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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ㅣ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평점 :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는 16세기 이탈리아의 한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의 재판기록을 통해 지배계급 문화와 민중문화가 교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통의 증거는 메노키오의 핵심 주장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이단적이고 불경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소에 고발당하고 교황청에 의해 화형에 처해진 인물이었다. 메노키오는 이 세계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천지창조설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그는 원죄를 부정하고 성직자 계급제도의 특별한 권위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종교를 세속적 현실로 끌어내리려 하였다
문명사회 내부에 여러 다른 수준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어왔다. 특정시대의 종속계급에도 ‘문화’라는 용어가 적용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이는 흔히 민중문화라고 불린다. ‘민중의 작품으로서의 문화’를 의미하는 민중문화는 민중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독창적 이념이나 신앙은 상층계급의 소산물로 복속되었고 기록보다는 대부분이 구비 전승문화의 형태로 남아있다. 민중문화를 연구한다는 것에는 두 가지 요소가 개입한다. 하나는 역사를 거대한 흐름 중심으로 보는 거대서사에 대한 반론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계급의 기록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진즈부르그 이전에도 민중문화는 로베르 망드르, 주느비에브 볼렘, 미셀 푸코, 미하일 바흐친 등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졌다. 장날 장돌뱅이들이 팔던 싸구려 소책자들에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테마들에 대한 연구(로베르 망드르), 종교적 가치가 내재된 독창적이고 자율적인 자발적 표현에 대한 관찰(주느비에브 볼렘), 이성중심주의 서구문화가 배척했던 비이성적 요소들에 대한 연구(미셀 푸코) 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각기 다른 견해와 주장은 민중문화에 대한 왜곡과 미화 또는 문화의 피안에 위치시키는 등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미시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피지배 계급을 연구한다는 것, 이것이 현재 진주부르그가 취하는 기본 입장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 속에서 사육제의 요소를 추출하고 그것이 중세의 지배계급 문화와 사실상 대립하지만 상호간 영향을 주기도 했다는 바흐친의 연구와 같은 맥락에 있다.
자신의 관점을 논증하기 위해 진즈부르그가 주목하고 있는 사람은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방에 살았던 중세의 한 방앗간 주인이다. 1532년 태어난 그의 이름은 도메니코 스칸델라이지만 메노키오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고 첫 심문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메노키오는 16세기의 대다수 농민들과는 달리 읽고, 쓰고, 암산하는 능력이 있었고 마을의 촌장과 행정관을 엮임 하기도 했다. 메노키오는 최초의 심문에서 그만의 독특한 천지창조설을 이단 심문관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가 생각하고 믿는 바에 따르면, 흙, 공기, 물 그리고 불, 이 모든 것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큰 덩어리를 형성하는데 이는 마치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더기들은 천사들입니다.” 치즈와 우유, 구더기-천사들, 혼돈에서 생성된 하나님 등은 카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문화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세사회에서는 명백한 이단적 성격의 발언이었다. 이러한 이단적 발언은 단지 그의 천지창조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자식이 아니라 인간의 자식이라고 주장하였고 성모 마리아가 성령을 임신하고 출산 후에도 처녀로 남아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만의 적극적인 독서법으로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을 억압의 가장 대표적인 주체로 규정하고 그들을 ‘모독하는 일’을 자신의 ‘천직’으로 여겼다. 메노키오의 이러한 주장들은 구전문화와 기록문헌들의 내용을 독창적으로 자기화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이 주신 것이지만, 후에 인간에 의해 내용이 첨가되었습니다. 사실 성서는 간단한 몇 마디로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점점 그 규모가 확대되는 전쟁에 관한 기술과도 같습니다.” 성서에 대한 이와 같은 메노키오의 발언은 그가 교리를 거부하고 성서까지도 부정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메노키오는 세례를 포함한 모든 성사를 사제의 착취와 억압의 수단인 상업적 발명품으로 규정하고 이를 거부했다. “기름이 발리는 것은 육체일 뿐이며 영혼에는 기름이 발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제와 수사에게 가느니 나무에게 고백하러 가는 게 낫습니다.” “저는 교회의 율법과 계율이 모두 장사 수단이며, 성직자들은 이러한 수단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등 메노키오는 축성과 신앙고백, 성직자의 부패를 비웃으며 복음서에 기초한 최소한의 실천적 교리만을 고집했다. 메노키오의 이러한 주장들은 인쇄술의 발달과 종교개혁에 힘입은 바 크다. 인쇄술의 발달은 그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언어를 주었고, 종교개혁은 교회의 부조리와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진즈부르그가 연구대상으로 삼은 메노키오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농부도 지식인층도 아니었다. 그는 모래시계의 좁은 통로를 통과하는 모래처럼 구전문화와 기록문화의 경계를 드나들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경계성’ 때문에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를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에 대한 판결문은 심문관들과 메노키오의 문화적 이질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메노키오가 발전한 인쇄술을 통해 지배계급의 문화를 습득하고 자기화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역사속의 특정인물에 대한 탐구는 맥락을 벗어난 사건사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다시 말해 메노키오 한 사람이 전 민중계급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그러한 탐구를 통하여 개인에 대한 역사 혹은 개념을 사회계급으로 확대할 가능성을 열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