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생각쓰기
윌리엄 진서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궁극적으로 글쓴이가 팔아야 하는 것은 글의 주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가끔 내가 쓴 글들을 들여다보면 글 속에 내가 있다. 글 속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부끄럽고 때로 아주 모진 일이다. 그 속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미숙한 시선이 있고, 삶과 사랑의 상처가 덕지덕지 붙어있기도 하다. 아무리 빛나는 수식어로 치장하려고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날것들이 뿜어내는 냄새도 있다.

자기 자신을 팔자. 그러면 자신만의 주제가 호소력을 발휘할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믿자. 글쓰기는 자아행위다.

나는 나 자신을 팔려고 생각해본 적 없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자 했을 뿐이다. 나의 삶이 월척 한 마리 낚아보겠다고 밤을 꼬박 새우는 낚시꾼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으므로 ‘부르튼 입술로 또 하루를 입질한다’고 썼다 <베드타임 스토리>. 

월세방을 전전하다 전셋집으로 옮겨 앉았을 때 누가 꽃사과나무 화분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계절은 겨울을 노크하고 있는데 통통하던 줄기는 윤기를 잃고 점점 시들어갔다. 아주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작은 가지 하나를 꺾으려다가 물컹! 하고 손끝에 전해져오던 그 탄력 있는 이물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꺾은 것은 나뭇가지인척 붙어있었던 자벌레였기 때문이다. 나동그라진 자벌레를 보면서 나로 인해 누군가 꽃사과나무처럼 시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나도 누군가의 것을 빨아먹는 자벌레일지 모른다는 느낌은 끔찍했다. 그래서 ‘어떤 보이지 않는 눈 있어 천연덕스레 나 꽃사과나무에 세 들어 살았네’라고 썼다<자벌레>. 가시를 세운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겨울날 나는 갑자기 몸 둘 곳, 마음 둘 곳을 잃었다. 아마도 내 온기 결핍증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글은 누구보다도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쓰는 일이다.

부르튼 입술로 하루를 입질하고 자신이 타인의 체액을 빠는 벌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결코 즐거운 일일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쓴다.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쓰든 작가로서 내가 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팔 것은 여러분 자신이다.

내 글을 팔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나는 팔기보다는 소통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돈은 안 되지만 이 소통도 한편으론 내 글을 파는 행위이니 생각을 고쳐먹자. 지방에 계시는 어떤 분이 내 시를 읽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올곧게 읽어 보내준 편지를 받았을 때의 그 기쁨을 단지 기쁨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통의 기쁨 뒤에 낱낱이 내가 읽히는 두려움이 뒤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평생 내 시의 첫 독자의 자리에 그를 모실 것이다.

어느 평론가가 내게 다섯 편의 시를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기뻤고 내심 기대 또한 있었다. 전문가의 눈에 내 시가 어떻게 비치는지 몹시 궁금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내 시를 읽어달라고 부탁하거나 구걸한 적 없다. 시가 내 손을 떠나 지면에 발표되고 나면 그건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해왔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명편을 써내는 것은 모든 작가의 희망이고 나 또한 그런 희망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과장하거나 엄살떨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평가는 자신이 평가하는 매체에 애정을 가져야한다.

문학평론가는 기본적으로 문학에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또 전문직이니 남들보다 더 많이 읽고 썼을 것이고 그러니 더 깊이 읽을 것으로 생각했다. 최근 ‘김현의 현현’이라는 세간의 상찬을 받고 있는 평론가가 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기뻤다. 그의 글은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지만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단의 어른들(신경림, 고은)께 올리는 공손한 회초리가 없었다면 나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비평은 진지하고 지적인 행위다. 그것은 진지한 예술작품을 평가하고 그 작품을 같은 매체 또는 같은 예술가의 다른 작품들이라는 큰 맥락 속에 놓는 것이다.

나는 등단한지 이제 겨우 일년 남짓 되었고 발표한 원고래야 등단작 포함 고작 20여 편에 불과하다. 시집 한 권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도 저자의 말처럼 ‘비평은 진지하고 지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전문가의 눈에 띄었으니 ‘같은 매체 또는 같은 예술가의 다른 작품들이라는 큰 맥락 속에 놓’이기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내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읽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 평론가는 S대 출신에 모 대학교 인문학부 교수님이시다.  S대 출신에 교수님이시고 평론가인 분이 내 시를 못 읽어냈다고 말한다면 그건 나의 오만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인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교묘하고도 알뜰하게 비껴 읽는 이 탁월한 능력이 전문가의 능력이라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시와 시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들과 그들이 표현하자고 하였던 것, 그리고 그것이 읽는 자에게 야기시킨 심리적 동요를 다같이 파악한다는 것에 다름아니다(김현).  그 평론가에게 나의 시가 심리적 동요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것은 명백하다. 시인에 대한 이해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평문을 쓰고자했다면 최소한 자신이 쓰려고 하는 시에 대해서는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하지 않았을까. 그의 글은 '표층적인 진단'에 불과하고 '어느 하나에도 진지한 관찰과 인식이 뒤따르지 않고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렇게 '문제의식의 결여'로 엮은 시가 어떻게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두번씩  거론되었는지 역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글쓰기는 강력한 탐구 수단이며 자신의 일생과 화해하는 기쁨을 준다. 또 상실, 슬픔, 병, 중독, 실의, 실패, 등 살아오면서 겪었던 커다란 좌절을 되짚어보면서 이해와 위안을 발견할 수도 있다. 
 

두 달 동안 화도 나지 않았다. 단지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나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왜 일면식도 없는 나를 뽑았고 병아리 눈물만큼의 애정도 없으면서 읽고 썼을까가 궁금했다. 땀구멍만큼의 애정이라도 느껴졌더라면 동기부여도 되고 오기로라도 시 쓰기에 전념했을 것이다. 그 글을 읽은 어떤 분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위로의 말을 듣는 순간 감정이 복받쳐 하루 종일 눈가에 수평선이 넘실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였던 것 같고 스스로 자신과의 화해의 제스추어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내내  기쁘지도 않았고 이해와 위안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나는 이번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시는 학벌이나 지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삶과 인간과 언어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시에  흐르는 피와 온기를 느낄 수 없다는 것.  또 하나, 나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생겼다. 아예 뽑지를 말든가 뽑았거든 제발 애정을 가지고 깊이, 푸욱 찔러 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독을 머금고 다시 태어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