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준비하는 동안 가장 행복하고 돌아와서 추억할 때 두 번째로 행복한 것 같다. 정작 여행 중에는 행복감보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약간의 두려움으로 다소 긴장되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긴장은 비정기적으로 나를 유혹하고 나는 못이기는 척 넘어가기도 한다. 특별히 옥죄어 살고 있다는 느낌도 없는데 낯선 이국의 땅에 서면 자유로움이 땀구멍까지 파고드는 느낌이 든다. 탕진해야만 할 것 같은 자유로움! 그러나 이 자유는 돌아가야 할 집의 말뚝에 매어 있는 신축성 좋은 끈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걸 안다.
준비하는 동안 가장 행복한 것이 여행이라고 했지만 정작 여행을 떠나지 못하면 이 행복은 무효다. 스스로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취소된 이번 여행도 돌이켜보면 행복한 고문이었다. 사실 내가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은 다윈의 섬이라 불리는 갈라파고스 군도다. 이곳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은 『핀치의 부리』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리뷰를 연결하면 미리 다녀오신 분의 멋진 사진이 링크되어 있다.)
http://blog.aladin.co.kr/734872133/2083304
때로는 사막처럼 뜨겁고 또 때로는 무지막지한 스콜이 반복되는 이곳은 한마디로 극한 상황의 무대다. 나는 이곳이 왜 나의 로망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아무런 증세도 없이 잠복기만 있는 무사한 내 일상이 반란을 꿈꾸는 걸까? 만만찮은 비용과 캐나다-에쿠아도르-갈라파고스를 거쳐야하는 거리, 한달 이상을 잡아야하는 시간적 여유, 저질체력 등등이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꿈꾸지도 말아야하느냐고 부추기는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그곳의 여러가지가 나를 유혹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척박한 환경이 그렇고,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면서도 화려한 동물들의 때깔이 그렇고, 우편배달부 없는 새빨간 우체통이 또한 그렇다. 어떤 요행이 내게 와서 갈라파고스의 땅을 밟을 수 있다면 나는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단 며칠 깜박이다 죽어도 좋으리라. 그리고 나는 내게 보내는 편지를 쓰겠다. 다음 생으로라면 몰라도 아무도 내게 배달해주지 말라는 부탁이 있는 편지 말이다.
이런 간절함은 늘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올여름 계획했던 곳은 동유럽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 헝가리.독일 등등. 그 중에서도 독일은 여행지가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 아니 만나야할 사람때문에 더욱 기대를 하던 곳이기도 했다. 베르테르처럼 슬픔의 총탄을 머리속에 박아넣을만큼은 아니었지만 라일락의 달콤한 향기와 이파리의 소태처럼 쓴 첫사랑의 맛을 알려준 사람이 거기 있었다. 아니 거기 있다고 믿었다.
여행지와 관련된 이런저런 책들을 찾다가 알게된 것은 동유럽에 대한 안내책자가 생각만큼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표지모델의 저 눈빛 때문에 매료되었던 책이다. 혹시라도 저런 눈빛을 가진 남자를 만난다면??? 물음표를 몇개씩 붙여두고 뒷감당 못할 꿈에 부풀었었다.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는 생각보다 조금 두툼하다. 여행지 정보는 본의 아니게 여행자들을 골탕먹이기 쉽다. 사라지는 것들 새로 생기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한시적인 정보들은 거의 없다. 각 나라들의 역사, 문화에 더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또 여행자의 담담한 기술이 여행으로 들뜨기 쉬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겸허하게 준비해야할 것들을 일러준다.
<굴라쉬 브런치>. 아무래도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실망한 책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위의 책과는 여러가지로 비교되는 책이기도 하다. 프롤로그에서 짜라투스트라의 고독을 얘기하다가 짜파게티로 건너 뛰면서 짭짭 입맛을 다실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몇장 넘기다보니 책장이 두어 쪽 툭떨어지면서 한페이지씩 자꾸 떨어지려 할 때도 나는 이것을 어떤 징후로 느껴야 옳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은이가 욕조가 없는 숙소에서 샤워기로 샤워하는 장면의 글을 읽으면서 모든 기대를 접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 다리를 앞뒤 양옆으로 쳐들고 아크로바틱과 요가와 발레가 결합된 창조적인 동작을 선보여가면서 한참동안 세척에 열중했다."
저자의 뒷물하는 얘기까지 독자가 읽어야한단 말인가? 그냥 흐르는 물로 닦으면 안되나? 꼭 저렇게 고차적인 자세로 유난을 떨며 씻어야 하나? 지저분하게 사는 나는 이해가 안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읽었다. 읽다가 읽다가 혹시라도 내가 지금 뭘 잘못읽고 있나 싶어 확인하면서 읽다가 이 책이 '동유럽 여행기'가 아니라 '동유럽 독서여행기'라는 걸 알았다. 그러고나서는 몇권 책을 챙기고 던져두었다.
클림트의 황금빛에 오래 취해 있었는데 이상하게 에곤 실레에게 더 마음이 간다. 빈에는 왜 이렇게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많은건가? <빈이 사랑한 천재들>은 지은이가 기자인 모양인데 깔끔한 글과 적당한 깊이와 넓이를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