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 시인선 86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



우리 육체의 집을 지어도 그 문가에서 서성거리는 것
은 마음의 집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집을 찾
아가도 그 문가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우리가 집이라 부르
는 그것도 제 집을 찾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비울수록 무겁고 다가갈수록 멀어라!








숨길 수 없는 노래 2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
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
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
이다





샘가에서


어찌 당신을 스치는 일이 돌연이겠습니까
오랜 옛날 당신에게서 떠나온 후
어두운 곳을 헤매던 일이 저만의 추억이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저의 몸에 젖지 않으므로
저는 깨끗합니다 저의 깨끗함이 어찌
자랑이겠습니까 서러움의 깊은 골을 파며
저는 당신 가슴속을 흐르지만 당신은
모른 체하십니까 당신은 제게 흐르는 물을
주시고 당신은 제게 흐르지 않는 중심입니다
저의 흐름이 멎으면 당신의 중심은 흐려지겠지요
어찌 당신을 원망하는 일이 사랑이겠습니까
이제 낱낱이 저에게 스미는 것들을 찾아
저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홀로 빛날 당신의
중심을 위해 저는 오래 더렵혀질 것입니다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
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