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록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3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1999년 12월
평점 :
품절


無序錄. 순서가 없는 책이라는 뜻인가 싶다. 차례에 따르지 않고 펼쳐든 곳 아무 곳이나 읽어도 좋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처음 한두 편을 읽고 나면 작자의 의도를 외면한 채 혹시라도 빠트릴세라 아껴 읽게 되는 책이다.

재치와 화려한 수사로 어필하지 않는다. 난해하거나 미망을 앓을 철학적 개념어도 없다. 그의 시선은 높은 곳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눈은 낮은 자리에 있으며 마음은 더 깊은 자리에 가 있다. 그의 언어들은 창덕궁 후원에서 홀로 농익은 앵두 같다. 그의 문장을 읽다보면 마른 기왓장에 성긴 빗방울 듣듯 아득하게 번져와 그윽하게 채색된다. 행간 행간에서는 향기가 베어난다. 늦가을 얼개를 펼치는 햇살에 투명하게 살아나는 창호지의 실핏줄처럼 고운 피가 심장을 뛰게 한다.

무엇보다도 내게는 새벽 빈 하늘을 밟고 고요히 내려온 서리꽃 같다. 그 차고도 은은한 빛의 결정체. 태양의 가장 여린 숨결에도 형체를 잃어버리지만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미지만 남은 서리꽃 말이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어떤 현란한 수사도 그에게는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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