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간의 감촉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평점 :
모두에게 공평한 시간... 과거 아름다웠든지 건강했든지 추했든지 가난했든지 부유했든지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든지, 은둔 생활을 했든지... 모두 늙는다. 두 노인(65세) 자매의 이야기를 너무 아름다운 글과 시의 적절한 표현으로 서술하고 있는 은희경의 신작 ‘시간의 감촉’에 대한 이야기이다.
은희경 작가 님의 책은 사실 오랜만에 읽는다.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읽었지만 사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작가 님 책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만난 작품은 실로 놀라웠다. 소설을 좋아해서 많이 읽고 요즘은 젊은 작가 님들의 감각적인 글들을 읽으면서 감탄하고 있었는데 실로 연륜이 있는 소설가의 글을 읽으니 너무 표현이 좋고 글맛이 있어 읽는 동안 경탄을 금치 못 하고 ‘바로 이거였어~!’ 하며 공감한 곳이 한 둘이 아니다.
한해 1월과 12월의 태어난 자매 안나와 경선, 둘은 생긴 것부터 성격 등 모든 것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거의 동일한 생애주기 속에 있으면서도 일 년 정도는 안 보고 지낼 정도로 서로 무심한 사이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작품에서 1부 ‘몸의 사건들’은 예순다섯 살 생일을 맞은 안나, 그리고 전남편 P의 부고 소식을 우연히 접하게 된 경선의 아침 장면으로 시작한다.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는 한 만나지 않는 두 사람이 조우하게 된 곳은 뜻밖에 병원이다. 경선의 건강검진 결과 신장에서 종양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안나는 예정에 없던 보호자가 되어 경선을 간병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경선 대신 경선의 손녀 다니엘까지 돌보게 되면서 그간 대체로 잔잔하게 흘러갔던 혼자만의 삶에 변화를 맞는다.
안나는 경선의 병간호를 계기로 잊고 지낸 오랜 과거를 떠올린다. 경선의 출생과 백일 사진 촬영 날, 그리고 소식이 끊어진 이웃들과 친척 어른들. 이제는 ‘낡은 앨범’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기억의 증거들. 이처럼 1부는 안나의 생일, 경선의 수술, 그리고 경선 전남편의 죽음 등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라는 ‘사건’과 그로 인한 인물 내면의 파동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독자를 깊은 몰입 속으로 빨아들인다.
2부 ‘고독과 매혹’은 안나와 경선이 젊었던 시절 사랑에 빠졌던 일화를 들려준다
3부 ‘우리의 첫’은 안나와 경선, 그리고 경선의 손녀 다니엘 세 사람이 온천과 항구도시로 잘 알려진 이국으로의 근거리 해외여행을 떠나는 모험을 그린다. 무엇보다 세 사람이 ‘우리의 첫’ 게임을 같이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첫’ 게임은 “‘나의 첫 OO는 OO입니다’라고 받은 다음에” “자신의 첫번째 경험을 이야기”하는 놀이로, 세 사람은 ‘나의 첫 여행’과 ‘나의 첫사랑’, ‘나의 첫 선생님’ 등 과거의 내밀한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세 사람이 서로의 몰랐던 진실한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좀더 두터운 관계가 되었음을 감지하게 하는 애틋하고 뭉클한 장면이다. 멈추고 고여 있던 시간에서 벗어나 새 기억의 역사를 형성해내는 두 할머니와 손녀 세 사람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여운을 전한다.
대망의 4부 ‘언젠가 멋진 날’은 여행지에서 돌아온 경선의 좀더 나아진 몸과 회복된 일상을 그린다. 4부는 안나와 경선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서로의 기억들을 마침내 소용돌이처럼 펼쳐 보인다. 각자 지니고 있던 상처의 아픔이 실은 서로를 이해하고 치유하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씨앗이었다는 것을.
읽으면 읽을수록 많이 공감했고 은근히 웃었다. 나의 자매와 어린 시절, 학창시절, 그리고 앞으로 머지않았을 노년시절을 생각해 본다.
자매들과 사이좋은 다른 이들을 보며 너무나 다르고 맞지 않았던 그럼에도 안쓰럽고 걱정되는 나의 자매...
찬란하게 펼쳐지길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 했고 때로는 남루한 실제 우리네 삶과
멋진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걱정도 해보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지 않고 욕망과 바람과 사랑이 사라지지 않을지언데 그래도 살아야지 생각을 해본다.
따라 적고 싶은 많은 구절이 있었다.
이만 총총.
몸에 관한 한 타인은 결코 개입하지 못한다. 남이 볼 때 남루하든 비참하든 한심하든 몸의 당사자에게만 유일하게 감각되는 고유의 삶인 것이다. - p.14 - P14
‘첫’은 ‘가장 오래된’이다. 안나와 경선의 ‘첫’은 점점 ‘가장 오래된’으로 수렴해간다. 경선의 말처럼 그 모든 게 다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은 매 순간이 ‘첫’이다. 안나와 경선에게도 첫 순간은 수없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경선이 틀렸다. ‘우리의 첫’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최근’과 ‘우리의 다음’이 되기도 한다. - p.357 - P357
한 사람의 몸안에는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들어 있다. 몸은 기쁨과 고통과 욕망과 상실의 부화장이고 사랑의 꿈과 왜곡을 간직한 도서관, 마지막 삶이 거처할 최후의 집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재로 사라진다. 개체의 시간을 끝내고 무한에 섞여드는 여정이다. - p.373 - P3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