위를 휘두르던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불행을 거치면서도 작품을 써낸 그녀지만 결국 스스로를 수장시키는 죽음을 선택한 그녀의 절망을 온전히 이해 한다고는 못하겠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절망하게 했는지, 번번히 좌절시켰는지 난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레이첼은 분명 '열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레이첼의 죽음을 부추긴 것은 의사의 권위에 지나치게 기댔던 사람들과, 그들의 무지였다.
스물넷의 아가씨가 2주에 걸쳐 열병에 시달리는 동안 그들은 그저 돌팔이 의사인 줄도 모르고 그 의사의 "별 것 아니다"라는 말을 믿는다.
우스운 것은 전적인 신뢰가 아닌 의심이 따라붙은 불완전한 신뢰였음에도 미련스럽게 매달렸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레이첼은 죽었고, 테렌스는 그 죽음에서 도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테렌스는 레이첼의 약혼자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레이첼의 죽음은 금새 잊혀지는 것처럼 보인다.
잠깐의 폭풍과 함께 비가 내리지만, 그것은 금새 그치고 일상이 계속 된다.
테렌스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고 그 밖의 인물들이 평화를 찾아가는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그리고 있다.
내게는 그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결말이 비극의 형상을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그깟일로 권위가 흔들리는 일은 없다,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각인 시키듯 잔혹하게까지 느껴진 결말.
그녀를 몰랐던 때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무심한 세상에 어떤 희망을 품어 생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이렇게 신선하고, 놀랍고, 고통스럽지만, 강렬한 하나의 작품의 겉을 훑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적어내고 싶지만, 나의 인내가 깊지 않음을 탓하며 그만 적으려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녀의 절망과 슬픔을 좀 더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사람을 죽이나? "그것은 두려움이다."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두려움의 정체를 밝혀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