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권장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70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남상영 옮김 / 소화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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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일본에  다녀온 후 몇장의 지폐를 환전하지 않고 아직 보관하고 있다. 잘 꺼내보지도 않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얼굴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일만 엔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이 실려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사람을 몰랐었다. 지금 살펴보니, 게을러서 환전을 하지 않고 갖고 있는 각국의 지폐는 각양각색의 인물열전이기도 하다.

지폐에 얼굴이 있는 사람의 책을 읽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자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쿠자와의 얼굴이 일본의 최고액 지폐인 10000엔에 실린 것은 1984년이라고 한다. 일본 근대 문학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나쓰메 소세키의 사진과 일본의 근대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는 후쿠자와의 사진이 나란히 지폐에 실리게 된 것은 좀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흔희 우리의 근대를 이야기 할 때 일본으로부터 이식된 근대라고 한다. 이식된 근대는 많은 문제를 야기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근대가 이식되는데 있어서 근대의 정신보다 물질적인 면이 주류를 이루는 외형만이 이식되었다는 것일 것이다. 일본에 의해 우리의 근대가 이식되었는데, 그렇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854년 일본 역시 미국의 무력에 굴복해 불평등조약을 맺고 개항을 했다. 그 후 서구 열강들이 몰려왔고 일본은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추진해 나갔다. 일본의 근대적인 문명개화의 추진과 독립을 지키는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다. 후쿠자와는 밀려들어오는 서구문명으로부터 외형적인 면만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내면 역시 문명화를 이루어야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학문을 권장하고 있다. 후쿠자와가 권하는 학문은 단순히 문자를 익히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익힌 내용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실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후쿠자와 스스로도 처음 형의 권유로 난어(蘭語)와 난학(蘭學)을 익혔지만 후에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학으로 영어를 익힌다. 서양의 문물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근대화의 시기에 그는 실학을 실천한 것이다. 또한 그는 유치원 및 대학을 설립하고 다양한 서양학술 서적들을 번역하는데 앞장섰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많은 어휘들 문명(civilization). 연설(speech). 저작권(copyright)등도 모두 그의 번역어라고 한다.

 

 

후쿠자와는 一身獨立, 一家獨立, 天下國家獨立를 강조하는데 이는 『대학』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 맞닿아 있다. 그는 국민들 개개인의 독립을 특히 강조했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당시의 근대화는 지금 내가 느끼는 세계정세보다도 더 급변하게 돌아갔을 것이다. 시대의 급류 속에서 올곧게 독립된 민족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 개개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몸소 실천했던 학자의 긴장감과 절실함이 느껴졌다.  일본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우리의 근대화에 후쿠자와의 이런 정신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가 의문으로 남는다. 후쿠자와의 초기 저작인 이 책의 내용과는 달리 1894년 청일전쟁 발발 당시 군비 명목으로 만엔을 정부에 지원했다는 후기사상의 변화 역시 짚어야할 것으로 남는다. 일본인들은 현재의 만엔짜리 지폐에 그의 초상을 남겨 그가 전쟁지원금으로 낸 만엔을 기념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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