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자 문학.판 시 14
박용하 지음 / 열림원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최악을 다하겠습니다

 

답변기계들처럼
답변기계들처럼
말끝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악수기계들처럼
악수기계들처럼
말끝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운동기계들처럼
운동기계들처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뭐, 이런
개대가리들이 다 있나!  

 

 

 

 

 





뒤는 절벽이고
앞은 낭떠러지다

돌이킬 수 없는 허공에서
너는 뛰어내린다
너는 그처럼 위험하고
너는 그처럼 아슬아슬하다

돌이킬 수 없는 생처럼
한 번 가버리는 생처럼
뒤돌아봐도 그만인 사람처럼
너는 절대 난간에서 뛰어내린다

아마도 너의 뿌리는
너도 대부분 모를 것이고
너의 착지도 너의 얼굴은 영영 모를 것이다



 

구름이 높아 보이는 까닭



내일 고치러 가겠습니다
하루가 금가고 이틀이 깨져도 오지 않는다
이번 주말에 들러 꼭 수리하겠습니다
그래놓고 꼬옥 오지 않는다
주말만 발바닥에 매달린다
거짓말을 끼니처럼 하는 자들도
그걸 뻔히 알면서도 묵묵히
듣고 있는 자들도 다같이 서러운 자들이다
서로가 가해자이며 서로가 피해자다
태연히 거짓말하는 얼굴에도
두근거리는 한 근 심장이 올라와 있기는 하다
그 광경을 안쓰럽게 쳐다봐야 하는 사람의 비애가
거짓말하는 자의 얼굴에도
드문드문 새털구름처럼 높이 떠 있기는 하다
약속을 못 지키게 돼 미안합니다
전화 한 통만 해도 그는 큰 사람이다
금방 고치러 가겠습니다
곧 전화할게 그래놓고
곧 한다니까 그래놓고
날밤을 까도 오지 않는다
이쯤되면 속이는 기술보다
속아주는 기술이 먼저다
속이는 자의 산술보다
속아주는 자의 아량이 더 커야 한다
곧 전화할게 그래놓고
금방 간다니까 그래놓고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오지 않는다
골 빈 듯이 하는 빈말 세상에서
이쯤 되면 속아주는 것도 사랑이다
속아주는 것이 속이는 것이다
담에 만나면 술 한잔 합시다
담은 무슨 다음? 그냥 가!



 

성욕


1
수줍음과 난폭함이
늘 양날의 칼처럼 맞대고 있다
평생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며
귀하다고도 천하다고도 할 수 없는
우리들 우글거리는 모든 악의 원천!
지상이고 천상인 그대는
노래 없는 얼굴로 나타나
늘 정체 모를 시간과 함께
삶의 의젓한 얼굴을 급습하는구려

2
말은 통하는데 몸이 안 통한다
비애다
말은 안 통하는데 몸은 통한다
그것도 비애다
말도 안 통하고 몸도 안 통한다
비애도 그런 비애가 없다


 

성교


그대와 처음 눈을 맞췄던 날
반했던 날
눈이 맞았던 날
그게 빛으로 하는 성교란 걸
알게 된 건 아주 훗날의 일이지요
빛이 맞으니 입도 맞추게 되었죠

처음 동해와 눈을 맞췄던 날
야--했던 날
하늘 깊이 푸르렀던 날
그게 무한과의 성교란 걸
알게 된 건 아주 훗날의 일이지요
지금처럼 훗날의 일이지요


 

虛平線


만고의 밤낮을
별은 빛나기만 할 뿐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빛날 뿐이다

지구의 낮과 밤을
해와 달은 비추기만 할 뿐
개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비출 뿐이다 
 

가끔 비나 진눈깨비가
그 빛을 씻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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